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교회는 어머니인 동시에 동정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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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교회는 어머니인 동시에 동정이어야 한다
  •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
  • 승인 2017.07.04 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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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가 복음과 사도행전-13 : 루가 복음서의 마리아
사진출처=pixabay.com

과거에 가톨릭 교회는 Sancta Mater Ecclesia, 거룩한 어머니인 교회에 대해 언급해 왔으며, 여러 면에서 교회는 우리에게 어머니 같았다. 현대 교통 수단이 발달되기 이전에 우리들 대부분은 가톨릭 신자들만 서로 알고 지냈다. 현대적인 교육이 있기 전에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은 유일한 그리스도교 가르침이 가톨릭 교리라고 믿었다. 성령께서 우리 마음을 성서의 아름다움에 열게 하시기 전까지 우리들 대부분은 가톨릭 교권의 진리에만 완전히 의존하였다.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가톨릭만 경험했고 교회는 우리에게 영적, 지적, 문화적인 삶을 주는 위대한 어머니였다.

그러나 과거의 교회는 소위 ‘어머니 됨’에도 불구하고, 자주 매우 남성적이었다. 교회 계급 제도는 완전히 남자들로만 구성되었다. 교회의 운영은 매우 관료주의적이었으며, 독재적이기까지 했다. 교회의 권위는 최고로는 아버지적이었고 최악으로는 가부장적이었다. 이런 까닭에 종종 교회의 여성성은 가톨릭교 신자나 비가톨릭교 신자들에게 감지되지 않았다.

중세시대 사람들은 이에 비해서 교회의 여성성에 대해 좀더 마리아와 같은 감성을 가졌었다. 종종 중세 예술가들은 마리아를 거대한 대법의(大法衣, 성직자가 입는 긴 망토 모양의 겉옷)를 입은 여인으로 그렸다. 그 겉옷 아래 교회의 모든 사람들, 부자와 가난한 사람 모두를, 그들의 어머니에게 매달리고 그들의 어머니와 일체감을 갖는 아이들처럼 그렸다. 그들은 모두 그녀처럼 되고 싶었다. 그녀는 늘 그들 중의 하나가 될 것이었다. 그들은 모두 하느님께 의존하고 하느님을 믿는 그들의 태도 안에서 하나가 되었다. 그들은 모두 주님 앞에서 여성적이었다.

이러한 중세의 형상은 하느님 없이는 인간성이란 수정이 되지 않은 땅-즉 메마른 땅-이며 인간이 주님을 받아들여 자기의 필요성을 채울 때만 열매를 맺을 수 있다는 성서적 형상과 더 가깝다. 중세의 형상은 마리아를 영원히 변하지 않는 여인상으로, 비어 있다는 점에서 영원히 동정이며,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녀에게 주신 충만함이라는 면에서는 영원한 어머니로 그린 성서적 형상과 더 가깝다. 그러므로 제 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선포한대로 만일 마리아가 교회의 본보기라면 교회는 어머니인 동시에 동정이어야 한다.

위에서 언급한 남성성과 부권주의는 교회가 동정성을 가지고 있지 않고 어머니인 것만을 강조할 때 생기는 결과이다. 어머니 노릇에는 부정적인 측면과 조작적인 면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교회가 간과하며 ‘어머니는 다 안다’ 는 식의 게임(game)을 한다. 교회는 권위적인 방법으로 모성을 강요하고 아이들을 약하고 의존적으로 만든다. 그렇게 함으로써 교회는 자신의 순결성, 주님을 기다려야 할 필요성, 겸손한 종이되어야 할 필요성을 망각한다. 교회는 단지 자신뿐만 아니라 더 큰 세상에 봉사해야 한다는 소명을 망각한다.

마리아는 천사의 말을 듣고 자신이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음을 알았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기 위해 선택되었다. 혹은 옛 번역대로 옮긴다면, 그녀는 “은총이 가득하였다.” 그러나 마리아의 은총은 그녀의 동정성, 비어 있음과 자기의 모자람을 기꺼이 인정하는데 있었다. 모든 것인 하느님 앞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그녀는 하느님 은총을 받았다. 그녀는 자신이 구세주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고, 또한 하느님만이 그녀와 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구원을 해주실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한 고백을 했기 때문에 마리아가 영광을 받았다. 달과 같이, 그녀는 해에서 받은 빛 외에는 자기 스스로가 빛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의 영광은 전에도 지금도 반사된 영광이다. 그녀는 하느님의 빛을 어둠에 찬 세상에 반사시킨다. 만일 마리아가 교회의 본보기라면 교회의 영광도 이와같이 교회의 동정성에 있는 것이다. 자신이 하느님께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고백함으로써 교회는 주님으로 하여금 성령으로 자신을 채우시도록 함으로써 그 결과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낼 수 있는 어머니가 된다. 교회가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있는 길은 마리아가 한 것 처럼 아버지 말씀에 순종하고, 그 말씀과 성령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마리아는 교회의 사회적인 실제를 보여주는 본보기일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 삶의 개인적인 실제를 보여준다. 마리아와 하느님과의 관계는 의탁과 감사의 관계이다: 그녀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주님께 의탁하고; 그녀가 주님께로 받은 모든 것에 대한 감사함이다. 만일 마리아가 우리의 본보기라면 우리도 우리가 비어 있음을 항상 고백하고 주님께서 우리를 채워 주시도록 허락해야 한다. 성서는, 만일 우리가 마리아처럼 한다면 실망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한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포기한 것보다도 항상 더 많이 우리를 채워 주실 것이다.

이 사실을 성서가 가르치는 방법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너무 자주 가톨릭 영성은 자기 부정, 자기 비하를 거의 자학적 방식으로 장려해 왔다. 우리는 과거 영성 작가들에 의해서 우리 자신을 낮추는 것이 목표 그 자체라고 믿도록 인도 되었다. 마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우리의 권리를 부인하는 것이 우리에게 기대 되는 전부이고 하느님께서도 그것을 좋아하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그리스도교 영성은 성서적인 영성의 반쪽일 뿐이며, 참된 마리아 영성의 일부일 뿐이다. 나머지 반쪽은 하느님 말씀을 주의 깊게 듣고 그 말씀이 오실 때 “예”라고 응답하며 우리 자신이 성령으로 충만될 수 있게 허락함으로써 우리가 그리스도를 세상에 오시게 하는 것이다. 이 두 번째 단계가 바로 우리가 이미 육화된 신앙이라고 말해 온 것의 기본이다.

 

사진출처=pixabay.com


성서적인 신앙과 성서적 영성은 하나이며 같은 것이다: 그것은 성실성에 관한 영성이자 주님을 충실히 믿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마리아를 성서적 신앙의 모범이라고 할 수 있다: 마리아의 신앙은 구약 전체가 나아가는 길이고, 신약전체의 주제이다. 마리아의 영성은 하느님께서 우리 삶 안에 육화 하시도록 허락하는 믿음이다.

순수한 자기 부정의 영성은 반만 성서적이고; 또한 반만 인간적이다. 이러한 영성은 마치 하느님께서 사람들에게 그들의 능력보다 더 못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이 들리기 때문에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거부하고 있는 유형의 그리스도교 신앙이다. 바로 이런 똑같은 이유 때문에 아주 신실한 가톨릭 신자들도 종종 사순시기와 대림시기에 들려오는 자기 부정을 요구하는 부르심을 이해하지 못한다. 자기부정은 그 자체로서는 별로 가치도 없고 별 성취할 것도 없어보인다. 그래서 이해하기가 힘든 것이다.

그러나 성서적인 신앙과 마리아 영성은 자기 부정의 경지를 뛰어넘어 하느님을 인정하고 그리스도를 우리 삶으로 영접한다. 일단 마리아가 하느님께 순종하자 하느님께서는 그녀가 기대한 것보다 더 많은 것으로 그녀를 채워 주신다.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많은 것을 행한다. 이러한 반전은 수세기 전에 이사야가 예언하였다:

"환성을 올려라, 아기를 낳아 보지 못한 여인들아!
기뻐 목청껏 소리쳐라. 산고를 겪어 본적이 없는 여인아!
너 소박맞은 여인의 아이들이 유부녀의 아이들보다 더 많구나,
야훼의 말씀이시다."
이사야 54,1)

주님께서는 인간의 사고 방식을 바꾸어 놓으신다. 우리는 모든 것을 우리가 해야한다고 생각하나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우리 안에서 그것을 모두 하시기를 원하신다. 그분은 우리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우리 안에서 하고 싶어하신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그렇게 하시려면 우리는 먼저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렇게 말하는 것이 우리 자신을 비우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우리자신을 비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선물임을 인정해야 한다. 자신을 부정하기보다는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면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에 매달리지 않게 되고 어떤 형태로든지 우리 자신에게 집착하지 않고 자유로와 질 수 있다. 일단 그렇게 하면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 싶어하는 풍요함을 받기 위해 우리 것이라고 생각했던 작은 것들을 놓아 보낼 수 있다.

이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지혜이다. 특히 성공과 성취의 윤리를 바탕으로 성장한 사람들에게는 특히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성서적 지혜이다. 시편 작가가 말한다:

"야훼께서 집을 세우시지 아니하시면
집 짓는 자들의 수고가 헛되며
야훼께서 성을 지키시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있음이 헛일이다.
이른 새벽에 일찍 일어나는 것도,
먹으려고 애쓰는 것도 다 헛되고 헛되니
야훼께서는 사랑하는 자에게 잘 때에도
배불리신다."
(시편 127,1-2)

“무엇을 하려고 들지 말고; 거기 서있어라!” 이것은 우리가 알고 있었던 것과는 매우 다른 종류의 지혜이다. 그것은 영적 믿음의 지혜이다. 그것은 마리아 영성의 지혜이다. 그것은 책에서 읽을 수 있는 지혜이지만 그것에 관해서 읽는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로지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이며 기도 안에서만 받을 수 있는 지혜이다.


[출처]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신약>,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참사람되어 2000년 7월호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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