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직을 떠나며 "솔직하게 결혼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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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직을 떠나며 "솔직하게 결혼하고 싶어요"
  • 참사람되어
  • 승인 2017.05.16 16:21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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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람되어 -14
사진출처=catholicnewsagency.com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요한 1서 4, 16)

마음 속에 묻어 둔 갈망, 그 갈망을 인정하게 되었을 때 제 삶은 바뀌었습니다.

한사람의 존재가 그 인간성의 해방을 위해서 겉으로의 원칙과 기준을 벗어던지고 생명에의 부름에 충실할 때 기존의 삶은 균열이 생기기 시작하나 봅니다.

저는 신부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닙니다. 신부가 된지 채 2년도 안되서 저는 옷을 벗었습니다. 옷을 벗게된 최우선의 이유는 “결혼하고 싶다는 저의 갈망” 때문입니다. 객관적인 기준으로 보면 실패한 신부입니다. 그리고 상식적인 차원에서도 이것은 웃기는 스캔들입니다. 여자문제로 옷을 벗게 된 신부는 대부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뻔한 사실인데 더 이상 들을 게 없다는거죠. “너도 뻔한 놈이지.”...

그러나 저는 이 뻔한 사실에서 시작해서 뻔하지 않는 사실을 말하고 싶습니다.

저는 진실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진실하지 않았다는 것이 나 자신의 탓과 함께 제도의 탓도 함께 있음을 말하고 싶습니다.

처음 영세한 후 예수님의 매력에 이끌렸습니다. 가난해진 가정에서 괴로운 마음을 털어놓을 분은 예수님 밖엔 없었습니다. 상류계급으로 가고자 하는 열일곱 살 청소년의 욕심이 현실적인 어려움에 직면했을 때 그 의기소침과 불안함을 풀 곳은 없었습니다. 권력, 부, 명예를 추구하는 것만이 최상의 삶이라 착각했던 저에겐 그것을 달성하지 못하게 되면 사람이 아니라는 놀라운 자책감에 시달렸습니다. 회개하지 않은 모습으로 신부가 되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 자체가 우선 결정적인 제 문제였습니다. 삶의 방향이 진실에 근거한 것이 아닌 채 신학교에 입학한 것이 잘못이었습니다.

저는 유치원에 다닐 때부터 결혼하고 싶었습니다. 한 여인과의 애틋한 사랑을 늘 갈망해 왔습니다. 이런 저에게 독신을 요구하는 사제직은 애초부터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문화적으로 심리적으로 저에게 독신은 유연하게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올라가는 삶, 출세하는 삶, 성공하는 삶에 대한 세상의 가치관이 저의 마음과 생각에 가득차 있고 더군다나 독신은 엄두도 못낼 제가 주제파악을 너무도 뒤늦게 하게 된것입니다. 그런 제 모습이 합리화 되었다는 것 자체가 그리고 그 모습이 그냥 넘어갈 수 있었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길들여진 제가 그래도 ‘사람이 되는 길’을 배우기 시작한 곳이 신학교입니다. 신학교는 사람되는 길을 가르치는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사제 만드는 양성소'라는 정체성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사람됨에 관해 식별해주는 역할을 먼저 해야 되는 곳입니다. 이 사람이 왜 신학교에 들어왔고 과연 독신으로 살 수 있는지를 판별해야 합니다. 이 중요한 작업에서 저는 넘어 갈 수 있었습니다. 삶에 대한 두려움, 더 정확히 말하면 부유하게 못 살게될까봐 갖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이런 모든 더렵혀진 마음을 갖고도 하느님은 좋은 것을 창조하신다는 것입니다. 신학교 생활속에서 ‘가난하고 부수어진 사람들’과의 만남속에서 저는 사람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삶에서 복음대로 살아가려는 소수의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살아계신 하느님을 조금이나마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신부생활 2년여를 하는 동안 신자들에게 해방감을 줄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조금씩 회개해 나아가는 그런 삶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은 “참”이십니다. 거짓은 그분에게 통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사람도 “참”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을 때 “참”이신 하느님을 도저히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참이란 세상의 기준이나 원칙 그리고 겉으로의 참이 아니라 존재의 참, 생긴 그대로의 “참”입니다.

저는 알았습니다. 이 “참”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세상의 껍데기가 엄청나게 두껍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이란 범주에 교회도 속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성령의 교회말고 제도로서의 교회 말입니다. 제도교회도 자본주의적인 세상의 기준에 너무나 오염되었다는 뜻입니다. ‘질보다는 양에 치중하는 모습’, 부수어짐 보다는 안정과 발전을 따르는 태도 말입니다.

사진출처=like-distant-thunder.tumblr.com

이제와 생각하니, 신학교에 100명이 들어왔다가 한 명이나 두 명이 신부 되면 족하다는 생각입니다. 정말로 예수님을 맛들이고 복음대로 사는 사람이 하나라도 나오면 된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저 같은 사람도 주제파악을 빨리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에게 중요한 것은 ‘모든 사람의 해방’이지 교회 유지를 위한 신부들이 많아지는 것이 아니니까요!

어설픈 회개였지만 사제로서 분명히 살아야겠다는 생각은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체험을 고맙게도 하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그리고 세상의 가치관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으니 말입니다.

지금도 저에게 살 힘이 생기는 때를 보면 두손을 내밀고 온 몸을 맡기고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화되기 위한 처절하고도 애틋한 기도의 때입니다. 그리고 사제직을 그만 두게 된 것도 사람을 해방시키고자 하시는 예수님에게 매달리면서 마음속에서 울려나오는 하느님의 진실 때문이었습니다.

그 하느님의 진실은 ‘네가 자유롭게 사람답게 살려면 네 속의 거짓을 드러내고 너에게 솔직해지고 그리고 복음에로 방향전환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더이상 존재로서의 공허함에 시달리지 말고 안전이나 안락함을 버리고, 비록 깨지는 것이고 불안정에로 들어가는 것일지라도 네가 원하는 것을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잘못된 구조나 제도를 변화시키는 것은 새로운 정신으로 변화된 사람들의 삶입니다. 파국으로 가는 제도를 한번에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제도에 ‘아니오’ 하고 말하는 사람이 그 톱니바퀴를 멈추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첫단추를 잘못 끼게 만드는 제도라면 또 그 제도 아래서 첫단추를 잘못 끼었다면 처음부터 다시 단추를 맞추는 것이 진실이 아닐까요?

처음부터 단추를 새롭게 맞추기 위해선 용기와 믿음과 희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신비와 나도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는 자존심입니다. 예, 그렇습니다. 그것이 자존심입니다. 생존에의 불안, 지위와 명예에 대한 흔들림, 다른 사람들의 눈 이런 것들은 껍데기들입니다.

저에게도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신부 옷을 벗기까진 말입니다. 수많은 밤을 예수님께 매달렸습니다. 두려웠습니다. 사랑(여인과 함께)도 하고 멋진 사제생활도 하고 그 둘을 함께 하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다 거짓이었습니다. 정말로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소유를 버리고 진실을 택하는 용기 말입니다. 처음 신학교를 들어가기 전의 갈등의 상황을 비로소 정직하게 대면하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벗, 그리고 우아한 사람들의 가난함이 저를 용기있는 선택의 길로 가게 했습니다. 즉 저도 제 마음에서 결혼하고 싶다고 그것을 예수님이 원하신다고 인정하게 되었고 그래서 빌었습니다. ‘가난한 마음으로 살게 해주세요.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시기에 구체적인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그 사람과 몇개월 만나기 시작했고 급기야 모든 것을 놓고 그 사람을 선택해야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선택했습니다.

고백하건대 신부를 그만두는 데 가장 큰 거부감은 안정과 지위의 파고에 대한 두려움이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제 마음속의 진실은 그랬습니다.

그런데 사제생활을 그만두는 날 저는 현실적인 방비책들은 아무것도 없었지만 날아갈듯이 기뻤으며 해방감이 흘러 넘쳤습니다.

그러나 저희 집은 너무도 가난했습니다. 그리고 저도 그 어떤 재산도 없었습니다. 이젠 명예도 없습니다(원래 사제직은 명예가 아니지만요). 그때부터 저는 참으로 현실과 복음의 사이에서 갈등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과의 관계에서도 제 안에선 참으로 소유와 출세와 현실의 갈등이 실감났습니다. 어느땐 정신이 돌 정도로 고통스러웠습니다. 절망이 넘쳐 흘렀습니다.

그 때 비로서 외쳤습니다. 힘이 듭니다.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피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가난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드는 것인지 알았습니다. 이제 저는 시작입니다. 껍데기로 살 것인가 아니면 진실을 쫓을 것인가가 아주 현실적인 문제가 된 것입니다.

늘 그랬듯이 이렇게 부수어지고 깨지는 상태속에선, 정말로 현실적인 도움이 전혀 없을 때엔 철저히 하느님께만 의지하든가 아니면 세상의 기준에 따르든가 둘 중의 하나만이 남습니다.

저는 분명히 체험했습니다. “하느님을 믿어라. 그래야 산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살겠습니다. 그리고 이런 성찰의 작업을 계속하겠습니다. 


<참사람되어> 1994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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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ㅇㅇ 2019-05-02 21:05:01
음 성공회 신부님이 되셨다면 결혼 사제생활 을 병횡할수 있었을텐데 음 아쉽습니다

현민수 2019-04-15 09:05:45
신부도 사람입니다.
그리고 결혼하고 싶은 장애인도 사람입니다.
개신교로 오시지요?

김김용 2017-05-18 12:56:48
결혼생활 10년이면 자연스럽게 성직자가 됩니다. 너무 고통받지 마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