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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짓밟혀진 벌레처럼 가련한 분성찬례의 사회적 의미-마지막회
Meister des Hausbuches (German painter active between 1470-1505)

나는 절대적으로 확신합니다. 그리스도는 가난한 이들의 무력함 속에 계십니다. 가난한 이들은 절망해서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어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잊어버리기 위하여 술이나 노름에 취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합니다 “어떻게 이런 게으르고 술에 중독된 사람들 안에서 그리스도를 찾아볼 수 있단 말인가? 일하고 싶은 사람은 누구든지 일자리를 찾을 수 있지. 그들에게 일자리가 없는 것은 일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야. 그러니 그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일 수가 없어”. 참말로 가난한 이들이 취했을 때에는 물건이나 동물로 보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자신의 존엄성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그들을 가까이서 볼 때에, 나는 분명히 그리스도의 얼굴을 알아봅니다.

골고타 동산에서 침과 피, 땀과 먼지로 뒤범벅이 된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아보는 것 역시 쉽지가 않습니다. 예언자는 말합니다. “그는 짓밟혀진 벌레와 같았다”. 벌레! 그렇지만 바로 그분이 그리스도입니다. 성찬례가 있습니다. 빵과 포도주의 형상 아래 그리스도가 살아 현존하시는 성사입니다. 그리고 또 다른 성찬례가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의 성찬례, 비참이라는 형상 아래 그리스도가 가난한 이들로 살아 현존하시는 성찬례입니다. 가난한 이들안에 계시는 참 현존입니다.

나는 신학자들이 이 두가지 성찬례 사이의 차이를 제거할 것임을 압니다. 그 두가지는 똑같은 것이 아니다,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나는 주님께서 가난한 이들 속에서 당신을 알아보고 당신께 얼마나 봉사했는가에 따라 우리를 심판하시리라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나는 거기에, 그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안에 있었다. 그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바로 나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에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우리는 성찬례적인 그리스도의 현존을 지나치게 강조해왔습니다. 그렇지만 그분은 또 다른 방법으로도 현존하십니다. 예를 들면 둘이나 셋이 당신의 이름으로 모이면 함께 계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어느날 착한 수녀님 한 분이 나를 그녀의 병원으로 데려가기 위하여 먼 거리를 걸어와서 만났던 것을 기억합니다. “신부님!” 그녀는 말했습니다. “우리 병원에 지도 신부가 안 계신지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그래서 성체를 받아 모시는 즐거움이 없습니다. 난 그리스도를 받아 모셔야 해요. 신부님, 저에게 성체를 주십시오. 그리고 하실 수 있다면 우리에게 신부님도 보내 주세요”.

그래서 먼저 수녀님에게 성체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나서 말했습니다. “친애하는 원장 수녀님, 당신은 살아있는 그리스도와 하루하루를 지내고 계신 것입니다. 당신은 병원에서 아픈 이들과 함께 계시지요. 그들이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당신의 두 손으로 그리스도를 돌봐드리고 계신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또 하나의 성찬례이고, 살아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또다른 모습이며, 주님은 성찬례 안에서 가난한 이들과 함께 마침내 당신의 현존을 완성시키는 것이지요”.

주님은 사람들의 요구에 매우 민감하십니다. 그분은 배고픈 사람들을 보십니다. 그분은 울부짖는 사람들의 소리를 들으십니다. 그분을 따르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권한이 없습니다. “우리 사명은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지, 식량에 관해 걱정하는 것이 아니야. 우리의 식량은 하늘에 계신 빵일 뿐이야”. 아닙니다. 우리는 다만 사람들의 영적인 것을 책임지는 목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영혼과 육신으로 이루어진 인간에 대한 책임을 지는 목자입니다.

굶주린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는 굶주림에 대하여 심각하게 바빠야 합니다. 이론적인 것에 대하여 토의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즉시 가능한 것을 시작하고 또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는 것들도 해봐야 합니다. 특히 세계 인류의 2/3가 굶주리고 비참하게 생명을 연장하고 있는 오늘날의 현실을 볼 때에 더욱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굶주림과 비참이 불의와 불의한 구조로부터 나온 것이므로 주님은 우리에게 불의를 고발하라고 요구하십니다. 불의를 고발하는 것은 말씀을 선포하는 사명에 포함되는 것입니다. 불의의 고발은 복음선포에 있어 절대적으로 핵심부분입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인간적 의무이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에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무이고, 목자들에게는 절대적인 의무입니다. 오천명을 먹이시려고 빵을 늘이셨던 것을 어떤 사람들은 성찬례를 세우기 위한 상징적인 행동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거룩한 성찬례에 참여합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 거룩한 성찬례가 동료 인간들의 굶주림과 비참을 알아볼 수 있도록 우리의 눈을 열어 준다고 확신합니다.

세계성체대회의 역사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원래 성체대회의 목적은 성찬례 안에 숨어계신 주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 우리는 ‘생명의 빵’, ‘나누어진 빵’이신 그리스도께서 우애와 사랑, 이해와 정의, 평화와 빵을 갈구하는 수백만의 동료들에게 우리의 주의를 돌리기를 원하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눈을 크게 떠야 합니다. 우리는 빵을 분배하는 방법뿐만 아니라 빵을 늘리는 방법도 찾아내야 합니다. 오늘 그리스도는 빵을 갖지 못한 사람에게 빵을 분배하는 것만으로 충분치 못하다고 이야기 하십니다. 근본적인 것은 보다 정의로운 세상을 창조하기 위하여 일하는 것입니다. 그 정의로운 세상에서는 더 이상 소수가 지나치게 많이 갖지 않고 다수의 사람들이 굶주리지 않을 것입니다. 


[출처] 참사람되어 1996년 11월호
[원출처] <하나되어> 1988년 8월(제19호)~1989년 6월(제28호)

 

[ 가톨릭일꾼 www.catholicworke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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