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성 안에서 기도하기, 베타니아의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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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성 안에서 기도하기, 베타니아의 마리아
  •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7.07.10 2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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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가 복음과 사도행전-14 : 루가 복음서의 마리아

루가에 의한 복음서에서 우리는 또 다른 마리아를 만난다. 예수님의 어머니와 루가 복음에 나오는 모든 여인들처럼 그녀는 우리가 주님 앞에 나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받아들이는 자세’를 가지고 있는 분이다. 그녀는 기도의 본보기이다.

마리아와 그의 자매인 마르타의 이야기에서 복음사가는 하느님을 위해서 자기들의 일을 하는 사람과 그들을 위해 하느님의 일을 하게 하시는 두 사람을 대조적으로 그리고 있다.

예수의 일행이 여행하다가 어떤 마을에 들렀는데 마르타라는 여자가 자기 집에 예수를 모셔들였다. 그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앉아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시중드는 일에 경황이 없었던 마르타는 예수께 와서 “주님, 제 동생이 저에게만 일을 떠맡기는데 이것을 보시고도 가만 두십니까? 마리아더러 저를 좀 거들어 주라고 일러주십시오.“ 그러나 주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마르타, 마르타, 너는 많은 일에다 마음을 쓰며 걱정하지만 실상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참 좋은 몫을 택했다. 그것을 빼앗아서는 안된다” (루가 10,38-42)

CHRIST IN THE HOUSE OF MARTHA AND MARY (Christus in het huis van Martha en Maria) c. 1654-1655 oil on canvas 63 x 53 7/8 in. (160 x 142 cm.) National Gallery of Scotland, Edinburgh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 기도의 본질

마르타 처럼 우리 모두는 주님을 위해서 하찮은 일로 법석을 떨기 쉽다. 우리는 항상 주님을 위해서 무엇인지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루가는 마리아가 주님과 올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겉으로 보기에 그녀는 쓸모 없고, 실제적이지 못하고 해야 할 일들에 무관심해 보인다. 그러나 마리아가 예수님과 전적으로 관계를 맺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기 때문에 그녀야말로 궁극적으로 가장 쓸모 있고 실용적인 사람이다.

예수님 곁에 있으면서 그분의 말씀을 듣는 것이 기도의 본질이다. 기도는 두마음, 즉 인간과 하느님 사이의 대화이다. 기도는 마치 친구 사이에서 주고받는 것 같이 어떤 때는 말을 하지만 어떤 때는 말이 없는 그런 대화이다. 기도하는 여자나 남자가 되기 위해서는 항상 대화 안에 있어야 한다. 만일 이렇게 주고받는 관계가 허물어 질 때 우리는 더 이상 기도하는 사람이 아니다.

그 관계는 일종의 사랑하는 관계이다. 우리가 누구를 깊이 사랑할 때 서로 통하기 위해서 꼭 말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면 더 깊은 차원에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데 여기에서 이 대화는 영적인 친교가 된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 옆에 있으면 사랑의 힘이 우리 사이에 흐르는 것을 느끼게 되어 그저 행복하기만 하다. 기도 중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에너지가 바로 이것과 같다. 기도 중에 우리가 받는 힘은 우리 자신을 열고 주님이 오실 때까지 기다리며 그분이 오시어 우리를 사랑하게 하는 그런 사랑이다.

사랑에 빠져 사랑하게 되다

사랑에 빠짐으로써 우리는 사랑 안에 있게 된다. 여러분이 한번이라도 사랑해 본적이 있다면 그것을 의식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것이다. 여러분이 어떤 시도도 하지 않았을 때에도 사랑은 그저 일어났다. 그것은 마치 처음 수영을 배울 때와 같다. 수영 선생은 가만히 누워서 떠보라고 하지만 여러분은 몸부림치다가 가라앉는다. 드디어 힘을 빼는 것을 배우고 나면 놀랍게도 여러분은 물위로 둥둥 뜬다. 물이 여러분을 받쳐 준다.

단지 여러분은 조용하게, 아무것도 하지말고 가만히 있어야한다. 사랑에 빠지는 것도 이것과 똑같은 이치이고 “기도에 빠지는 것”도 똑같다. 그것은 여러분이 해보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을 접고 그 안에 빠져들도록 가만히 있으면 된다.

물에 뜬다는 것은 우리자신과 물이 서로 일종의 대화를 하는 것이다. 가만히 있음으로써 우리는 물에게 우리가 물을 믿는다고 말하는 것이고 물이 우리를 지탱해 줄 것이라는 말을 우리에게 하게끔 하는 것이다. 기도도 이와 같이 우리자신과 하느님 사이에 있는 일종의 믿음의 관계이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마음대로 하려는 것을 그만두면 우리를 지탱해 주고 있는 하느님의 힘을 경험할 수 있다. 특히 주님께서 우리에게 “자, 이제 너는 누가 너를 지탱해 주는 지 안다. 나는 네가 수영을 시작하기를 바란다”라고 말씀하신 후의 우리 기도는 앞서 말한 것과 같다. 한 번 한 번 움직일 때마다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어떤 때는 그저 떠 있기만 할 때도 있다. 어떤 때 우리는 우리자신을 가만히 있도록 놓아두면 기도 안에서 우리를 지탱해 주는 사랑을 경험한다. 혹은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 정신적으로 하나가 될 때 우리는 사랑하는 이의 눈을 쳐다보며 그 안에 머문다. 누군가 우리를 사랑스럽게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우리 모두는 그 경험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사진출처=pixabay.com

기도는 사랑처럼...

나는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던 때를 잊을 수 없다. 나는 일년간 프란치스코 신학교 일 학년에 다녔다. 그때는 초등하교 졸업 후 바로 신학교에 진학했고 그때 처음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말할 것도 없이 여자아이들과도 일년간 만나지 못했다.

내가 여름 방학에 집에 돌아온다는 소식을 들은 친구들은 디키(그 당시의 내 이름)를 주빈(主賓)으로 하는 잔치를 열기로 했다. 남자, 여자아이들이 좀 쑥스러워하면서 거기에 다 모였다. 남자아이들은 방 한 모퉁이에, 여자아이들은 다른 쪽 모퉁이에 모여 있었다.

특히 한 여자아이가 생각난다. 보니라는 아이로, 8학년때 나와 같은 반이었고 나는 그 아이와 함께 춤추는 것을 정말 좋아한 것 같았는데 그 여자아이는 나를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았다. 마침내 나는 용기를 내서 방 저쪽, 그 애가 서 있는 곳을 쳐다보았는데 - 그 애가 거기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어찌해야 할 줄을 몰랐다! 나는 아주 흥분되고 당황스러워서 얼른 내 발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숨을 거칠게 쉬었고 입은 말랐고 손바닥은 땀으로 축축해졌다. 그 애가 정말 나를 보고 있었을까? 나는 의아해 했다. 나는 그것이 사실이라는 것을 믿을 수 없었다. 그 애는 그저 주위를 둘러보다가 자기를 보고 있는 나를 보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애가 나를 보고 있었다면? 숨이 막혔다. 어떻게 해야하나? 드디어 나는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 그런데 그 애가 아직도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너무 신이 나고 행복해서 내 자신도 잃어버리고 그 애에게 가서 이야기를 했다. 그 사랑의 눈길이 나의 두려움을 녹여주었고 잠시 후에는 춤을 추자고 까지 하였다.

그 해 여름 내내 나는 그 사랑의 눈길에 의지해서 살았다. 사랑이 없으면 고통스러울 수도 있었던 것들이 짜증이 나지 않았다. 어떤 여자가 그녀의 눈에 나에 대한 사랑의 빛을 담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일들을 다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단 한번의 사랑의 눈길로는 부족하다

기도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이와 똑 같은 사랑의 빛을 가지고 우리를 보고 계심을 발견한다. 처음에 우리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우리는 왜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지를 모르나 볼 때마다 여전히 사랑하고 계신 것을 발견하고서는 정말로 그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한다. 이런 깨달음이 기쁨이며 자유이자 에너지이다. 이러한 경험은 단지 한해 여름 동안만이 아니라 우리의 일생 내내 우리 삶에 생기를 준다.

그러나 하느님께 단 한번의 사랑의 눈길을 받은 것이 우리를 영원히 지탱할 수는 없다. 우리는 잊어버린다. 기도 중에 하느님과 영적 교류를 한 경험은 우리에게 얼마동안 에너지를 주지만 기도는 장기적으로 볼 때 우리가 우리 힘의 원천과 계속 관계를 유지 할 수 있도록 계속되는 대화이어야 한다. 기도 안에서 주님과 갖는 관계는 마리아의 기도처럼 한결같아야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어떻게 우리가 이런 기도 속의 관계로 들어 갈 수 있을까?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찬양만이 그것에 도달할 수 있는 최선의 것임을 알았다. 그저 감사할 일들을 찾고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

Madonna and the Christ Child by Argentine artist Diana Mendoza at Casa Jacaranda in South Texas.

매일 매일 하느님을 찬미할 이유

프란치스코는 하느님을 찬미 할 새로운 이유를 매일 매일 찾으면서 일생을 보냈다. 그는 무슨 일이 일어나면,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중요하든지 그렇지 않든지, 항상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그는 예쁜 것이든 미운 것이든, 아주 특별 한 것이든 평범한 것이든, 무엇을 보든지 하느님께 찬미를 드렸다. 해가 빛날 때는 그 빛남을, 비가 올 때는 그 빛나지 않음을 하느님께 찬미 드렸다.

그는 자기가 건강할 때 건강함을, 건강하지 않을 때는 그 병을 하느님께 찬미 드렸다. 그는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 경멸하는 사람들로 하느님께 찬미 드렸다. 그는 동물, 새, 나무, 꽃, 땅위의 풀과 돌로도 하느님께 찬미 드렸다. 그는 하느님의 사랑을 얻으려고 노력하지 않았고 그것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그것을 그저 기념하였고 주위에 있는 모든 것을 보면서 찬미드릴 이유를 찾았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찬미하였던 사랑을 더 깊이 깨닫게 되었고 더 기도에 몰입하게 되었다.

전례는 아주 많은 찬미를, 혹은 적어도 그것의 흔적들을 담고 있다. 가장 높은 곳에 계시고 거룩하시고 거룩하시며 거룩하신 하느님께 드리는 영광과 많은 기도들은 본래 찬미를 드리는 부르짖음이었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나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분께 감사 드리는 것을 꼭 여러 사람들이 있는 곳에서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당신은 친구와 둘이서, 아니면 혼자서 직장에서, 집에서, 학교에서, 버스나 차를 타고 가면서, 걸어가면서 - 언제, 어디서나 실제로 그렇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찬미를 드리면 점차적으로 우리가 찬미하는 선함과 통교하는 길이 열린다. 이렇게 되면 나를 사랑하시는 분의 현존 속에 쉬면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치려고 하시는 것을 경청하는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그런 기도가 떠오른다. 이런 기도는 하느님 사랑 안에서 기쁨을 갖는 것이며 하느님 말씀을 신뢰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스런 현존을 깨닫게 되며 서서히 하느님의 사랑의 지혜가 우리 가슴에 말하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기다리면서 기도하는 기도

그런 의미에서 첫째, 기도란 휴식과 기다림을 뜻한다. 마리아(마르타의 자매)는 주님 옆에서 기다리고 있던 여인이다. 기도란 마치 사랑하는 것과 같이 비능률적이다. 그것은 그저 존재함이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다. 쉬는 것이지 행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 것을 즐거워하는 것이다. 자기가 있는 자리가 있어야 할 곳이라는 것을 알면서 그저 그곳에 있기만을 바라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그저 있어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그 현존을 알아보고 사랑하는 것이다.

둘째 단계로 기도는 기대하면서 기다리는 상태로 들어간다. 이때 기도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실 때마다 “예”라고 답할 준비를 하고 하느님 말씀을 주의 깊게 듣는 단계가 된다. 기도는 사랑하는 사람이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발견하고 그에 응답하기를 간절히 원하는 분별의 단계로 들어간다. 여기서 기도는 감추어진 귀로 들으면서 영혼 안에서 배우는 등 마음으로 듣는 것이다.

우리를 위한 주님의 뜻이 밝혀질 때 우리는 그것을 우리자신의 뜻으로 받아들인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를 즐겁게 하는 것 이외에 바라는 것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그것을 확언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이 진리이자 생명이므로 그것을 믿는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위해서 항상 제일 좋은 것만을 주시려고 하는 것을 알기 때문에 주님의 뜻을 믿는다. 주님을 믿을 때 우리는 결코 실망하지 않는다.

행동하는 기도

이제 우리는 믿음 안에서 기도를 하는 것으로부터 믿음 안에서 행동하는 것으로 옮겨갈 수 있다. 하느님의 뜻을 들었으면 들은 것에 꼭 복종해야 한다. 우리는 신앙 안에서 발걸음을 내딛고 주님의 약속 위에 서서 승리를 외치고 우리가 말하듯이 걷고 하느님 사랑을 축하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하고 싶은 것을 다하고 “이것이 당신의 뜻이라면”이라고 나중에 말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것은 마리아처럼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니에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소서”라고 미리 말씀하신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하신대로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한 기도, 그러한 믿음의 행위는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대담하고 잘못된 자기 확신으로 보일 수 있다. 그리고 사실 우리들이 기도의 대화 안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거만해 질 수 있다. 우리는 결코 “하느님께서 그것을 바라신다”라고 말하고 그것이 모두인양 즐겁게 우리의 갈 길을 갈 수 없다.

우리는 어제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기 위해서 결코 사람들을 다 밟고 넘어 갈 수는 없다. 하느님께서는 늘 지금 우리와 같이 계시고 그분은 바로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래서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내디딜 때마다 우리는 다시 들어야하고 지금 이 순간에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려고 해야한다.

항상 자신을 열어놓는 여성성은 무례한 남성적 행동에서 우리를 해방시킨다. 마리아의 영광은 그녀의 동정성이었고, 그녀의 은총은 그녀의 비어있음이었다. 기도하는 여자, 남자의 구원의 은총은 그들이 아무것도 아님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이 모든 것이고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끊임없는 자각은 우리로 하여금 신앙 안으로 발을 내디딜 수 있게 하는 힘을 주는 사랑과 대화하도록 늘 초대한다. 도전을 하고 행동하려는 끊임없는 의지는 우리의 기도가 한낱 환상이나 자기만족에 머무는 것을 막아 준다.


[출처]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신약>,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참사람되어 2000년 7월호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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