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와 조용필은 수행자

최태선 칼럼

2026-10-12     최태선

“노병은 죽기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노병, 맥아더가 고별사에서 한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사라졌습니다.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의 숙명처럼 들리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다른 인생들도 있습니다.

가장 먼저 생각나는 이는 김민기입니다. 그분은 늘 자신을 “뒷것”이라면서 자신을 가림은 물론 다른 사람들을 앞장서게 하였습니다. 저는 그것을 섬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수도 없이 많지만 그리스도교의 삶의 방식이 이 섬김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제로 그렇게 살아가는 이는 보기 어렵습니다. 그것을 김민기님이 자신의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정말 실감납니다.

무엇보다 가수였던 그분이 무대에서 노래를 부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는 사실은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본인은 자신의 톤이 너무 낮기 때문에 가수로서 적절치 않다는 말을 하지만 저는 중학교에 들어가 기타를 잡은 이후 그분의 모든 노래들 중 부르지 않은 노래가 없었습니다. 그분의 낮은 저음은 그분이 부르는 노래의 노랫말들과 너무도 어울리는, 부부로 치면 천생연분 같은 것이었습니다. 목소리가 낮아 가수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그분의 말씀은 다만 하는 말에 지나지 않습니다.

경기고의 미술반장을 하고, 서울대 미대를 다녔던 그분이 당시 공순이, 공돌이로 불리던 사람들과 어떻게 어울릴 수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렇게 우리 사회의 낮은 이들의 삶의 향상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바쳤던 다른 분들처럼 그분의 삶이 너무도 존경스러울 뿐만 아니라 놀고, 먹고, 즐기는 것에 진심이었던 제 삶이 부끄러워 고개를 들지 못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정상적인 제 젊은 날의 삶이 방탕한 삶으로 보이는 것도 그분의 삶을 보는 순간 매우 정상적인 일입니다.

그분이 몇 년 전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사라진 것일까요? 생각해보면 그분은 사라질 수 없습니다. 제가 살아있는 한 그분은 언제나 제 마음 한 편에 본으로서 혹은 지향점으로 살아있을 것입니다.

가수 가운데 제게 그런 본과 지향점으로 존재하는 또 다른 분이 있습니다. 조용필입니다. 그분은 진짜 오롯이 가수인 분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다른 가수들과 다른 가수입니다. 그분은 오로지 음악에 진심입니다. 그분은 노래 하나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그것을 위해 쉬지 않고 자신을 가다듬고 준비합니다. 국악을 배우고, 락의 창법을 새롭게 연구하고, 발라드의 창법 역시 소화하기 위해 새로운 노래를 만들고 그것을 소화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영역을 넓혀가기도 합니다. 한 마디로 노래에 진심인 가수입니다. 그분 역시 그것을 내세운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가왕'이라 부르지만 정작 자신은 스스로를 가왕으로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그것을 다만 겸손이라 부를 수 없을 정도로 그분의 삶은 치열합니다. 그런 모습에서 바울 사도의 모습이 보이는 것은 제 직업의식 탓이겠지만 그런 저의 시선은 또 다른 깨달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아직 그것을 붙들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일은 오직 한 가지입니다.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향하여 몸을 내밀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서 위로부터 부르신 그 부르심의 상을 받으려고, 목표점을 바라보고 달려가고 있습니다.“(필리 3:13-14)

한 평론가는 조용필의 시간이 거대한 서사 뒤에 숨겨진 매일의 치열한 흔적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치열한 흔적이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리고 바오로 사도가 생각났던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그러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날마다 그리스도를 좇으려고 앞으로 나아가는 삶이야말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목표가 되어야 합니다. 제가 김민기의 삶 앞에서 저의 지난 삶이 부끄러웠던 이유 역시 제 삶의 목표가 없던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평론가는 그런 조용필의 삶이 고독한 연습실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하였습니다. 실제로 그는 대중 앞에 나아와 거들먹거린 적이 없습니다. 그것이 오히려 그의 신비를 더해주었습니다. 그의 삶이 영적으로 보이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그런 신비가 더해진다면 선교의 방식 역시 많이 달라질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런 선교야말로 진정한 선교일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그런 신비가 사라진 것은 비극입니다. 사실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믿지 않던 사람들을 불러들인 이유는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신비를 보았기 때문입니다. 말하는 짐승에 불과했던 자신의 노예의 얼굴에서 발견한 평안은 자체로 신비였습니다. 노예 주인은 그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고, 복음에 매료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평론가는 조용필의 그런 고독을 말하면서 연습실의 불빛이 ‘한 분야의 장인으로서 잃지 말아야 할 품격’이라고 말하면서 그것이 한 분야의 장인의 명확한 기준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점점 더 부끄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바오로 사도처럼 그리스도인 장인이 되어야 했습니다. 제가 이 사실을 과거형으로 쓰는 이유는 오늘날 그런 그리스도인 장인들을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간혹 본질을 찾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없지는 않지만 그들 역시 그리스도인 장인이기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은 얼마나 자기 자신에게 함몰되기 쉬운 존재인지요. 조그마한 성취에도 자아도취에 빠져 갈 길을 멈추거나 그곳에 “초막”을 짓고 거들먹거리거나 그 순간을 즐기느라 가야할 길에서 벗어나버리는지요.

평론가는 그런 조용필의 삶을 묘사하면서 ‘음악 수행자’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수행자라는 말이 실감나게 다가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매순간이 수행입니다. 오래 전 영성수련자들의 모임에서 만났던 한 분이 하셨던 말이 생각납니다. 그분은 늘 그리스도인들의 ‘무소유’를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에게는 자기 명의로 된 통장 하나도 없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분은 군 출신으로 연금을 받는 분이었습니다. 그분이 하는 영성수련이 도대체 무엇인가를 생각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수행이란 경성이며 동시에 치열한 삶입니다. 그 삶에 거들먹거림이 없어야 하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런 생각을 하면 김민기나 조용필은 단순한 가수가 아니라 위대한 영적인 거장들입니다. 그리스도교의 핵심인 섬김과 치열한 삶을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가수들에게서 확인하게 되는 것은 분명 슬픈 일임에 틀림없지만 그분들을 통해 다시 옷깃을 여미게 되는 것은 슬픈 일이 아니라 다행이며 축복입니다.

이런 분들은 맥아더처럼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세상의 영웅인, 전쟁 영웅은 사라지지만 치열한 삶을 산 하느님 나라의 무명용사들인, 작은 자들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에 살아 있고, 영원한 세계에 아로새겨진 별이 됩니다. 그런 별들이 마음속에서 빛나는 한, 그리스도인들은 도시의 환한 불빛에도 길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일깨워준 두 분 가수가 고마운 주일 아침입니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종이신문<가톨릭일꾼>(무료)정기구독 신청하기
http://www.catholicworker.kr/com/kd.html

도로시데이영성센터-가톨릭일꾼후원하기
https://v3.ngocms.co.kr/system/member_signup/join_option_select_03.html?id=hva8204

유튜브 강의/한상봉TV-가톨릭일꾼
https://www.youtube.com/@tv-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