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오] 그리스도의 얼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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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오] 그리스도의 얼굴
  • 한상봉
  • 승인 2018.03.12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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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한 인간과 연민의 하느님, 조르주 루오 -4

“미술은 내게 삶을 잊게 하는 수단이며, 한밤의 절규이고, 숨죽인 흐느낌이며, 억눌린 미소다. 나는 황량한 벌판에서 고통당하는 자들의 말 없는 친구다. 인류는 자신의 부도덕과 정결을 담장 뒤에 감춘다. 나는 문둥병에 걸린 그 담장에 달라붙는 비참한 담쟁이덩굴이다. 그리스도인인 나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를 믿는다.”(루오)

루오, 종교화가로 나서다

루오가 동료화가의 동생인 마르트 르 시다네르(Marthe Le Sidaner)와 결혼한 것은 1908년이었다. 루오는 1910년 드루에 갤러리에서 첫 개인전을 열고, 1911년 교외로 이사해 자신의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계속 드렸다. 이때부터 루오의 그림은 어두운 색조에서 벗어나 색채가 풍부한 유화물감을 사용하는 경우가 늘었다.

1913년부터는 다시 종교적인 테마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그중 하나가 <교외의 그리스도>이다. 황량한 거리를 배경으로 두 아이가 그리스도가 함께 서성거리고 있다. 이 적막하고 쓸쓸한 풍경에서 그리스도는 격정적인 역사의 한 순간이 아니라 길 잃은 아이들과 더불어 있다. 세례를 받거나 기적을 행하거나 설교를 하거나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장엄한 성경의 한 장면이 아니다. 아마 루오만 보았음직한 풍경이다.

루오 <교외의 그리스도>

이 당시 피카소와 마티스의 그림 등을 알아보고 수집하던 화상(畵商)이며 출판업자인 볼라르(Amboise Vollard)가 루오의 재능을 알아보았다. 그는 1913년 아틀리에 있는 모든 작품들을 나오는 대로 전부 구입한다는 계약을 루오와 맺었다. 이제 루오는 그림 판매에 신경 쓰지 않고 창작에만 몰두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루오는 보들레르의 <악의 꽃>(Les Fleurs du ma,1927), 앙드레 쉬아레스의 신앙시집 <수난>(Passion, 1939) 등에 삽화로 넣을 판화들을 새겼다.

이때 그린 작품 중 하나가 <미제레레>였다. 58점의 작품이 들어 있는 이 책은 출판이 지연되다가 1948년에야 파리에서 열린 전시회에서 발표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나치하에 들어간 프랑스에서, 나치 정권은 루오의 작품을 모두 ‘퇴폐예술’로 규정하고 작품집 발간도 금지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루오는 “얼마나 영예로우냐?”고 한 마디 했다는데, 이 책이 전쟁으로 고통을 겪었던 프랑스 국민들에게는 위로가 되었다.

루오 <미제레레>
루오 <우리 요안나>

이와 관련해 가장 웅변적인 작품이 오를레앙의 소녀 영웅 잔 다르크를 그린 <우리 요안나>(1949)이다. 프랑스 국민들에게 독일 나치들에게 점령을 당했던 전쟁의 상처를 딛고 일어나라는 희망의 메시지였다. 그러나 이 그림에서 잔 다르크는 단지 ‘애국심’에 취한 전쟁 영웅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이 그림의 핵심은 불타고 있는 마을을 배경으로 말을 타고 있는 잔 다르크의 위를 올려다보는 시선이다. 잔 다르크에게 행동하라고 다그친 것은 애국심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구하라는 하느님이 부르심이었다.

발터 니그는 <조르주 루오>에서 잔 다르크는 “프랑스를 구해 낸 평민 출신의 어린 성녀”라면서, <우리 요안나>의 ‘우리’는 프랑스 소설가 조르주 베르나노스가 “우리 교회는 성인들의 교회”라고 한 말의 ‘우리’와 똑같은 의미라고 설명한다. 그 교회는 권력자들의 교회도 아니고, 애국심으로 포장된 국가교회도 아니다. 오히려 루오는 잔 다르크의 시선을 위로 향하게 함으로써, 당시 교회가 미화하고 신성시한 애국심에서 자신의 거룩함을 지켜내도록 하였다고 말한다. 당시 교회만큼 정치적인 집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 요안나(잔 다르크)는 법정에서 성직자들에게 이단자로 판결 받아서 처형되었다. 여기에 진리는 없다. 샤를 페기(Charles Pierre Peguy)는 <잔 다르크의 사랑의 신비>에서, 잔 다르크가 어떤 성직자의 도움을 받지 않고 내면에서 울려나오는 음성을 따라 움직였다고 말한다.

 

루오 <베로니카>
루오 <거룩한 얼굴>

 

루오 <그리스도의 얼굴>

 

루오 <십자가상의 그리스도>

베로니카와 그리스도

루오는 가장 많이 그린 그림 가운데 하나가 ‘그리스도의 얼굴’이다. <거룩한 얼굴>(La Sainte Face, 1946),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 1942) 등이다. 루오가 그린 그리스도의 표정에서는 신적인 위엄이나 권능을 찾아볼 수 없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두려움을 느끼는 모습이다. 이를 두고 조양익 선생은 “루오의 그리스도는 영광에 찬 그리스도가 아니라 가련한 광대와 농부들, 거리의 여인들, 그리고 현실에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의 아픔을 함께 나누려는 고난의 길을 걷는 그리스도의 상이었다”라고 설명한다.

루오는 그리스도뿐 아니라 그분 얼굴을 수건에 담은 베로니카에게도 주목한다. <베로니카>(Sainte Véronique, 1937~46)가 대표적인 작품이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예수가 사형선고를 받고 돌무덤에 묻힐 때까지 당했던 고통의 길을 ‘십자가의 길’(Via Dolorosa) 기도에 담아 묵상한다. 이 가운데 제 6처가 베로니카의 수건 이야기이다.

한 여인이 로마의 채찍질로 피와 땀이 흐르는 예수의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 주었다. 이는 위험을 무릅쓴 일이었다. 이 수건에 그분의 얼굴이 선명히 찍혀 나왔다고 전해진다. 사실 ‘베로니카’라는 이름은 복음서에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 신앙심 깊은 여인의 이름은 실존인물이 아니라 ‘베라 이콘(vera-icon, 참 모습)’이라는 라틴어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루오가 그린 베로니카는 얼굴이 갸름하고 눈망울이 큰 청순한 얼굴이며 색채 또한 밝은 파스텔 톤이어서 보는 이의 마음을 평온하게 만든다. <베로니카>의 모델은 루오의 딸인 이자벨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이자벨은 이 그림을 보관하고 있다가 1964년에 나라에 기증해 공유물로 만들었다.

조르주 루오는 1951년 프랑스 정부와 교황 비오 12세에게 훈장을 받았고, 1952년 7월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으며, 루오는 1958년 2월 13일 87세의 나이로 파리의 자택에서 숨을 거두었다. 프랑스는 국장을 치러 루오에게 경의를 표했다. 모렐(Morel) 아빠스는 장례식 조사에서 “루오는 우리에게 자신의 분노를 남겼다. 그럼에도 그의 작품에서는 자비가 압도하고 있다”고 했다.

루오는 생전에 자신의 작품들을 직접 골라서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하였고, 사후에는 아내인 마르트 루오(Marte Rouault)와 네 자녀가 루오 그림의 엄청난 재산권을 포기하고 아틀리에에 있던 작품은 물론 자신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작품들을 프랑스 정부에 기증하였다. 이렇게 기증된 작품 1,000여 점이 프랑스 국립 퐁피두센터에 소장되어 있다.

조르주 루오는 종교화가처럼 ‘진지한’ 신앙심 안에서 살다 죽었다. 세상의 비참한 현실에서 눈을 돌리지 않았으며, 그 소용돌이 속에서, 고통 받는 이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발견하였다. 그는 이승을 떠났지만 여전히 이 말을 되풀이하고 있다.

“예술을 칭찬하는 게 아니라면 나에 대해 말하지 말아 달라. 나를 혁명이나 반항의 횃불처럼 그렇게 중요시하지 말아 달라. 내가 한 일은 하찮으니까. 그것은 밤의 절규, 낙오자의 오열, 목멘 웃음이다. 세상에서는 날마다 나보다 가치 있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이 일 때문에 수없이 죽어가고 있다”(루오, <인간과 작품> 머리말)

[참고]
<영혼의 자유를 지킨 화가 조르주 루오 이야기>, 조양익
<조르주 루오>, 발터 니그, 분도, 2012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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