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 우리의 연인으로서의 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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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우리의 연인으로서의 예수
  •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7.09.14 0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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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새로운 창조-7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인이실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신약성서에서는 예수님을 교회의 신랑이라고 한다. 얼마나 감각 있는 표현인지! 이 말은 개인적으로나 공동체적으로나 다 사실이어야 한다. 우리는 함께 주님을 사랑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하나로 만든다. 우리는 함께 그의 신부이며 그분은 우리의 연인이시다. 그분은 우리가 동시에 그분을 사랑하고 서로를 사랑하라고 초대하신다.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은 교회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들은 떨어진 두 개의 별도의 사랑이 아니다.

그러나 교회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는 또한 예수님과 개인적인 사랑의 관계도 맺어야 한다. 독신들도, 결혼한 사람들도 모두 이것을 자주 잊을 수 있다. 우리에게는 엄청난 애정에 대한 욕구가 있어 단지 “나는 내 일을 사랑한다”거나 “나는 가족을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 그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다.

특히 독신들은 그러한 애정에 대한 필요성을 부정하고 일 속에 파묻히거나 기도하는 생활을 망각하기 쉽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는 사랑하는 연인이 필요하다. 모든 남자, 여자들은 깊게 그리고 감정적인 사랑을 할 필요가 있고 그러한 사랑을 되돌려 받을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연인이신 예수님이 없는 독신이라면 어디서 그러한 애정에 대한 욕구를 채울 것인가? 예수님과 개인적인 사랑의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면 즉 기도의 대화 중에 그러한 관계를 경험하지 않는다면 독신은 최고의 상태는 어리석고, 최악의 상태는 위험하게된다.

 

결혼한 우리들도 깊은 애정을 받고 싶은 욕구가 있는데 우리의 배우자가 그것을 항상 충족시켜 줄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결혼한 사람들도 독신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와 똑같은 사랑의 관계가 필요하다.

그러나 공동체에서 우리는 기도생활 뿐만 아니라 공동의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한다. 사랑을 주고받으려는 우리의 애정적 욕구는 주님과 맺는 개인적인 관계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갖는 개인적인 관계에서 충족된다. 각자가 기도 중에 주님과 하나 될 때, 주님 안에서 우리 형제 자매들이 하나 될 때에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의 사랑을 느끼면서 우리는 완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와 더불어 사는 사람을 통해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단순히 일대일의 관계에서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너무도 자주 젊은이들은 이 애정의 욕구에 대해 싹트는 욕구를 한사람의 애인을 만드는 것으로 충족하려고 한다. 그들은 몇 달 또는 몇 년간을 한 사람과의 관계에 매달리는데, 우리는 그들이 그 포도가지에서 굶주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가장 많이 성장 해야할 시기에, 그들의 인격은 배타적이고 시기심으로 격리된 관계 안에 갇혀 있기 때문에 전혀 성장하지 못한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많은 결혼이 파탄되는 중요한 원인이다. 너무도 많은 젊은이들이 어떻게 사랑하는지 훈련을 받지 못했다. 성 바오로가 말했듯이 그들은 교육받을 필요가 있다, “그러면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할 것입니다” (골로사이서 4,28).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사랑의 공동체 안에서 주님의 제자가 됨으로써 사랑의 훈련을 받지 못했다.

여러분은 많은 사람을 위해서 여러 번 여러분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것을 터득한 후에야 한 사람을 위해서 여러 번 여러분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는 것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아가페(agape)는 특별한 선물로 주님께로부터 온다. 그러나 내 경험으로 볼 때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통해 온다. 우리는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때 특별히 많은 아가페(agape)를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너무도 많은 “다시 태어난” 그리스도인들은 “다시 죽는” 그리스도인이 되는데 그들이 공동체 삶을 통해서 사랑하는 능력을 키우거나 개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님, 우리의 생명, 우리의 연인일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이웃을 위해서 자신의 생명을 내어놓고 주님을 믿고 같이 살면서 일하는 진짜 사람들로 구성된, 지금 바로 여기에서 경험되는 일치이다. 그것은 가톨릭 교회와 같은 좀더 큰 공동체에, 또는 성인들의 통교라고 불리는 과거와 현재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우주적 일치 속에 일원이 됨을 내포한다. 그러나 좀 더 큰 단일체는 존재하지 않는 조각들로 구성될 수 없다. 실제적인 세계적 일치는 실제적인 지역의 일치 위에 세워져야 한다.

바오로는 데살로니카의 교회, 갈라디아의 교회, 고린토의 교회와 기타 다른 지방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썼다. 거의 모든 신약성서 저자들은 그들이 복음서나 편지를 쓸 때 마음 속에 특별한 공동체를 생각하였다. 이러한 각각의 공동체들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 안에 하나가 됨으로써 보편적인, “가톨릭” 교회와 하나가 되었다. 그러나 먼저 그들은 그들 자신들의 공동체 사람들과 함께 그들이 있었던 곳에서 교회가 되어야만 하였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우리자신들의 특별한 기도 모임들, 본당들, 수도 공동체에서 먼저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야만 더 큰 ‘몸체’에 진정한 일원임을 주장할 수 있다. 우리들의 일상생활 대부분은 교종의 회칙과 사목교서에 씌여진 대로 다스려지지 않는다. 가끔 가톨릭 신자들은 그들이 어떤 문제를 놓고 교종이나 주교의 의견에 따라 살면 자기들이 정말로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대부분은 지역적인 수준, 개인적 관계라는 엄연한 현실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가 주님의 몸이라고 내세우려면 바로 그곳에서 주님을 만나고 사랑해야 한다. 바로 그곳에서 우리는 기도하고 우리의 생명을 내어놓는 것, 일곱 번씩 일흔번 용서하라는 것을 배운다. 그러므로 실제 현실 속에서 사랑이 일어날 때마다 구원은 바로 그곳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구원, 구속, 의롭게 됨, 하느님 나라에서의 삶―이런 모든 것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일어나고 있다.


[원출처]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신약>,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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