재세례파, 급진적 평화주의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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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세례파, 급진적 평화주의의 시작
  • 박충구
  • 승인 2018.11.19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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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적 병역 거부의 평화신학 이해, 재세례파 신앙을 중심으로-3

종교개혁 당시 가톨릭교회는 성서에 대한 평신도의 접근성을 차단하고 성직자들이 생산해낸 교의와 성례를 성서의 권위보다 더 권위 있는 것으로 가르쳤다. 루터는 프레드릭 공의 보호를 받으며 라틴어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했고 이 번역본을 1522년 9월 출판했다. 1525년에는 구약 번역본도 출간했다.

루터판 성서는 당시 발명된 구텐베르크 인쇄기의 도움을 받아 순식간에 무려 100쇄가 넘게 인쇄되어 독일어권에 퍼졌다. 루터판 독일어 성경은 그야말로 종교개혁의 기폭제가 되었다. 사람들은 그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사제와 교회의 권위를 통해 이해했지만 이제는 직접 자기가 읽고 깨닫게 되었다. 가르쳐지던 복음에서 직접 깨닫는 복음이 된 것이다. 개신교적 영성은 이렇듯 말씀에 대한 자각과 깨달음에서 비롯되었다.

 

16th Century Painting - Anabaptist Family by Granger

재세례파의 등장

성서가 사람들의 손에 들려 읽혀지기 시작하면서 예수의 평화사상을 되찾기 시작한 일련의 사람들이 독일어권, 예컨대 독일, 스위스, 네델란드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생겨났다. 로마제국과 손을 잡고 발전해 온 로만 카톨릭 교회, 권력을 가진 영주들과 손을 잡고 있었던 루터, 제네바 시의회의 주력 인사들의 지지와 후원을 받았던 칼빈과 달리 이들은 세속 권력의 칼과 창이 예수의 평화사상에 위배된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초기 기독교의 평화의 영성을 되찾고 칼과 창에 의한 지배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의한 통치를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런 입장은 교권에 질려있었던 사람들의 호응을 얻어 시간이 갈수록 더 큰 운동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초기 재세례파 신앙운동은 국가권력의 최종권위를 부정하였기 때문에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미움을 받았다. 참된 회개를 통해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인이 되겠다고 고백하는 성인’의 세례만이 진실한 세례라고 주장함으로써 유아세례를 강요했던 가톨릭교회의 성례를 부정하는 세력으로 각인되었다.

그리고 루터와 칼뱅의 종교개혁 세력에게는 국가권위를 부정하여 사회 질서를 파괴하고 유아세례를 부정하는 급진적 이단자로 취급받았다. 재세례파 신자들은 교회는 자발적 공동체로서 폭력에 의한 통치를 일삼는 국가와 분리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 법을 따르는 평화 공동체의 성격을 가진다고 믿었다.

특히 그리스도인은 세속 국가의 요구, 즉 칼과 창으로 선을 지키고 악에게 저항하는 것은 ‘검 사용의 제지’, 그리고 ’악에게 저항하지 말라‘는 예수의 권고를 어기는 것이라 여겼다. 또한 세속 법정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나 공직을 맡는 것도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부했다(참조: 쉴라이타임 신앙 고백). 참 신자는 이 세상의 신민이 아니라 하늘의 시민으로서 자기 정체성을 지켜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 때부터 재세례파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평화를 구현하는 삶과는 상관이 없는 국가의 요구, 즉 ’정당한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 결과 집총 거부와 병역복무 거부로 인하여 끊임없이 미움과 박해를 받았다.

이처럼 평화주의적 초대교회 영성 회복운동과 맥을 같이 하는 재세례파 운동은 토마스 뮨쳐나 멜히어 호프만, 그리고 얀 마티스 등을 포함해 급진적인 사회 변혁 운동을 일으켰던 급진적 재세례파로 나뉠 수도 있다.

급진적 재세례파 운동은 1520년대 독일을 휩쓸었던 농민전쟁에 재세례파 지도자들이 참여하면서 형성되었다. 묵시적인 핍박 속에서 종말론적 환상을 가진 이들은 다가오는 하느님 나라(새 예루살렘 건설)의 선취를 위하여 하느님 나라를 향한 길을 막고 있는 세력을 하나님의 적으로 규정하고 이를 십자군적으로 제거하려는 사회사상에 의해 충동을 받았다.

이 급진적 운동은 1525년경부터 시작된 재세례파에 대한 박해에서 기인했다고 보여진다. 영주의 기득권을 옹호해주던 기존의 가톨릭교회, 그리고 그 기득권을 그대로 승인해주던 루터파에 대하여 농민들이 크게 실망하여 큰 불만을 가지게 되었고, 이런 모진 억압을 거슬러 토마스 뮨쳐를 중심으로 저항과 반란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 결과 무수한 사람들이 잡혀 죽었다.

신성로마제국의 찰스 5세는 번성하는 재세례파를 제지해야 할 필요를 느꼈고, 그 시범 케이스로 분명한 원칙을 보이기 위해 제국 안에서 재세례파들을 엄격하게 다스리고 처형하라는 칙령을 내렸다. 당시 네덜란드에서만 재세례파 주창자들 약 5만명 정도가 처형되었으니(다른 기록에는 약 1만 3000명) 그야말로 피비린내 나는 세상이었다.

이런 박해를 피해 재세례파 설교자들은 독일로 찾아 들었다. 비교적 치안상태가 느슨하고, 루터파와 가톨릭 어느 세력도 권력을 장악하지 못했던 뮨스터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당시 이들의 활동은 무엇인가 변화를 기다리던 이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어 거의 도시를 장악할 지경이 되었다.

점점 재세례파 세력이 강해지자 당시 뮨스터 주교 Franz von Waldeck (이 자는 주교직을 4만 굴드를 주고 샀던 인물)는 바로 얼마 전 종교의 자유를 관용하겠다는 자신의 약속을 어기고 뮨스터에서 재세례파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1534년 2월 자기 병력으로 재세례파 지도자들을 급습하여 잡아들였다. 처음에는 그의 시도가 성공한 듯 했으나 다수의 재세례파 지지자들이 몰려들어 오히려 주교가 잡아들였던 재세례파 지도자를 석방하고 주교의 세력은 성에서 축출되었다. 그 때부터 뮨스터에서는 일종의 원시적인 천년왕국적인 공동생활을 실시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천년왕국 운동은 역사 감각을 상실한 리더들의 오판과 강력한 제국 군대의 지원을 받은 가톨릭교회 군대의 아사 작전에 의해 고립되었다. 이들이 버틴 기간은 약 16개월이었다. 강력한 군대에 포위된 뮨스터에서 당시 지도자였던 얀 폰 라이덴(Jan van Leiden)은 전세가 기운 것을 인정하고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떠날 사람은 성을 떠나도록 허락했다. 어쩌면 이들이 최초의 군복부 거부자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침내 수백 명이 성을 떠났다.

한 편 주교 진영에는 재세례파들이 곧 성을 불태울 것이라는 루머가 돌았다. 주교는 성이 불타면 아무런 이득이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최후통첩을 보냈다. 그것이 1535년 6월 25일이다. 이런 형편에 내부의 배반자가 성문을 열어주는 바람에 그만 대패할 수밖에 없었다. 투항했던 200여명의 재세례파들은 몰살을 당했다. 리더였던 얀 폰 라이덴은 체포되었다. 그는 형틀에 갇힌 채 제국의 도시 장터마다 일반의 조롱과 모욕을 받도록 전시되다가 1536년 1월 22일 마침내 처형되었다. 

 

재세례파 운동의 무저항 비폭력주의

이 비극적인 사건 이후 네델란드 출신 전직 가톨릭 사제였던 메노 사이몬(Meno Simon)이 흩어진 재세례파를 모아들여 평화주의적인 원칙을 다시 천명하고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그는 예수의 가르침 속에서 특히 평화주의 제자직을 강조하고, 비폭력 무저항 평화를 공동체 삶의 근간으로 삼았다. 하지만 뮨스터 사건의 여파는 두 가지 상반되는 충동을 불러왔다.

하나는 뮨스터 사건으로 인하여 제세례파의 평화주의적 진정성이 많은 측면에서 희석되고 종교적 열광주의자, 혹은 칼빈이 규정한 신적 질서의 파괴자로 각인된 것이다. 다른 측면에서 본다면 재세례파 교도들은 성급하게 역사의 성취를 내다보는 종말론적 승리주의를 추구했던 오류를 수정하기 위하여 역사 속에서 양의 전쟁, 즉 고난의 신학을 일상화하기에 이르렀다.

뮨스터 사건(1534-35)이 종료된 1935년 이후 이들을 향한 핍박은 유럽 전역에서 더욱 보편화 되었다. 재세례파 신앙인들은 가톨릭교회, 루터파 교회, 칼빈 파, 츠빙글리 파 그리고 당시의 국가 권력에게 모진 박해를 받았다. 자칭 정통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자부심을 가진 기존 세력에 의해 무수한 이들이 잡혀 죽었다. 화형을 당하고, 수장형을 당하고, 달구어진 무쇠 솥에 산 채로 타 죽기도 했다.

이들이 죽어야 했던 이유는 이단적이며 사회의 질서를 파괴한다는 표면적 이유가 있었지만 신학적으로 본다면 진정한 회개 없는 성례전의 허구를 따르지 않았다는 것이었고, 무저항 비폭력의 삶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라는 성서적 신앙을 타협 없이 실천했기 때문이다.

이 시대 개신교 운동 역시 교황 세력에게 끊임없이 진압의 대상이 되었지만,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Augsburg)에서 황제가 주선해서 개신교 세력과 가톨릭 세력 간에 대 타협안인 ‘아우크스부르크 종교협약’(Peace of Augsburg)이 발표되었다. 이 협약의 핵심은 “제후의 영지 내에서는 제후의 종교를 따른다”(cuius regio,eius religio)는 원칙을 피차 인정하자는 것이다. 그 결과 루터나 칼빈파 모두 관용의 대상으로 인정을 받았지만 군주 세력에 복속되기를 원치 않았던 재세례파들은 관용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들은 평화를 실천하고 언행일치를 신실하게 지키기 위해 박해가 없고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땅을 찾아 나갔다. 박해를 피해 정든 고향 땅과 집을 떠났고, 새로 정착하여 일구었던 농장과 공장도 버리고 러시아로, 캐나다로, 미국으로, 아프리카로, 남미로, 멕시코로 자유를 누리며 예수의 제자답게 살 땅을 찾아 떠났다.

간혹 이들을 받아주던 땅은 정치적 변화 속에서 핍박의 땅으로 변하곤 했다. 러시아 혁명기에 러시아로 이주했던 이들의 아들들은 처참히 죽임을 당했고 딸들과 아내들은 유린당했다. 악의 현실은 종교의 옷을 입고, 국가권력을 앞세운 애국주의로, 그리고 이념의 옷을 입고 이들의 삶을 근본적으로 훼손했다.

모든 보복의 수단을 거부하라

초대교회 비폭력 평화주의 전통은 이렇듯 재세례파 교도들에 의하여 종교개혁 시대에 다시 점화되었다. 콘라드 그레벨(Conrad Grebel, c. 1498-1526)은 마틴 루터와 토마스 뮨쳐 사이에서 폭력에 반대하는 그의 입장을 명료하게 밝혔다. 1524년 9월 5일 츄리히에서 뮨쳐에게 보낸 편지에서 “복음과 복음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뮨쳐 그대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칼에 의해서라든지 또는 그들의 자위적 행위에 의해서 보호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무저항 비폭력 원칙을 다음과 같이 덧붙여 설명했다.

“참된 기독교 신앙인은 이리떼 속에 있는 양과 같고, 도살될 양과 다름이 없다. ...... 그들은 세상의 칼을 쓰지 않으며 또한 전쟁에 나가지 않는다. 우리가 옛 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면 누군가를 죽이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이미 전적으로 사라진 것이다.”

그 해 1524년 9월 5일에 뮨쳐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 스스로의 주장이나 누군가의 생각을 빌려 오거나 이미 있었던 것을 폐하려 하는 등 사람의 주장에 따라 행동하거나 가르치거나 혹은 세우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로지 그리스도의 법을 포함하여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과 예식만 가르치십시오.”라고 권면했다. 그것은 그레벨에게 있어서 진정한 회개를 동반한 성인 세례와 비폭력 평화주의적인 양들의 전쟁이었다.

1527년 스위스 슐라이타임 고백(The Schleitheim Confession)에서 재세례파 지도자들은 자신들과 다른 개신교 분파들과의 차별성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네 가지 원칙을 밝혔다. 그것은 성인 세례, 그리고 비폭력적인 공동체를 지켜나가기 위한 성서적 원칙에 따른 비폭력적 징계 원칙(ban), 세상의 악으로부터의 분리, 그리고 그리스도를 회상하는 성찬 공동체다. 이 네 가지를 중심하여 그들이 확신하는바 비폭력적 실천(the practice of non-violence) 지평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가야할 좁은 길이라 명시한 것이다.

이런 원칙에 후터(Jakob Hutter, c. 1500-1536)도 동참했는데 당시 모라비아 지역 군주(The Lord Marshal, Johann Kuna)는 자기 영토에서 재세례파들을 추방했다. 이에 대하여 후터는 서신을 보내 한 편으로는 비폭력 평화주의를 주장하면서도 그들을 박해하는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심판과 저주를 알리며 경고하는 편지를 보냈다. 결국 이 때문에 후터는 화형을 당했다.

리데만(Peter Riedemann)역시 초기 후터리안 중 한사람으로 모든 보복의 수단을 거부하는 입장 즉, 폭력적 전쟁에 반대하는 재세례파의 입장을 명료하게 밝혔다. 따라서 현생을 목적으로 삼고 사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주재자이신 하느님의 주권이 모든 선과 악을 심판할, 현생을 초월하는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것이라는 희망과 믿음으로 모든 불이익을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거짓이 없는, 비폭력적 평화를 지키며 살려는 그들의 역사는 참으로 고단했다. 이들은 근 20세기에 이르기까지 자신들이 살아오던 삶의 터전을 버리고 평화주의적 신앙을 지키며 살 수 있는 땅을 찾아 다녔다. 이들은 땅의 평화로 만족하지 않고 예수가 준 하늘의 평화를 지키며 철저하게 비폭력 평화주의 신앙 공동체를 지켜 나갔다. 이들이 더 이상 방황하지 않아도 될 시점은 2차 대전 직후에나 찾아 왔다. 종교적 견해가 다른 이를 죽이는 행위의 야만성, 그리고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을 거치며 국가주의의 포악성을 세상이 비판하기 시작한 시점이다.

국가권력의 권위보다 신앙 양심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것이 범죄가 아니라 인간의 권리라는 인식이 확산하면서 이들은 비로소 사회적, 그리고 종교적 증오에서 놓여날 수 있었다. 국가의 권위와 질서에 순복하는 삶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평화적 가르침에 먼저 순복하는 신앙의 가시밭길은 2차 대전 후 유엔이 주도해 온 보편적 인권사상 운동의 여파로 멈추었다. 유엔이 인간의 ‘사상과 양심과 종교의 자유’(인권선언문 18항)를 옹호하기 시작하면서 그 가시덤불이 서서히 걷혀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양심적 병역 복무 반대에 관한 유엔의 문서는 2004년 4월에서야 나왔다.

박충구 교수
감신대 기독교윤리학과
저서로 <종교의 두 얼굴-평화와 폭력>, <예수의 윤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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