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격 없는” 이들의 수호 성인, 마리아 막달레나

조민아 칼럼

2026-10-05     조민아

마리아 막달레나만큼 신화와 과장된 서사, 왜곡으로 덧칠된 성인이 또 있을까. 한 사람의 생애가 이토록 여러 겹의 욕망과 필요에 의해 재현된 경우도 드물다. 초기 그리스도교 전승이 전하는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의 가르침을 깊이 이해한 수제자이자 예언자적 통찰을 지닌 핵심 사도이고, 때로 베드로와 공개적으로 갈등을 빚는 막강한 영적 지도자이다. 중세교회는 막달레나를 성판매 여성으로, 미치광이로, 회개한 죄인으로 기억했다. 남성들의 환상과 교회의 이미지 구축이 빚어낸 이 모습은 여성을 결함있고 의존적인 존재로 간주하는 오랜 통념을 떠받치는 데 활용되었다. 20세기 후반 여성신학자들의 끈질긴 복원 작업을 통해서야, 마리아 막달레나는 비로소 부활의 첫 증언자이자 ‘사도들의 사도’라는 본래의 자리를 되찾기 시작했다.

이 복원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이 글에서 나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막달레나 성인의 중요성을 톺아 보려 한다. 성인에게 씌워진 의미들 못지않게, 그 의미를 교정하고 복원하는 과정이 보여주는 문제점 또한 살펴보고 싶기 때문이다. 내가 다시 생각해 보고 싶은 것은 가부장적 시각뿐 아니라, 이를 비판하는 해방신학과 여성신학의 해석마저 은연중 공유하고 있는 전제, 곧 “누가 존경받을 자격이 있고 누가 없는가, 누가 구원받을 만하고 누가 그렇지 못한가”를 끊임없이 가르는 ‘자격’의 프레임이다.

 

Guido

중세시대 막달레나 내러티브의 전유

대중의 기억 속에 각인 된 ‘회개한 창녀’ 막달레나 서사가 정작 성서적 근거가 전혀 없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이 이미지는 591년,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막달레나를 베타니아의 마리아 및 이름 없는 죄인 여성과 한데 뒤섞어 설교한 데서 비롯되었다. 1518년, 프랑스의 인문주의자 자크 르페브르 데타플(Jacques Lefèvre d’Étaples)이 문제를 제기하기 전까지 오랜 시간 이 서사가 통용되었던 배경에는 막달레나 성인의 증언과 영향력을 사소하고 감정적인 것으로 깎아내리려는 의도 외에 또 다른 목적이 있었다.

중세 교회는 막달레나의 성적인 죄를 부각시키고 참회 과정을 강조함으로써 도리어 그녀의 성인됨을 드높였다. 막달레나의 참회와 고행, 그에 따른 구원이 어떻게 묘사되었는지는, 13세기의 성인전인 야코부스 데 보라지네(Jacobus de Voragine, 1228/1229~1298/1299)의 <황금 전설>(Legenda aurea)에 잘 드러난다. 여기서 막달레나는 영지 막달룸(Magdalum)에서 부와 미모를 쾌락에 탕진해 본명 대신 ‘죄인’으로 불리던 귀족 여성이다. 예수를 만나 일곱 귀신에서 풀려난 그녀는 부활을 가장 먼저 목격한 증언자가 되었고, 이후 프랑스의 마르세유로 건너가 복음을 전한 뒤 삼십 년을 사막에 은둔하며 관상에 잠겼다.

<황금 전설>은 죄인이 뼈를 깎는 회개와 고행을 통해 거룩한 성녀로 변모하여 그리스도와의 합일에 이르는 과정을 극적으로 묘사한다. 중세 교회는 이 전설에 기반하여 막달레나가 철저한 회개와 고행으로 모든 불순물을 씻어내고 ‘진노의 그릇’에서 ‘영광의 그릇’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가르쳤다. 또한 회개 이전의 삶을 척박한 황무지에, 회개 이후 정결을 굳게 지킨 상태를 ‘생명력과 향기가 넘치는 봉인된 정원’에 빗대기도 했다. 그리하여 한때 “창녀”로 묘사되던 막달레나가 성인 호칭 기도에서 동정녀들의 맨 앞자리를 차지하는 역설이 빚어진다.

이 서사는 중세의 여성 참회자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막달레나가 완벽한 참회를 통해 육체가 아닌 영혼의 동정성을 되찾았다면, 육체적 순결을 잃은 여성에게도 천국의 높은 자리가 열려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동정녀가 아닌 이는 천국에서 더 낮은 보상을 받는다고 가르치던 교리 아래에서, 기혼 여성과 과부들은 막달레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희망을 길어 올렸다. 결과적으로 막달레나는 중세 후기 여성의 지위에 있어 상반된 두 가지 가능성을 동시에 열어 놓았다. 한편으로 참회자들은 그녀를 본받아, 성적 지위에 따라 여성을 차별하던 교회의 위계를 흔들고 자신들도 천국의 높은 자리와 동정녀의 영광을 누릴 권리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육체를 부정함으로써만 거룩함에 이른다는 가부장적 영육 이원론을 한층 더 단단히 굳혔고, 여성의 구원이란 오직 고행으로 육의 욕망을 끊어 낼 때 비로소 가능하다는 인식을 강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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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반 이후: 대중문화 속 막달레나와 여성신학적 전유

20세기 중반에 이르러, 막달레나의 이야기를 다시 전유하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그중에서도 <다빈치 코드>로 대표되는 대중문화의 방식은 자못 흥미롭다. 댄 브라운의 이 소설은 막달레나를 예수의 배우자이자 예수의 혈통을 잉태한 “살아 있는 성배”로 제시한다. 소설은 그렇게 잊혀진 여성의 역사를 복원하는 듯한 서사를 빚어내지만, 막달레나의 중요성을 그녀의 제자도, 영적 지도력 때문이 아니라 예수의 아내이자 아이의 어머니라는 역할로 구성함으로써, 여성을 여전히 결혼과 출산의 틀 안에 가두어 두는 가부장적 프레임을 반복한다.

마리아 막달레나를 여성신학의 시각으로 다시 읽으려는 시도는 197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엘리사베스 쉬슬러 피오렌자 (Elisabeth Schüssler Fiorenza)는 1974년 소논문 「마리아 막달레나, 사도들의 사도」로 시작해, 1983년의 <그女를기억하며>를 비롯한 많은 저작들에서 막달레나의 중요성을 정교한 이론 틀로 확장했다. 쉬슬러 피오렌자의 핵심 논제는, 초기 예수 운동이 본래 ‘동등한 자들의 제자도’(discipleship of equals)였으며, 신약 정경의 남성 중심적 편집 과정이 여성 제자들의 역할을 조직적으로 축소해 왔다는 것이다.

이 작업이 열어 놓은 해석학적 공간 위에서, 캐런 L. 킹(Karen L. King)은 1,500여 년간 묻혀 있던 <마리아 복음서>를 여성신학적으로 독해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03년 저서 <마리아 막달레나의 복음: 예수와 최초의 여성사도>는 이 비정경 복음서 주석을 통해, 부활한 예수에게서 독자적인 계시를 받은 막달레나가 영적 권위자로 부상하는 과정에서 베드로가 이에 반발하는 서사 구조를 드러내어,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 내부의 여성 지도력을 둘러싼 논쟁의 흔적을 읽어 냈다.

앤 그레이엄 브록(Ann Graham Brock)은 <마리아 막달레나: 최초의 사도>(2003)에서 이 문제를 텍스트 전승사의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브록은 정경과 외경, 교부 문헌을 가로지르며 마리아 막달레나의 사도적 권위가 세기를 거듭할수록 체계적으로 축소되고, 그 자리를 베드로의 권위로 채운 과정을 실증적으로 추적하였다. 이는 정경화가 단순한 텍스트 선별이 아니라 젠더 정치가 작동하는 권위 투쟁이었음을 보여준다.

제인 셰이버그(Jane Schaberg)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부활>(2002)에서 정경 복음서와 외경, 영지주의 문헌, 그리고 후대의 전설을 두루 분석하면서, 마리아 막달레나가 ‘회개한 창녀’로 기억되는 패턴이 곧 ‘권력 있는 여성이 무력화되어 창녀 혹은 창녀 같은 존재로 기억되는’ 가부장제의 반복적 메커니즘임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이러한 선구적인 연구를 이어가는 전통은 최근에도 활발히 이어지고 있다.

이 작업들의 의의는 한 성서 인물의 ‘복권’에 그치지 않는다. 정경이라는 제도 자체가 역사적 구성물이며 그 구성에 젠더 권력이 깊숙이 개입했음을 드러냄으로써, 이들은 성서 해석학의 전제 자체를 문제 삼았다. 나아가 과거를 교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오늘의 교회론, 특히 여성 사제서품과 사목 권위의 문제에도 질문을 던진다. 물론 여성신학적 접근들 사이에도 긴장은 있다. 쉬슬러 피오렌자, 킹과 셰이버그와 같이 원자료의 엄밀한 독해에 기반하는 접근도 있지만, 막달레나를 ‘신성한 여성성’의 화신으로 신화화하는 경향도 있으며, 같은 여성신학적 작업이라 해도 둘 사이의 거리는 멀다. 그럼에도 이들이 공유하는 통찰, 곧 텍스트의 침묵과 왜곡 뒤에 가려진 여성들의 목소리를 복원하는 일이 곧 역사학이자 신학이라는 주장은 그리스도교 기원 이해의 지형을 바꾸어 놓았다.

“그녀는 창녀가 아니었다”: 막달레나 성인 복권의 그늘

앞서 살펴본 여성신학의 작업들은 막달레나를 둘러싼 왜곡의 역사를 들추어내고, 사도적 권위를 지닌 여성 지도자로서 그녀의 위상을 복원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 학문적 정당성과 해방적 가치는 의심할 여지가 없지만, 이 복권의 서사에는 좀처럼 검토되지 않은 전제가 있다. 복권이 작동하는 방식, 더 정확히 말하면 복권이 설득력을 얻는 방식에 관한 것이다.

막달레나 성인 복권 작업에서 확인되는 핵심 명제는‘마리아 막달레나는 창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창녀가 아니었다’는 선언이 해방의 언어로 힘을 얻는 까닭은, 바로 그 뒤에 발설되지 않는 한 문장, 즉, ‘그러니 그녀는 존경받을 자격이 있다’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복권이 성립하려면, ‘창녀가 아님’을 우선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이 논리는 ‘창녀’와 ‘사도’를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범주로 갈라놓는다. 사도이려면 성판매 여성이 아니어야 하고, 성판매 여성의 전력이 있다면 사도일 수 없다. 그리고 이 구도가 되풀이될수록, 그 안에서는 ‘자격 있는 여성’과 ‘자격 없는 여성’을 가르는 오래된 차별이 되살아난다.

막달레나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왜곡된 사실을 벗겨 내는 일은, 그 자체로는 정당한 역사적 교정이다. 그러나 이 교정이 ‘성판매 여성이었다면 그런 위상은 애초에 불가능했으리라’는 전제 위에 서 있는 한, 복권은 한쪽을 들어올리는 동시에 다른 한쪽을 정죄하는 행위가 되고 만다.

그리스도교 전통 안에는 이집트의 성녀 마리아(St. Mary of Egypt)처럼 한때 성을 팔던 여성이 성인으로 공경받는 사례가 존재한다. 성판매의 이력이 성인됨(sainthood)을 원천적으로 가로막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교회의 전통이 이미 증언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막달레나의 복권은 여성신학자들에게조차 ‘그녀는 창녀가 아니었다’를 증명하는 전제가 중요하다. 복권의 수사가 성판매 여성들을 구원받을 자격이 없는 죄인으로 묘사하는 차별의 이데올로기에 기대어 있다면, 우리는 해방의 담론 속에서 억압의 논리가 되살아나는 장면을 목격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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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 있는 이와 자격 없는 이: 신학적 물음

‘자격 있는 이’와 ‘자격 없는 이’를 가르는 논리는 성서 해석의 역사 안에도 깊이 뿌리내려 있다. 레이첼 뮤어스(Rachel Muers)는 “가난한 이들은 늘 너희 곁에 있다”(마태 26,11)는 구절이 가난을 신의 섭리 안에서 불가피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데 거듭 동원되었고, 그 과정에서 가난한 이들을 두 부류로 나누었다고 주장한다. 곧, 경건하고 근면하며 제 처지를 겸허히 받아들이는 ‘자격 있는 빈자(deserving poor)’와, 게으르고 부도덕하여 스스로 가난을 자초한 ‘자격 없는 빈자(undeserving poor)’이다. 가난하지 않은 이들이 가난한 이들의 삶을 내려다보며 심판하는 “비대칭적 도덕화”(asymmetrical moralization)가 다름 아닌 성서 해석을 통해 정당화되어 온 것이다.

이러한 도덕적 판단에는 물론 사회적 편견이 반영되어 있다. ‘자격 있음’과 ‘자격 없음’을 가르는 경계선은, 인종, 젠더, 계급, 가족 구조라는 사회에 이미 존재하는 불평등의 축을 따라 그어지기 때문이다. 똑같은 빈곤에 처한 사람이라도 사회의 “주류”로 구분되는 규범에서 벗어날수록 ‘자격 없는 빈자’로 분류될 가능성이 크다. 수십 년에 걸친 미국 복지 지출의 흐름은 이 분류가 실제 정책의 결과로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복지 지출 총량은 꾸준히 늘었지만 그 혜택은 백인 노인, 기혼 부모 가구와 시스템에 등록된 장애인 가구에 집중되었고, 싱글맘과 유색인 극빈층을 향한 지원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성적, 도덕적으로 무책임하며 게으르다는 편견이 반영된 것이다. 불평등한 사회구조와 차별은 이렇듯 자격이 있는가 없는가의 기준을 세우고 이를 도덕과 윤리의 언어로 번역한다.

그렇다면 이 ‘자격’의 논리가 신학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가톨릭일꾼’의 창립자 도로시 데이(Dorothy Day)는 “복음은 자격 있는 가난한 이와 자격 없는 가난한 이를 구별할 권리를 우리에게서 영원히 빼앗는다”고 말했다. 그리스도교가 은총(grace)이라는 이름으로 고백해 온 것은, 바로 이 ‘자격의 논리’가 멈추는 자리에서 시작된다. 은총은 자격이 있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어지는 것이다. 자격을 따지는 순간 은총은 보상이 되고, 보상이 되는 은총은 더 이상 은총이 아니다. 예수는 굶주린 이, 목마른 이, 헐벗은 이, 감옥에 갇힌 이를 하느님나라로 초대하며, 그가 게을러 굶주리는지, 부도덕하여 갇혔는지, 방탕하여 헐벗었는지 묻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 곧 나에게 해 주지 않은 것이다.”(마태 25,45)라고 선언한다. 따라서 ‘막달레나가 존경받을 만한 까닭은 그녀가 창녀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암묵의 전제는, 은총이 무조건적이라는 복음의 핵심을 거스른다.

성매매와 교회—정죄와 관용 사이의 역사

‘자격 없음’과 ‘자격 있음’을 가르는 잣대는 개인의 도덕적 선택에만 집중할 뿐, 정작 그 가난을 빚어내는 사회구조는 좀처럼 보지 않는다. 한국의 미군 기지촌 역사는 성노동이 국가와 가부장적 사회가 결탁한 구조의 문제임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한국전쟁 이후 기지촌을 향한 여성들은 대부분 빈곤 때문에 사회의 변두리로 몰려난 여성들이었다. 국가는 성병 관리를 명목으로 이들의 신체를 직접 관리하고 통제했고, 그 과정에서 여성의 몸은 국가안보와 달러벌이를 위해 동원되는 자원이 되었다. 이나영의 표현을 빌리면, 이들은‘양공주’로 호명되어 ‘일반인’과 분리된 존재론적 타자였다.

1990년대 들어 한국 여성들이 떠난 자리는 E-6비자, 이른바‘준연예인 비자’로 입국한 필리핀·러시아 이주 여성들로 채워졌다.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성매매에 내몰린 외국인 여성노동자들에게 국가는 비자를 내주고도 보호의 책임은 지지 않는다. 이들의 이야기는 성매매가 개인의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국가와 자본, 군사주의와 이주 체제가 함께 빚어낸 구조적 산물임을 증언한다. 해방신학은 이러한 사회적 폭력과 방기를 ‘구조적 죄’로 불러 왔다. 죄는 개인의 행위만이 아니라 불의를 영속시키는 사회구조 그 자체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회개해야 할 것은 성을 파는 여성 개인이 아니라, 특정한 여성들을 거듭 그 자리로 내모는 구조임에도, “자격” 논리는 개인에게 회개를 다그치면서 정작 구조는 방치하여 구조적 죄를 영속화한다.

흥미로운 것은, 교회가 성매매를 늘 한결같이 정죄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아우구스티누스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성매매를 사회 질서를 위해 허용할 수밖에 없는‘필요악’으로 규정해 왔다. 영국에서는 가톨릭교회가 성매매를 묵인하는 것을 넘어 윈체스터 주교 관할권에 있던 매춘업소에 면허를 내주고 세금을 거두어들인 예도 있다. 교회와 국가는 성판매 여성들을 정죄하면서도 ‘품위 있는’ 여성들을 지키는 방파제로 이용했던 것이다.

성매매가 “범죄화”되기 시작한 것은 자본주의가 형성되면서부터다. 교회와 국가는 여성을 핵가족 안의 무급 재생산 노동에 묶어 두기 위해 여성의 몸을 더 엄격히 단속하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가부장제 울타리 밖으로 쫓겨난 수많은 빈곤층 여성들은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지하에 숨어 음성적으로 성을 팔게 되었다. 따라서 성판매 여성들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취약한 존재가 되었고, 거대한 성 산업의 착취 구조가 완성되었다. 여기서 드러나는 것은, 성매매를 대하는 교회의 태도가 도덕적으로 일관되지 않고 시대의 필요에 따른 실용적 타협을 번복해 왔으며, 구조적인 죄를 양산하는데 교회 또한 일조해 왔다는 사실이다.

자격 없는 이들의 성인

그렇다면 마리아 막달레나의 이야기는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작고한 아르헨티나의 여성신학자 마르셀라 알타우스-리드(Marcella Althaus-Reid)의 작업은 이 물음에 하나의 대안을 제시한다. 그는 <외설스러운 신학>(Indecent Theology)에서 여성주의 해방신학에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해방신학은 가난한 이들의 목소리를 전하고 연대해 왔지만, 그 과정에서 가난한 이들을 늘 ‘품위 있는(decent)’ 주체로 재현하게 되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해방신학 속 가난한 이들은 “거룩한 혼인성사로 맺어진 단혼의 이성애 배우자, 신앙과 투쟁의 사람들”로 그려진다. 해방의 대상이 되려면 먼저 도덕적으로 ‘품위 있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이 전제는 다양한 이유로 도덕적인 규범을 벗어나 살아가는 가난한 이들을 해방의 서사가 닿지 못하는 외곽에 남겨둔다.

알타우스-리드에 따르면 “여성주의 해방신학과 ‘외설스러운 신학’ 사이의 간극은 곧 성적 정직성(sexual honesty)의 간극”이다. 해방신학은 그 급진성과 전복 가능성이 권력 구조에 받아들여질 만한 것이 되는 순간 해방의 잠재력이 줄어들기에, 아직 드러나지 않은 억압의 요소를 끊임없이 다시 캐물어야 한다. 복음의 해방성은 가난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보편과 규범의 승인을 받아 존경의 대상이 된 성인들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가난과 성과 노동이 뒤엉킨 구체적 현실 속에서 외설스럽고 음란하다는 낙인이 찍힌 채 살아가는 이들을 배제하지 않는다. 하느님 나라는 알타우스-리드가 묘사한 부에노스아이레스의 거리에서 속옷도 입지 않은 채 레몬을 파는 여성 행상들도, 한국 기지촌의 외국인 성판매 여성들도 모두 가족으로 환대한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자격 없는 이들의 수호 성인’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녀가 창녀가 아니었음이 증명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녀가 살아 낸 삶의 자리, 즉 귀신이 들렸다고 불리던 고통의 자리, 남성 제자들에게 권위를 부정당하던 자리, 후대의 교회에 의해 창녀와 광인으로 낙인찍히던 그 자리 자체가 이미 하나의 증언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자리에서 그녀가 부활의 첫 목격자가 되었다는 복음의 메시지는, 사회적 자격 논란으로 검증되거나 무효화될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다. 증언이란 자격 있는 자에게만 허락된 특권이 아니라, 삶의 한복판에서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느낀 진실을 전하는 행위인 까닭이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막달레나를 자격 있는 자들의 반열로 끌어올리는 일이 아니라, 자격 없다 여겨지는 이들의 자리로 내려가 그들의 삶 안에서 ‘자격 없음’을 만들어 내는 구조를 증언하는 일일 것이다. 오늘날 빈곤과 글로벌 자본주의, 젠더 불평등, 이주 체제의 폭력, 군사주의 등 억압의 구조 속에서 사회의 외곽으로 밀려나 “자격 없는 죄인”으로 치부 당하고 있는 모든 여성과 남성, 성소수자들의 삶이 놓은 자리 말이다.

 

조민아
미국 조지타운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