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 더 깊게, 더 완전히, 더 많이 사랑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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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더 깊게, 더 완전히, 더 많이 사랑하라
  •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7.08.17 1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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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새로운 창조-3

"내가 어렸을 때에는 어린이의 말을 하고 어린이의 생각을 하고 어린이의 판단을 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어서는 어렸을 때의 것들을 버렸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보이나 그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뿐이지만 그 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1코린 13,11-13)

성령의 인도를 받아 따라가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들이 그저 율법을 따라 사는 사람들보다 더 분명하지 않을 때가 많다. 우리는 우리의 완벽함에 따라 살지 않고 주님을 믿고 신앙의 삶을 산다. 우리는 실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믿으면서(필리피 3,6-15) 그분의 약속에 희망을 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가 아무리 선하고, 또 아무리 죄를 많이 지었더라도 모두 하느님의 전적인 자비와 용서 아래 살고 있다는것 만을 알고 하느님과, 또다른 이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고 산다.

 

사진출처=pixabay.com

믿음의 삶은 험난하다. 희망의 삶은 위험을 무릅쓰는 꿈이다. 사랑의 삶은 항상 십자가 투성이다. 성 바오로가 말했듯이, 우리는 “두려움 속에서 떨면서”(필리피 2,12) 구원을 향해 나아간다. 더 이상 우리 옆에 율법을 놔두고 거기에서 보호를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늘상 우리가 옳다는 위안을 더이상 가질 수 없다. 우리는 몇 가지 교훈에 집착함으로써 우리가 도덕적이라거나 잘 다스리고 있다는 잘못된 의식을 더 이상 가지고 있을 수 없다.

이것이 구약성서의 도덕성과 성 바오로가 이해하는 신약성서의 도덕성 사이의 중요한 차이이며, 제한된 계명 안에서 사는 것과 성령의 자유로움 안에서 사는 것의 차이고, 그것은 계명의 테두리 안에서 사는 것과 성령의 자유 안에서 사는 것의 차이이다. 법과 사랑, 종교와 믿음, 공로와 은총 사이의 차이이다. 믿음의 삶은 어린아이에서 성인으로, 자기통제에서 자기포기로, 도덕률에서 다른 사람 그리고 주님과 개인적 관계를 맺는 단계로 가는 여정이다. 그것은 올바르게 보이거나 “거룩하게” 느껴지는 호화스러움을 항상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 하셨듯이 믿음의 길은 좁고 그 문이 아주 작기 때문에 찾기가 어렵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종교의 넓은 길을 따라 걸어가면서 바오로가 말하고 있는 구원을 완전히 놓친다. 교회에 잘 나가고 계명을 어기지 않는 것으로 만족해지기는 쉽다. 우리는 “천국으로 데려다 줄 것”이라고 생각되는 행동을 하면서 만족해지기가 쉽다. 그러나 진정한 신앙의 반대되는 개념은 너무나 자주 무신론이 아니라 광적 신앙이다.

우리는 진정한 구원이나 혹은 바오로가 로마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종종 ‘의롭게됨’이라고 불렀던 것을 믿음의 관계에서 경험할 수 있다. 구원은 우리 삶을 올바르게 정리하는 것과 같은데, 이는 우리가 특별히 무엇을 하려고 애쓰지 않을 때 우리에게 온다. 우리 스스로 무엇을 하려고 애를 쓰면 문제를 더 복잡하게만 하고 하느님 사랑에 승복하는 대신 우리의 완벽성에 집착하게 만든다.

그러한 승복을 하기 전까지는 우리가 구원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실제로 우리가 구원되는 것을 방해한다. 우리가 의로움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은 실제로 자기 정당화일 뿐이다. 성취했던 것 같았던 것들이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니다; 참된 것을 알지 못할 때 우리는 그것을 참된 것으로 오인한다.

맹목적인 종교만 붙잡고 있을 때 우리는 계명을 잘 지킨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거기에 만족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율법은 실제로 절대 완수될 수 없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단 한가지 계명, 즉 그가 사랑했듯이 사랑하고, 그가 했던 것처럼 자신을 완전히 내어 주는 사랑을 하라는 계명을 주셨다. 우리는 그 계명 하나를 완전히 지켰다고 주님 앞에 서서 말 할 수 없다. 그분께서는 항상 우리에게 더 깊게, 더 완전히, 더 많이 사랑하라고 요청하시고 계신다.

우리가 그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성공하지 못한다. 하느님을 위해서 선한 일을 함으로써 그 계명을 지키려 해도 우리는 성공하지 못한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성공을 요구하시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오직 우리의 승복만을 요구하신다.

때때로 우리는 실패의 경험을 통해서 하느님께 순명 하는 것을 배운다. 그리스도의 율법을 잘 지키지 못할 때 우리는 그럼에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된다.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계명을 지키지 못할 때 우리는 우리 삶에서 하느님의 개인적 현존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바오로는 계명과 율법을 구원의 준비물로 생각했다. 우리는 실패, 좌절, 실수를 경험하는 와중에 믿음으로 이끌려진다. 실패를 경험할 때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를 일으켜 세우셔서 우리에게 그분의 승리를 주시도록 허락한다. 그래서 바오로는 다음과 같은 말을 즐겨서 했다, “우리는 약할 때 강합니다”(고린토 후서 12,10).

그러므로 바오로와 모든 신앙인들에게 구원은 완전히 하느님께로부터 오고 의롭게 됨은 완전히 선물이다. 그것은 모두 은총이다. 은총이 모든 것이다. 우리가 공로를 내세울 수 없다; 우리 자신의 힘으로 그것을 얻을 수 없다 (에페소서 2,6-9). 우리는 다만 그것을 청할 수 있고, 받을 수 있고, 찬양 할 수 있을 뿐이다. 우리를 구원하시고, 의롭게 하시고, 값을 치뤄 구속(救贖)하시는 분은 언제나 하느님이시다. 그 말들은 모두 같은 것인데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고, 우리 자신이 그 사랑으로 채워지고, 그것을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경험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저 다른 단어들을 쓴 것뿐이다.

바오로는 독특한 개종을 통해서, 또한 그리스도교 공동체로부터 예수에 대해 배우기 전에도 이미 그는 “우리는 낡은 것을 버려야만 새로운 삶을 찾을 수 있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의미를 경험했다. 우리 자신을 놓아버리는 것이 자신을 새롭게 하는 유일한 길이다. 영적 자유를 얻는 유일한 방법은 성령께 전적으로 복종하는 것이다.

그러한 순종적인 삶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똑같아 지려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준다. 만일 우리가 각각 주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이 인도하는 곳으로 따라 간다면 우리의 여정은 서로가 다 다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일치를 한다면, 우리는 일치 안에서 각각 다른 길을 걸어 갈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 분을 따르는 사람들의 분열이 아니라 일치를 위해서 기도하셨다. 우리가 주님을 따르겠다고 정말 철저히 맹세를 한다면 성령은 우리에게 서로를 섬기는 일치 속에서 함께 일하도록 다양한 선물을 주신다(에페소서 4,11-13).

만일 우리가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구원을 추구한다면 그리스도께 대한 순종은 이차적인 것이 된다. 반대로 우리가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그분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도록 허락한다면 율법이 부차적인 것이 된다. 우리는 몇몇 율법 역시 하느님께로부터 오기 때문에 그것을 기꺼이 따를 자유가 있다. 그러나 예수께서도 바리사이파들이 놀랐을 정도로 유대 율법을 노예처럼 따르지 않고 자유로웠듯이 우리는 그 법을 노예처럼 따르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하느님과 개인적 관계를 갖고 살지 않는 사람들은 이 모순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들은 순종이 어떻게 해방을 가져올 수 있는지를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께 철저하게 순종하면서 사는 사람들은 궁극적으로 정말 중요한 유일한 자유를 받는다. 그들은 법이 요구하는 것이 정당할 때 율법에 복종할 자유, 그리고 법이 그리스도의 복음이 정말로 요구하는 것을 제한할 때 율법의 한계를 넘어서 나아갈 수 있는 자유를 받는다.

그러므로 바오로는 신앙의 여행을 떠나 예수님의 해방을 경험한 뒤 다음과 같이 말한다:

"율법을 지킴으로써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을 받는다면 나는 조금도 흠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에게 유일했던 이런 것들을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장애물로 여겼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나에게는 모든 것이 다 장애물로 생각됩니다. 나에게는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무엇보다도 존귀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든 것을 잃었고 그것들을 모두 쓰레기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내 믿음을 보시고 하느님께서 나를 당신과의 올바른 관계에 놓아주시는 것입니다." (필립보서 3,6-9)

그러므로 바오로에게 구원이란 그리스도와의 개인적인 관계를 통해서 오는 것이고 의롭게됨은 우리자신이 아니라 하느님을 굳게 믿는 신앙을 통해서 온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단계에 남아있으면 구원이란 것이 교회와는 아무 연관이 없는 - ‘예수와 나’라는 형태의 종교, 즉 아주 개인적인 종교로 보여질 수 있다. 그것은 텔레비젼 설교가가 서로서로 아무런 관계를 맺고 있지 않은 수백만 청취자들에게 선포하는 일종의 근본주의적인 종교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바오로가 이해하고 있는 구속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에게 구원과 의롭게됨은 근본적으로 믿는 이들의 몸 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관계 안에서 일어난다. 


[원출처]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신약>,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2000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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