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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영성가난한 예수님처럼, 우리도 가난해야 할 것인가-2
  • 알로이시오 피어리스 신부
  • 승인 2018.09.26 1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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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발적 가난으로 강요된 가난을 퇴치한다

자발적 가난은 해방을 향한 씨앗이나 강요된 가난은 죄가 가져오는 열매이다. 하느님 나라는 이 자발적 가난과 강요된 가난의 제거를 전 우주적으로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복음서에서 하느님을 찾는 한 부자는 가진 재물을 포기해야 한다는 요구를 받는다. 그래서 가난한 이들이 그의 포기로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하라는 것이다(마르 10,21). 이처럼 자발적 가난은 강요된 가난이 없는 정의로운 사회건설에 빼놓을 수 없는 선결조건이다. 예수님이 가르쳤던 하느님 나라이다.

사실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의 오심을 준비하면서 사람들에게 갖고 있는 옷과 음식을 가지지 못한 이들과 나누도록 초대하였다(루카 3,11). 라자로가 죽을 때까지 굶주렸던 것은 부자의 낭비 때문이 아니었는가? 상 위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 남는 것조차 나누기를 거절했던 부자 때문이 아닌가(루카 16,19-31)? 형제나 자매에게 강제로 부과된 가난은 악이며, 예수님은 부자들에게 그 악을 제거하는 짐을 주었다. 다시 말하면 부자는 가난한 이들이 이 세상에 없도록 가난해지라는 초대를 받은 것이다.

부는 축적될 때 악이 된다. 먹을 것도 역시 이웃이 굶주리고 있는 데 소수만 먹고 있다면(1고린 11,21-27), 주님의 몸을 해치는 죄악이다. 그러나 밥이 나누어질 때 우리는 주님의 몸을 먹고 그분이 된다.

부도 궁핍한 사람이 없도록(사도 4,34-35) 필요에 따라 분배된다면 더 이상 우상일 수 없다. 그것은 거룩한 성사가 된다. 예로니모, 암브로시오, 어거스틴 등 그리스도교의 초대 교부들의 가르침은 이러한 관점을 강력하게 보여준다 어떤 이들이 가난하다면, 다른 이들이 더 많이 가졌고 조상으로부터 그냥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여분의 재산은 가난한 이들과 나눌 때까지 훔친 재물로 남아있다. 그렇다면 “가난으로 고칠 수 있다”는 의견은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가난을 경제적 관점에서 이렇게 정의한다. 가난이란 “여분이 아니라 필요한 것만 가진 상태”를 말하며 이러한 가난만이 현대세계의 불공평함을 소멸시킬 수 있고, 가난한 나라끼리 이러한 관점에서 서로 연대를 조성해야 한다고 호소한다.
 

사진출처=www.pinterest.co.kr

자발적 가난의 영성과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영성을 통합하다

가난의 주제는 그리스도교적 영성과 직결된다. 왜냐하면 외아들 예수를 통하여 가난하게 태어나기로 선택한 하느님은(필립 2,6-8)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선택하여 가난한 이가 된 사람들(마태 19,21)과 예수님의 대리인 자격으로 강요된 가난을 살아가는 이들(마태 25,31-46)을 통합하여 그분의 새로운 백성을 만드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자면, 자발적으로 가난해진다는 것은 가난한 예수를 따르고 또한 지금 가난한 이들 속에 계시는 그리스도에게 봉사하는 것이며, 이 두 가지 동기에 의하지 않고서는 진정으로 그리스도교적 영성이라 할 수 없다.

특권 받은 소수가 포기하는 소유물을 가지지 못한 다수에게 돌리지 않는다면, 그들의 포기는 예수님 안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할 수 없다. 이것이 수세기동안 성인들의 강인한 노력에 의해 지켜온 전통적인 그리스도교의 영성, 즉 복음적 청빈에 관한 해석이다.

과거 은수자들의 전통은 가난한 이들에게로 돌리지 않는 재물의 포기를 결코 옹호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수도원에 입회하는 이들이 그들의 소유물을 공동체에 기부하는 위험한 관례가 생겼다. 이것은 가난한 이들에게 가야 하는 혜택을 가로챈 것뿐만 아니라 공동체가 자체의 안전에만 급급하게 되는 현상을 유발시켰다.

또 가난한 생활양식을 유지하기 위해 시작되었던 노동도 얼마 안가 잉여물의 축적을 가져왔다. 그래서 성 바실리오는 작은 공동체가 스스로 필요한 양식을 해결토록 하였으며, 하느님께 바쳐진 이들이 가진 것은 모두 하느님의 것이므로 반드시 가난한 이들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사도행전 4장 32-37절에 나오는 것처럼,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아무도 자기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함으로써” 하느님 나라의 표지를 드러내었다. 이 초대교회의 공동생활이 그렇다고 개인의 소유는 금지하면서 또한 공동체 밖의 가난한 이들의 권리도 존중하지 못하는 결과를 빚고 있는 재물의 공동체적 소유를 합리화 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에게는 물질적, 정신적 가난을 요구하면서 공동체가 재물을 소유하는 것은, 가난한 이들 속의 그리스도는 알아보지 못하면서 가난한 예수를 따르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시도이다. 앗씨시의 프란치스코는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까지도 가난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전통적인 교회수도공동체와 성인들의 영성은 한 마디로 자발적 가난 안에서 강요된 가난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알고 예수를 따르는 것이라고 하겠다.

 

사진출처=www.pinterest.co.kr

강요된 가난에 대한 조직적, 분석적 분별이 필요하다

오늘날 가난한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이론과 실천을 끊임없이 되풀이하고 있는 역동적인 작은 공동체들이 성장하고 있다. 이 작은 공동체들은 과거 교회의 전통적 수도공동체와 다른 점이 있다. 그들은 개인차원에서 상징적 의미로 실천하고 있는 자발적 가난을 국제차원의 정의 문제에까지 그 의미를 확대, 연장시킨다. 그들은 현대의 우상이 무절제한 개인적 욕망 이상의 것이므로, 포괄적인 분별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오늘날의 이 거대한 가난이 제도화, 조직화된 욕망의 결과라고 생각한다.

가난한 이들의 고통이 자발적 가난의 기도 속에서 들리기는 하지만 “강요된 가난의 원인과 그 가난을 발생시키는 다양한 제조직에 관한 명찰하고도 과학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강요된 가난은 “불의와 억압의 사회구조, 정권의 부패와 부조리한 국제 경제질서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기성찰만으로도 오늘날 우상의 작태를 분별하기 어렵다. 사회분석이 필요하다. 이 사회분석의 부재 때문에 역사상 위대한 종교 지도자들이 개인의 차원에서 자발적 가난을 실천했다 하더라도 부조리한 사회현실에 대하여는 거의 무지하였고 따라서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고 하지도 않았다. 자발적 가난이든, 강요된 가난이든 가난에 대한 사회조직적 인식이 인류의 종교전통 속에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렇다고 교회가 자발적 개인차원의 영성과 강요된 가난속의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영성을 통합하기위하여 아무 노력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바오로 6세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복음적 청빈이란 가난한 이들에 대한 결단과 연대감의 실천을 통하여 사회정의를 실현함으로써 인류의 양심을 일깨우는 것, 또한 가진 이들이 가난한 이들의 요구에 책임 있게 응답하도록 하는 것을 의무로 삼는다.”

하느님을 찾는 것이 영성이라면, 자발적 가난과 강요된 가난 속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 이 두 가지는 반드시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하느님과 우상의 대립이 이 세상의 재물 축적으로 인하여 생겨난 가난한 사람들을 편애하는 하느님과 가난한 이들 사이의 결코 취소할 수 없는 계약에 근거한다면, 그분 자신의 계약에 위배되는 중립적인 하느님은 존재할 수가 없다. 오히려 가난한 이들의 투쟁을 그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는 하느님은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교만한 이들, 권력자들, 부자들에 대항하여 노력한다(루카 1,51-53). 따라서 우리의 자발적 가난이 강요된 가난속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하느님의 관심을 우리들 자신의 사명으로 이끄는 만큼, 우리는 하느님과 하나가 된다.

 

사진출처=www.pinterest.co.kr

자발적 가난, 강요된 가난속의 가난한 이들에 대한 끊임없는 자성

그러므로 예수님이 받았던 유혹을 우리의 길잡이로 삼자. 가난한 이들을 이용하는 과시적인 메시아 환상에서 벗어나 우리의 마음을 깨끗이 하자. 가난한 이들은 그들 해방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동정과 사랑, 전략의 대상물이 되어서는 안된다. 여기에서 심리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의 종합적인 분별이 불가피하게 요구된다.

구조에 대한 사회분석을 통하여 우리는 우리자신의 사회참여의 성실성을 심각하게 자성해야 하겠다. 가난한 이들을 내 개인적인 만족과 완성에 이용하고 있지 않은지 가난한 이들 편에 섬으로써 하느님과 하나 되려는 모든 이는 영웅이 되려는 마음을 포기해야 한다. 예수님의 길은 십자가에서 처형되는 도둑의 운명이었다. 예수님은 승리에 앞서 십자가라는 깃발을 들었다.

제자는 스승보다 나을 수 없다. 스승이 불의의 희생자요 심판자라면(마태 25,31-46), 제자도 먼저 현재의 불의한 체제 아래 희생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불의를 고발할 권리가 없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하는 삶은 자발적인 가난을 살아가고 그래서 가난해진 사람들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출처] <누구와 어떻게 함께 할 것인가?>, 참사람되어, 2010년 2월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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