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월항쟁과 천주교] 호헌철폐 독재타도, 명동성당 농성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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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항쟁과 천주교] 호헌철폐 독재타도, 명동성당 농성투쟁
  • 이명준
  • 승인 2018.04.18 13:19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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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 농성은 6·10대회의 강경 진압에서 발생한 우발적인, 전혀 계획에 없던 사건이었다. 6월 10일 오후, 시내 곳곳에서 전경에게 쫓기던 학생 시민들이 명동성당으로 들어갔다. 주로 을지로 방면에 있던 시위대들이 중심이었다. 이미 민주화의 성지로 자리를 잡아가던 명동성당은 자연스레 도피처가 되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명동성당과 그 주변은 밀려들어간 시위대를 비롯하여 마침 명동성당에서 농성 중이던 상계동 주민들, 미사 드리러 온 신자들, 주변 사무실과 상가에서 일하던 시민들, 이들을 저지하는 경찰 병력 등으로 온통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것이 6월항쟁을 장기간으로 이끌게 한 명동성당 농성의 시작이었다.

명동성당 안팎이 온통 사람들로 넘실대자, 김병도 명동성당 주임신부는 시위대의 성당 진입을 두고 대처 방안에 대해 국본과 긴밀한 대화채널을 유지하는 방안을 양권식 보좌신부와 상의하였다. 이와 동시에 서울교구 정의구현사제단과 명청도 실무자들을 긴급 소집하여 앞으로 사태 추이에 대해 논의를 시작했다.

한편, 시위대는 계속 불어나면서 이날 밤을 지나 새벽까지 봉쇄하는 경찰과 대치하며 화염병 투척과 함께 투석전을 계속했다. 농성투쟁의 전개 과정을 일자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6월 11일

날이 밝아오자 새벽에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경찰의 명동성당 봉쇄 작전과 새벽 공방으로 다음날까지 잔류한 농성시위대의 수는 총 300여 명 정도였다. 오전 10시경, 시위대는 레이건과 전두환, 노태우 3개의 허수아비를 중앙극장 쪽과 로얄호텔 쪽의 바리케이드 앞에 각각 내놓고 화형식을 했다. 이에 자극을 받은 경찰이 오전 11시경 성당 입구 앞 도로 양쪽으로 50여 미터까지 진출해 설치해 놨던 바리케이드를 무너뜨리고 성당 안까지 최루탄을 난사하며 들어가자, 시위대는 순식간에 성당 안까지 밀려들어가게 되었다.

경찰은 시위대가 해산할 의사가 없는 것으로 판단하고, 화형식을 빌미로 농성시위대들을 전원 연행한다는 방침을 통고한 뒤, 성당 안으로의 진입을 시도했다. 상황이 이렇게 급반전되자, 시위대는 즉각 화염병 50여 개를 투척하고, 성당 마당의 돌 타일을 뜯어내 던지며 완강히 저항했다. 또한 경찰은 시위대 연행을 위해 최루탄을 무차별 난사함으로써 성당은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이러한 사태에 명동성당 김병도 주임신부는 마이크를 들고 격한 어조로 엄숙한 성전에 들어와 최루탄을 난사하는 경찰에게 강력히 항의하고, “교회는 성당 안에 들어와 있는 시위 학생들을 지키겠다”라고 선언했다. 김병도 주임신부의 강력한 항의에 놀란 경찰은 성당 입구 밖으로 일시 철수했다.

한편, 함세웅 신부와 이명준, 기춘 등은 성당 내에서 화염병을 던지는 시위대에게 화염병을 모두 없애기를 당부했다. “교회로 절대 경찰은 들어올 수 없다. 국민을 상대로 선전전을 해야지, 화염병을 던지면 안 된다”고 호소했다. 시민들이 참여하고 싶어도 화염병과 돌을 던지는 폭력을 사용하면 발길을 돌리고 등을 돌릴 것이라는 취지였다.

이 와중에 서울 시내 서울대, 경희대, 외국어대, 서울시립대 등 7개 대학에서 명동성당 농성 학우 구출투쟁 출정식을 마치고 시내로 진출했다는 소식이 전달되면서, 시위대의 사기는 다시 끓어올랐다. 오후 5시경부터는 남대문 시장 일대에서 1,000여 명의 학생들이 명동성당 농성투쟁을 지지하는 시위를 전개했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자 김병도 주임신부는 당시 정릉에 있는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수녀원에 있던 김수환 추기경에게 수도권 사제단 회의 소집에 대한 재가를 얻어, 당시 직선제 개헌을 위해 단식투쟁에 돌입한 50여 명의 수도권 사제들을 오후 명동성당 지하 회의실로 소집했다. 이날 회의에서 사제들은 농성투쟁 방식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점과 최루탄의 교회 내 무차별 투척에 대한 강력한 항의를 다시금 제기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성당 구내에 최루탄을 쏜 것에 대한 항의의 표시로 이 날부터 사제들이 철야농성을 하기로 결정하고, 시위대들의 안전 귀가를 위해 이 사태가 끝날 때까지 날마다 미사를 드리기로 했다. 그리고 사제들은 미사가 끝난 뒤부터 밤 12시까지 교대로 성당에 남아 시위대와 함께 하였다.

명동성당 시위대의 장기농성 가능성이 현실화되자, 명청은 철야 농성이 가능한 회원들과 퇴근 후 참여 가능한 회원들을 3교대로 분류하여, 일부는 명동성당 상황실과 명청 사무실, 성당 주요 시설 관련 지역, 농성장 등에 배치하고, 일부는 농성시위대의 임시집행부의 배치계획에 따라 경계조, 순찰조, 의료반 등에 투입하였다.

또한 명청 지도부는 명동성당 및 주교관과, 국본과 농성시위대와의 연계를 기춘(명청 회장 및 천사협 사무국장)에게, 명동성당 상황실을 박준영(명청 교육위원장)에게, 외부의 연대조직인 Pax(가톨릭대학생연합회)와 지구별 청년회들과 연계하는 부분을 김태승(명청 홍보위원장)에게, 내부 회원들의 역할 배치 및 지휘를 나도은(명청 문화위원회위원장)에게 맡겨, 내부와 외부의 관계 조율 및 전체 운동과 농성 현장과의 긴밀한 협력 지원체계를 구축하였다.

사제단의 집행위원들은 사제관 1층에서 오후 미사 시간을 통해 명동성당에 들어 온 천주교 측(이명준), 국본 측(성유보, 이해찬, 김부겸, 이명식) 대표와 함께 농성시위대 임시집행부와 합동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들은 명동성당에서의 농성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전 국민의 투쟁이기 때문에 교회는 이 투쟁을 지지, 보호하고 농성시위대들은 교회와 시민들의 상호 이해를 바탕으로 한 비폭력 평화투쟁으로 지속성을 보장해야 한다는 것에 합의했다.

자정을 넘어선 새벽 4시, 밤이 깊어가면서 시위대와 경찰 모두 잠시간의 휴전을 가졌고, 이렇게 조성된 소강상태로 인한 느슨한 대치가 이어지자, 잠시 숨을 돌린 시위대는 귀가해야 할 사람들을 명청과 성당 관계자의 도움을 받아 비공식 퇴로로 내보내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이 날의 철야농성이 며칠씩이나 지속되리라고 짐작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모두 다음날이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상황이 이렇게 반전되자 주변의 공중전화 박스에는 집으로 전화하기 위한 사람들로 장사진을 이뤘다.

 

6월 12일

12일 새벽 4시, 전날 저녁 천주교계, 농성시위대 임시집행부, 재야 대표들의 합동회의를 통해 결의된 내용을 사제단에 전달하기 위해 명동성당 김병도 주임신부가 서울대교구 사무처장의 직권으로 서울교구 사제단회의를 비상소집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달려온 40명의 서울교구청 소속 신부들이 밤새 이에 대한 대책회의를 열었다. 그 결과 사제단은 ‘7인 대책위’를 구성(위원장 오태순 신부)하여 “위험을 피해 온 사람을 쫒아낼 수 없다. 그리고 도덕성과 정통성을 잃은 현 정권에 대한 농성 학생들의 민주화투쟁은 정당하며, 이에 적극 지지, 동참할 것이다. 또한 사제의 양심으로 이들을 끝까지 보호할 것이다” 등 4개 항을 결의하였다.

12일 점심시간 때 계성여고 학생들이 점심 도시락을 걷어 눈물겨운 사연을 담아 고사리 같은 손으로 철창 너머의 그들에게 전했다. 오후 2시경엔 장상수녀회 소속 200여 명의 수녀들이, 오후 3시경엔 사제단 소속 100여 명의 신부들이 성당 안으로 들어갔다.

오후 5시경, 조종석 서울시경국장과 이상연 안기부 차장이 김병도 신부를 만나러 찾아왔으나, 성당 입구에서 이상연 차장만 들여보냈다. 이 차장은 대화 창구를 다른 신부로 해줄 것을 요구했으나, 김수환 추기경은 이 차장의 강력한 거부에도 함세웅 신부를 내세웠다. 이후 성당 앞 로얄호텔에서 함세웅 신부와 정권 측의 면담이 진행되었다.

여기서 경찰 측은 학생들을 대학별로 분류하여 신부가 인솔하여 학교로 보내고, 구속 여부는 추후 경찰에 맡길 것을 요구했다. 이에 천주교회는 공권력의 위험에 처하여 교회로 들어온 학생들을 보호하는 것은 교회의 사목적 책무라며, 학생들의 안전 귀가와 귀가 후 불구속 처리를 요구했다. 서로의 입장이 팽팽하여 결론이 나질 않았다. 그러나 경찰은 돌아가면서 “상부와 협의하겠다”며 계속 대화의 의지를 보였다.

오후 8시, 전국사제단 주최로 명동성당에서 신부, 수녀 300여 명, 학생, 시민, 빈민 등 1,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나라를 위한 특별 미사’가 개최되었다. 이날 미사 후 명동성당 측에서는 시위대의 농성과 관계없이 매일 정기미사를 강행할 것을 발표하였고, 농성 사제단은 특별미사를 봉헌한 후 “6월 10일부터 명동성당에서 계속하고 있는 학생들의 농성시위가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한 행동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들의 뜻과 행동을 적극 지지한다. 사제의 양심으로 이들을 끝까지 보호할 것이다”라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또한 미사가 끝난 뒤 성당 입구에서 기도회를 하면서, 권력 승계에 따른 군부의 장기집권 거부, 민주주의 실현에 적극 참여, 민주주의를 염원하는 학생들의 마음에 뜻을 함께 할 것, 성당에 들어온 학생들의 안전 귀가를 끝까지 지원할 것 등 4개 항의 결의문을 채택했다.

 

6월 13일(토)

기존 농성 참가자와 신규 참가자를 구별하고, 프락치 예방을 위해 기존 농성 참가자들 전원에게 머리띠를 만들어 나누어 주고 상시 착용토록 하였다. 이후 농성장의 분위기를 해치는 행위(소변 행위, 절도 행위 등)를 하는 이들과 과격 시위를 의도적으로 선동하는 프락치(시위대 정보 파악, 갖가지 유언비어 유포, 농성자 사이에 불신 조장, 과격 시위 유도자)들을 선별하는 작업을 수시로 실시하였다.

오후 2시경, 김수환 추기경이 서울교구 소속 사제단 임시총회를 소집하여 250여 명의 소속 사제 중 12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가톨릭회관 7층 강당에서 명동성당 농성시위대 문제에 대해 논의하였다. 이 회의에서 사제단은 농성시위대들의 안전 귀가를 보장하고, 사후 연행 및 구속처벌을 하지 말 것을 경찰 측에 요구하기로 했다. 그리고 만약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고, 경찰이 농성시위대를 강제 무력 진압을 시도할 경우 다른 사제단도 농성에 동참할 것을 결의하였다.

6월 14일(일)

농성시위대 지도부는 정부 당국이 제시한 최종안에 대한 입장 정리를 위해 지도부 회의를 오후 6시경에 긴급 소집한 뒤, 4시간여의 장시간 격론 끝에 농성해산 결정을 내렸으나, 공식 발표를 자제한 채 최종 결론은 같은 날 밤 농성시위대 전원을 소집한 후, 전체 토론 결과에 따르기로 잠정 결정을 내린 상태였다. 사실 농성시위대 지도부는 해산 후 안전 귀가, 농성시위대 전원 불구속, 구속자 전원 석방 요구가 수용될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 아래 천주교 측에게 세 가지 요구를 농성 해제 조건으로 제시하고, 협상이 결렬되거나 지연될 경우 농성을 계속 이어가려고 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정부당국에서 이 요구를 전격 수용하는 바람에, 농성시위대가 선택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다가왔다.

6월 15일(월)

농성시위대 20여 명이 농성장 바닥에서 쓴 “호헌철폐 독재타도” 혈서와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문화관을 나섰다. 사제단은 농성시위대들이 탄 차에 사제들을 1명씩 배치, 동승시켜 농성 시위대들이 각 학교에 도착한 뒤 안전하게 귀가하는 것을 확인한 뒤에 돌아오도록 지시했다. 농성시위대의 무사 귀환을 확인한 후 농성지도부 12명도 단식 농성을 해제하였다. 명청은 농성시위대가 성당을 떠난 뒤, 다시 긴급 총회를 열어 6일간 명동 농성투쟁을 평가하고 청소를 하며 특별미사를 준비했다.

오후 8시, 전국사제단은 ‘나라의 민주화를 위한 특별미사’를 개최했다. 이 미사는 김수환 추기경의 집전으로 사제 400여 명이 참석하여 2시간가량 진행되었는데, 성당 안에만 3,000여 명이 있었고, 성당 밖에는 신자, 학생, 시민 등 1만 8,000여 명이 명동거리까지 가득 메웠다.

[출처] <6월항쟁과 국본>, 민주운동기념사업회, 2017 

이명준
천주교 인천교구 홍보과장 근무 중 민청련 부의장 역임. 민통련 청년위원장,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간사 역임. 1987년 6월항쟁 당시 4인 실무기획팀으로 민주헌법쟁위국민운동분부 결성에 참여. 평민당 기획조정실장, 비서실 차장 역임. 정계은퇴 후 (주)아이마스 회장 역임. 현재 환경재단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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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 2022-08-30 14:55:13
안녕하세요 ! 사진을 사용하고 싶은데 출처를 남기고 사진을 사용해도 괜찮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