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식을 치러내느라 바쁜 성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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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식을 치러내느라 바쁜 성찬례
  • 참사람되어
  • 승인 2017.05.29 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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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례의 사회적 의미-5

현대 사회는 교회에게 특히 성찬례에 관하여 여러 가지 심각한 문제들을 제시하고 있다. 삶의 의미와 내적인 충만에 대한 갈망, 공동체의 추구, 분열된 사회와 세상 속에서 정의와 인권문제에 관한 관심 등이 현대사회가 교회에, 성찬례에 그 답변을 요구하는 질문들이다.

그러면 먼저 개인적인 차원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현대인들의 갈망에 관하여 성찰해 본다.

인간은 자신의 삶과 행동의 의미를 보다 분명하게 깨닫고 싶어 한다. 이것은 세상이 주는 환멸 때문에 그렇기도 하다. 사람들은 온갖 지도자들에게 기만당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또 자신들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현대 기술 때문에 현대인들은 영적인 충만을 다른 곳에서 이루려 한다. 전통적인 종교들조차 이러한 갈망을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 사람들은 외형적인 예식 속에서 내적인 의미를 찾거나 회개를 하지 못하고 공허감만 맛보고 있다.

현대생활, 특히 산업화된 사회가 개개인에 미치는 중압감은 너무나 크다. 사람들의 눈과 귀는 쉬지 않고 보아야 할 것, 들어야 할 것들과 대면해야 한다. 물질적인 풍요는 사람들의 미각과 온갖 감각을 방종스럽게 만든다. 신문, 라디오 특히 텔리비젼은 가정생활을 깊게 파고 들어와 사람들에게 도무지 조용한 순간을 남겨놓지 않는다.

이처럼 지나친 행동성은 사람들에게 수많은 정보를 제공해 주나 지혜를 그만큼 전해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수많은 정보는 더 깊은 성찰에 방해가 되고 있다. 수많은 정보에 사로잡힌 감각은 마음의 움직임을 흩어버린다. 사람들은 감각이 끊임없이 흥분되는 것에 길들여지고 있다. 오늘날 감각세계와 심리적인 세계에서도 우리는 일종의 공해현상을 감지할 수 있다. 수많은 정보들이 보다 빠르게 그렇지만 표면적으로만 전해지고 있다. 사적인 생활이란 이제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또 다른 한편으로 대도시는 사람들에게 외로움을 느끼게 한다. 사람들은 다른 이들과 삶의 깊은 측면에 대하여 이야기를 거의 나누지 않는다. 모두가 자기 중심적인 생활을 한다. 심지어 가족끼리도 깊은 대화는 부족하다. 아이들은 부모와 깊은 대화를 나누며 자라지 않는다. 따라서 애정 결핍으로 올바른 성인이 되지 못한다. 실업, 노후, 질별에 대비한 사회보장제도와 보험제도들은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키워주지 않는다. 이처럼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는 개인적 자유는 더 많이 누릴지 모르나 사랑이 없는 차가운 관계로 전락되어 간다.

방종한 감각들의 분주함은 마지막에는 결국 공허와 절망감을 가져올 뿐이다. 성의 방종은 남녀 모두를 수치스럽게 하고, 물질적 풍요는 지나친 소비성향을 초래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비만증에 걸려 체중을 줄이는데 고심하는 반면 수백만의 사람들은 영양실조로 고통받고 있다. 사람들은 전 세계의 경제구조가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있다. 부모는 부모대로 자신들의 자유를 누리며 아이들을 돌보지 않는다. 반면 아이들의 반항은 부모를 괴롭힌다. 더 풍요롭게 살수록 사람들은 쉽게 삶에 대해 불평하고 권태감을 느낀다. 더 이상 도전할 거리가 없다. 그저 권력과 특권을 더 많이 소유하려는 욕망만 기승을 부릴 뿐이다.

이러한 갈등과 긴장 때문에 사람들은 의미를 찾기 위한 침묵의 시간, 이웃의 사랑을 얻으려고 노력하는지 모른다. 현대 사회의 탐욕과의 싸움은 개인적으로 또한 공동체적으로 적극적인 자기절제를 필요로 한다. 풍요와 소비에 대한 절제, 감각에 대한 절제가 필요하다. 풍요와 소비에 대한 절제운동은 사회정의운동이며 감각에 대한 절제는 침묵과 묵상, 성찰운동이다.

사진출처=youtube.com

내적인 영적생활과 사회 경제적 해방운동은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보완적인 것이다. 금세기 이러한 통합을 가장 완벽하게 시도한 사람은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이다. 묵상은 사회불의에 저항하기 위한 동기와 영혼의 본질적인 힘을 사람들에게 키워준다. 사회정의 문제를 무시하고 불의와 타협하는 영성이란 근본적으로 있을수가 없다. 자기 성화와 자기 절제는 필연적으로 불의한 구조악의 공범자가 되기를 거부한다. 그렇지 않다면 참 묵상도 참 자기 성화도 이루어질 수 없다.

성찬례는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영성의 중심이므로 우리는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성찬례가 이러한 사람들의 요구에 응답할 수 있었는가? 삶의 의미를 추구하고 사회정의 문제에 관심있는 사람들의 요구를 충족시키고 있는가? 전통적 그리스도교 영성의 중요한 실천 부문인 명상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져야 한다. 묵상은 사람들의 갈망에 응답하고 있는가 아니면 수도자와 성직자들의 종교적 예식에 불과한가? 특히 주일날 본당의 미사, 성찬례는 어떠한가?

미사에서 조용한 묵상의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적어도 묵상적인 정신을 신자들에게 키워주지 못하고 있다. 외형적인 것에 너무 시간을 많이 쓰고 있다. 독서, 강론, 봉헌 등 교회에 모인 신자 공동체는 이러한 예식을 치루어 내느라 바쁘다. 이러한 예식들이 사람들의 갈망과 연결되어 있다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용한 성찰이 필요하다는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예식과 절차는 방해가 될 수도 있다.

어떤 경우에는 미사가 성찰이나 침묵보다 그리스도교의 영성을 키우는데에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성체조배는 묵상의 필요성에 응답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보통 신자들이 성체조배를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방법과 조건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인간의 몸이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그리스도교의 영성은 오늘날 본당에서 이루어지는 성찬례 안에서 충분히 표현되거나 그 의미가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인간의 육체에 대하여 그리스도교 영성은 다음과 같이 말해왔다.

인간의 육체는 유혹 당하기 쉬운 연약한 것이다. 그러나 또한 육체는 많은 좋은 것들을 만들어 내는 도구이다. 그러므로 육체가 필요로 하는 것들에 관심을 갖는 것은 영원한 구원에 이르는 기준이 된다. 마지막 심판날에 육체는 다시 일어나 영원한 행복을 맛보게 될 것이다. 이것을 위해 육체는 절제와 훈련이 필요하다.

예수께서 “이는 내 몸이다” 하시며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당신 몸을 내놓으셨을때에 성찬례 안에서 이러한 모든 의미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 예수님의 봉헌은 희생적이고 구속적이며 모형적인 것이다. 세상의 악과 대항하여 싸우실 때 예수님 자신의 몸이 고문당하고 십자가에 못박히는 것이 바로 아버지 하느님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중세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에 관한 묵상이 성행했었다. 또한 성체 숭배에 관한 여러 가지 신심실천도 많았었다. 수도원에서의 묵상은 하루일과에 따라 육체의 리듬들을 존중하며 행해졌었다. 그레고리안 성가들, 특히 시편 성가들은 하느님의 말씀에 관한 묵상적 성찰에 배경을 마련해 주었었다. 또한 이 성가들은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의 내면 깊숙히 스며들 수 있도록 시간적 여유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레고리안 성가는 매우 묵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었다.

그러나 오늘날 성찬례를 거행하는 방식은, 특히 거대한 교회에서의 성찬례는 묵상이나 육체의 절제와 훈련, 그리고 삶의 의미를 총체적으로 깨닫고 실천할 여유를 마련해 주지 못한다. 오늘날의 성찬례는 깊고 인격적이며 우리 자신이 성찰할 수 있고 양성될 수 있는 사회의 변혁을 추구하는 의미로서 철저히 외적이지도 못한 것이 오늘날의 성찬례이다.

성찬례는 외형화되었고 예식화되었으나 사회 투신의 측면이 충분히 연결되지도 못한다. 어떤 이들은 영적인 것을 수동적인 것이라고 혼돈하며, 공동체적인 것을 단지 외적인 것이라고 잘못 이해하고 있다. 그런 사람들은 정의에 관한 사회정치적 투신의 영적 차원을 쉽게 이해하지 못한다. 또 개인적 성화의 사회적 요구를 알아채리지도 못한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개인 성화와 사회 투신의 양측면에서 증언적 삶을 사셨으며 이 두가지 측면과 성찬례의 연관성도 분명하게 드러내셨다. 당신 몸을 봉헌하신 것은 실제적이며 결정적인 것이다. 봉헌은 깊은 기도와 개인적 성찰로부터 이룩된 희생이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의 의미를 잘 아셨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남아서 나와 같이 깨어 있어라.... 아버지... 하시고자만 하시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니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소서...”(마태 26,28-29).

예수께서는 심각하게 성찰하시고 유대의 대제사장들과 로마권위에 도전하셨다. 또한 그분은 외적인 활동에서도 매우 집중적이었다. 이 적극적인 활동은 깊고 신중한 성찰, 기도 그리고 확신과 연결되었다. 기도 속에 결심하신후 예수는 “자 때가 왔다. 사람의 아들이 죄인들 손에 넘어가게 되었다. 일어나 가자. 나를 넘겨줄 자가 가까이 왔다”(마태 26,45-46)고 말씀 하신다.

말씀의 전례는 내적인 성찰과 사회적 투신 모두에 강력한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렇게 되기 위하여 성찬례는 예수의 공생활, 최후의 만찬 그리고 십자가의 죽음 등 모든 사건 하나하나가 깊게 연결되어 있는 예수의 삶 전체를 더 진하게 담아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 관계자들은 주일날 성찬례의 양적인 의무를 채우는 것에 만족하고 있는 것 같다. 오히려 보다 내면적인 성찰과 사회적인 투신 양 측면이 분명히 표현되고, 신자들에게 양측면이 함께 헌신할 수 있는 동기와 힘을 부여할 수 있도록 성찬례를 질적으로 강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일이라 하겠다.


[출처] 참사람되어 1996년 11월호
[원출처] <하나되어> 1988년 8월(제19호)~1989년 6월(제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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