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겨울, 다가오는 신비

엘리자베스 A. 존슨의 <신은 낙원에 머물지 않는다> 강독-2

2016-12-08     한상봉

점점 커지는 신비..."교회는 장례식을 준비하라"

과학과 민주주의, 심리학의 발전은 니체가 어느 미치광이의 입을 통해 “하느님은 죽었다...우리가 그를 죽인 것이다. 교회는 장례식을 시작하라”고 말한 것처럼 세속화를 진행시켰다. 루트비히 포이에르 바흐는 인간이 자신의 힘보다 뚜렷하게 더 나은 존재로 상상해 낸 투영물이 하느님이라고 했다. 결국 하느님이 인류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인류가 하느님을 상상력으로 창조했다는 것이다.

칼 맑스는 종교가 정의롭지 못한 세상의 고통 속에서 천국의 보상을 약속하는 진통제를 줄 뿐이라며,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고 폄하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인생의 환란에서 우리를 보호해주는 강력한 아버지의 형상에 투영된 환영이 하느님에 대한 욕망이라고 표현했다. 성숙한 인간이라면 이런 환상을 걷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한스 큉은 이전 세계가 “작은 세상에서 큰 교회를 소유”했다면, 지금은 “훨씬 큰 세계의 작은 교회”가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이제 교회와 신자들은 넓은 문화에 소수로 흩어져 있는 자신들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모든 현상을 경험적으로 설명하는 과학의 능력은 세계를 하느님이 없는 것처럼 만들었으며, 자연을 이성적으로 다스리고 정복하는 인간의 능력은 일상세계를 더욱 세속화 시켰다. 이제 신앙이 세상에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는 ‘신앙의 무풍지대’가 시작되었다. 인간은 더 이상 사회적 관습이나 물려받은 유산에 따라 신앙인이 될 수 없다. 여기서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개인적 결단, 즉 마음의 변화를 얻고, 오랜 헌신을 감수하는 결단”을 요구한다.

교회의 겨울, 헌신과 믿음의 무성한 열매는 떨어지고

이를 두고 칼 라너는 “겨울 같은 나날”이라고 했다. 문화에서 그리스도교가 지배적이었던 계절에 번성했던 헌신과 믿음의 무성한 잎과 열매들은 이제 떨어져버렸다. 나무는 헐벗고 찬바람이 불어온다. 그런 계절에 믿음은 기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마치 무성한 여름에 하듯 힘을 주변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에 쏟아 붓는 것은 적절치 않다. 생존을 위해 신자들은 겨울의 혹한 속에서도 마음을 키우고 따뜻하게 살 수 있는 가장 깊은 신앙의 핵심으로 돌아 설 필요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단 하나의 관심사가 있을 뿐인데, 그것은 바로 ‘하느님’이다.

라너는 낡은 유신론과 독실한 믿음을 강조하는 성직자들의 강론은 종종 “마치 새가 얼어죽어 겨울 하늘에서 떨어지듯이” 힘없이 강단에서 떨어진다고 썼다. 너무 순진하고 추상적인, 그래서 우상숭배에 가까운 하느님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하느님을 인간의 경쟁자로서 타자 위에 군림하는 위대한 개인으로 설정한다면, 지금 유신론은 죽었다. 토머스 아퀴나스가 설명한 것처럼, 수세기 동안 하느님은 ‘다른 모든 원인들의 원인’이라는 식으로 설명되었지만, 이제는 다시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뭔가 더 나은 것을 열망하기 때문에 ‘질문한다.’ 우리는 호기심에 가득 차서 질문할 뿐 아니라, 자유롭게 사랑하고, 행복을 소망하며, 외로움을 알고, 의심하며, 불의에 저항하고,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계획을 세운다. 또한 책임감 있게 행동하고, 억압에 맞서 양심을 수호하며, 아름다움에 감탄하고, 죄의식을 느끼며, 즐거워하고, 죽음을 슬퍼하며, 미래를 꿈꾼다. 이 과정에서 한계를 인식하며 질문하는 순간이 이 한계를 넘어서는 순간이다. 하느님은 죽었는가, 질문하는 순간, 그 죽은 하느님은 어떤 하느님일가, 질문하는 순간 우리는 새로운 하느님에 대한 생각을 촉발시킨다. 즉, 관습적인 하느님 이미지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느님은 비행기에서 보는 수평선과도 같아서, 아무리 빠른 속도로 날아가도 창문 너머로 더 멀리 펼쳐지기에 붙잡을 수 없는 분이다. ‘신성한 신비’라고 라너가 부른 이 분은 그래서 우리가 완전히 소유할 수 없는 분이다. 우리는 어두운 실험실에서 원자를 발견하듯이 하느님을 발견할 수 없다. 그래서 아퀴나스 조차도 “우리가 하느님에게 갖는 최고의 지식은 하느님을 모른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 신앙의 놀라운 점은 영원히 이해 불가능한 그분이 이 세계와 아주 가까이 있다고 믿는 것이다.

점점 다가오는 신비: 성육신과 은총

“당신은 당신의 말을 나의 작음에 맞춰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그 말이 저의 유한하고 보잘 것 없는 거주지에 아무 것도 파괴하지 않고 들어올 수 있을 테니까요. 당신이 그런 ‘작아진’ 단어로 말한다면, 그래서 모든 것이 아니라 내가 붙잡을 수 있는 아주 간단한 것만을 말한다면, 저는 자유롭게 숨쉴 수 있을 거예요. 당신은 인간의 언어를 만들어내야 할 거예요. 그래야 제가 이해할 수 있을 테니까요. 당신의 모든 것을 말하지 마세요. 당신의 무한함을 말하지 마세요. 단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세요. 나를 향한 선하심만을 말해 주세요.”(칼 라너)

그리스도교 신앙은 이해 불가능한 하느님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범한 인간의 언어로 그렇게 ‘작아진’ 말을 한다는 것을 안다. “말씀이 우리와 함께 계셨다”(요한 1,14)는 것이다.

1세기 갈릴래아에서 유대인으로 역사적인 삶을 살고, 우리 인간의 육체적이고 심리적인 한계에 도전받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 나라를 설교하셨고, 고통당하는 이들을 치유했으며, 길 잃은 자들을 찾아다녔으며, 모든 사람들을 환대했다. 그 속에서 그분은 언제나 하느님이 무엇인지 말했는데, 그것은 “넘치는 사랑”이었다.

예루살렘 성밖에서 잔혹한 죽음의 쓴잔을 마시면서, 그는 먼지로 돌아가는 모든 연약한 피조물과 하느님의 무한한 신비 사이의 결합을 이뤄냈다. 예수의 부활로 죽음 깊이 존재하는 생명의 신비가 드러났으며, 이 희망은 모든 죽은 자와 패배한 자에게도 미래가 있음을 알려주었다.

아퀴나스가 이끈 도미니코회는 육화(성육신)의 목적은 죄로 가득찬 세계의 ‘구원’에 있다고 믿었으며, 둔스 스코투스가 이끈 프란치스코회는 육화의 동기가 ‘사랑’이었다고 전한다. 기본적으로 라너는 스코투스의 입장에서 ‘사랑의 하느님’을 지지한다.

한편 이러한 사랑의 하느님은 성령을 통하여 ‘일상의 중심’에 있게 되었다. 사랑이란 “나를 초월하는 힘”일 텐데, 그래서 신앙은 우리를 ‘급진적인 사랑’으로 인도한다. 하느님이 주시는 역동적인 사랑은 언제 어디서나 존재하며, 악의 신비보다 훨씬 강력하다. 이러한 성령은 은총으로 무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 스콜라신학에서는 이 은총이 죄와 선행에 따라 더 주어지기도 하고 덜 주어지기도 하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라너는 이 은총이 특별하고 개별적인 선물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며, 다른 사람을 돌보는 가운데, 모든 선한 비판과 신뢰, 심지어 어둠 가운데서도 사람들이 사랑하기 시작할 때 드러난다고 말한다. 우리는 다만 이 거저 주시는 은총을 거부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하느님의 은총이 철회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과 성령은 세상과 소통하려는 하느님의 또렷한 신비이다. 이런 초월적인 신성의 신비는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세계의 현실에 개입하는 존재이며, 특별히 간절한 상황에 처한 안타까운 사람들을 깊이 근심하는 존재이다.

신성한 신비 :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

하느님은 이런 선물을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언제든지 제공하신다. “하느님을 하느님이게 하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그분은 그가 가톨릭신자라서, 게다가 성직자라서, 또는 수도자라서 더 듬뿍 은총을 내어주시지 않는다.

더 이상 사람들이 관습이나 일반적 합의에 따라 신자가 되지 않는 세속화 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인가를 경험한 신비주의자가 되든가, 어떤 것도 멈춘 그(그녀)가 될 것”이라고 칼 라너는 주장했다. 여기서 신비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내어준 사랑의 행위 안에서 우리 존재의 핵심에 자리잡은 신비에 자신을 맡기고 것이다. 종교에 대한 어떤 명백한 언급이 없어도, 용감하고 열정적이며 책임감 있는 삶이 있는 곳마다 하느님은 존재한다.

교회는 단순히 개인적인 경건함이나 윤리적인 삶을 증진시키는 기구가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교회는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약속을 증명하는 신성한 곳이며, 우리의 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선물이 끊임없이 모두에게 전달됨을 세상에 알리는 모임이다. 그리고 이러한 하느님의 선물은 무조건적인 이웃사랑이라는 책임 있는 행동 속에서 확증된다.

“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마태 25,35.40)

우리는 신묘하고 신성한 신비에 휩싸여 우리의 마음을 하느님의 마음과 일치시키며, 그것은 당당한 믿음으로 가득 차 사랑스런 친절을 쏟아붓는다. 라너는 “이웃사랑은 사적이고 개인적인 관계의 영역을 벗어날 필요가 있다. 시스템이 어떻게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려진 오늘날, 사랑은 사회영역에 관한 그리스도인의 책임감에서도 명백히 드러난다”고 했다.

나뭇잎이 더 이상 경건의 나무에 무성하지 못하는 때는 겨울일 것이다. 하지만 앙상한 나뭇가지들 덕분에 우리는 숲의 더 깊은 곳을 볼 수 있다. 거기서 우리는 은혜로운 하느님의 신비를 본다. 우리는 하느님을 개념적으로나 실제적으로 다룰 수 없다. 하느님은 간구하는 존재인 우리들의 ‘어딘가’로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라너에 의하면, 우리는 작은 섬과 신묘한 바다 가운데 선택해야 한다. 우리의 약삭빠름이 거주하는 작은 오두막에서 질식할 것인지, 아니면 지식과 행위의 문을 열고 하느님을 향한 전인미답의 탐험으로 나아가 세상에서 보살피는 사랑을 실천할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오늘날 잠언의 바다 위를 나는
새는 자기 몸을 쳐서 건너간다. 자기를 매질하여 일생일대의 물 위를 날아가는 그 새는 이 바다와 닿은, 보이지 않는, 그러나 있는, 다만 머언, 또 다른 또다른 연안(沿岸)으로 가고 있다.(황지우)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