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도 내가면에서 참나를 묻다
조광호 신부의 동검도 이야기
1. 강화 내가면에서 만난 ‘내가’
한강과 임진강과 예성강의 물길이 서해로 흘러드는 강화. 저녁이면 강과 바다가 만나는 물 위로 빛이 길게 번진다. 그래서 ‘강화’는 이름 그대로 강물이 빛나는 곳이다. 그 강화에 ‘내가면’이라는 재미있는 지명이 있다.
내가면에 가면 내가성당이 있고, 내가통닭이 있고, 거리에는 ‘내가’라는 글자가 붙은 간판들이 눈에 들어온다. 처음에는 그저 재미있다. “내가 성당.” “내가 통닭.” 그러나 그 두 글자를 자꾸 바라보고 있으면 웃음 끝에서 조금 묵직한 질문 하나가 따라온다. 나는 평생 얼마나 많은 ‘내가’를 붙이고 살아왔는가.
내가 신부다. 내가 목사다. 내가 누구 아들이다. 내가 장관이다. 내가교수다. 내가 검사다. 내가 대통령이다. 내가 주교다. 내가 수도원장이다. 내가 아빠스다.
우리는 이름 앞에 직책을 붙이고, 그 직책 앞에 다시 ‘내가’를 붙인다. 처음에는 단순히 맡은 일을 설명하는 말이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 말이 사람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는다. 내가 그 일을 맡았다는 사실과, 그 자리가 곧 나 자신이라는 착각 사이에는 아주 짧은 거리가 있다.
2. 세상의 많은 불행은 ‘내 것’이라는 착각에서 시작된다
인간은 이상하게도 오래 가지고 있으면 그것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다. 자리도 그렇고, 재산도 그렇고, 권력도 그렇고, 지식도 그렇다. 처음에는 맡았을 뿐인데 오래 쥐고 있으면 소유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조금씩 말이 달라진다. “내게 맡겨졌다”가 “내 것이다”가 되고, “내가 책임져야 한다”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로 변한다. 바로 그 자리에서 독선과 독단이 시작된다.
권력을 자기 것이라고 믿으면 사람을 지배하려 하고, 지식을 자기 것이라고 믿으면 남을 무시하며, 재산을 자기 것이라고 믿으면 움켜쥐게 된다. 심지어 신앙도 그렇다.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어느 순간 하느님까지 나의 확신 속에 가두어 버릴 수 있다. 그래서 엑하르트는 *자신이 하느님 마저 놓아 주실 수 있도록 기도했다.
“내 생각이 옳다.” “내 판단이 옳다.” “하느님도 당연히 내 편일 것이다.” 인간의 교만은 어쩌면 거창한 데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다. 아주 작은 한마디, “내 것이다.” 그 말에서 시작된다.
3. 사실 우리 것은 거의 없다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면 이상한 사실을 발견한다. 우리가 ‘내 것’이라고 부르는 것 가운데 정말 내가 만든 것은 거의 없다. 생명을 내가 만들지 않았다. 몸도 내가 선택하지 않았다. 부모도, 시대도, 태어난 장소도 내가 결정하지 않았다. 재능도 받았고, 배울 기회도 받았으며,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여기까지 왔다. 지식조차 그러하다.
평생 책을 읽고 공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하더라도, 그 지식 대부분은 누군가가 먼저 생각하고 기록해 놓은 것을 전해 받은 것이다. 재산도 온전히 나 혼자의 힘으로 만든 것은 아니다. 그래서 엄밀한 의미에서 흔히 쓰는 '자수성가'란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나를 가르친 사람, 함께 일한 사람, 사회의 제도, 시대의 조건, 수많은 관계가 그 안에 들어 있다.
성경에서 아브라함이 받은 축복도 그 한 사람에게 머물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를 통하여 다른 이들이 복을 받게 하기 위한 축복이었다. 그래서 축복의 본질은 소유가 아니라 흐름이다. 재산도 흘러야 하고, 지식도 흘러야 하고, 권력도 봉사로 흘러야 한다.
재능도 나를 드러내는 장식이 아니라 누군가를 살리는 통로가 되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맡기시는 것은 그것을 움켜쥐라고 주시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하여 열매를 맺으라고 주시는 것이다.
4. 포도밭의 소작인은 언제 주인이 되었는가
복음의 포도밭 비유는 바로 이 인간의 착각을 들여다보게 한다. 주인은 포도밭을 일구었다. 울타리를 둘렀고, 포도 확을 팠으며, 탑을 세웠다. 그리고 그것을 소작인들에게 맡겼다. 모든 것은 처음부터 주인의 것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르면서 소작인들은 이상한 착각에 빠졌다. 맡겨진 포도밭을 자기들의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래서 주인이 종을 보내자 때리고 죽였다. 마침내 아들을 보냈을 때 그들은 말한다. “저자가 상속자다. 죽여 버리고 우리가 그의 상속 재산을 차지하자.”
이 복음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살인만이 아니다. 살인보다 먼저 일어난 일이 있다. 소작인이 자신을 주인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모든 악은 그 착각 뒤에 따라왔다.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다. 이 몸도 포도밭이고, 내게 주어진 시간도 포도밭이며, 직책과 재산과 재능도 포도밭이다.
가족도, 공동체도, 교회도 결국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잠시 돌보도록 맡겨진 포도밭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질문은 “얼마나 가졌는가?”가 아니다. “내게 맡겨진 것으로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이다.
5. 수행은 ‘내가’를 벗는 일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의 수행도 아주 먼 데 있는 것이 아닌 듯하다. 평생 자기 위에 덧씌워 온 수많은 ‘나’를 하나씩 벗어내는 일이다. 직책이라는 나, 재산이라는 나, 명예라는 나, 지식이라는 나. 남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선으로 만들어진 나, 내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이미지 속의 나까지 하나씩 벗어 내는 것이다. 그때 비로소 묻게 된다. “이 모든 이름과 직책을 벗고 나면 나는 누구인가.”
수행은 새로운 것을 하나 더 얻는 일이 아니라, 어쩌면 내가 아니었던 것을 하나씩 내려놓는 일인지도 모른다. 깨달음 역시 무엇인가 특별한 능력을 얻는 것이 아니라, 평생 ‘나’라고 믿었던 것들을 벗겨 낸 뒤 남아 있는 존재를 조용히 바라보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그 마지막 자리는 혼자 발견한 자아에 머물지 않는다.
모든 것을 벗은 나는 마침내 하느님 앞에 선 나를 만난다. 직책 이전의 나, 성공과 실패 이전의 나, 칭찬과 비난 이전의 나. 아무것도 내세울 것이 없어도 하느님께서 이미 사랑하신 나. 그것이 가장 깊은 나일 것이다. 그래서 신앙과 수행은 결국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와 마주하게 된다. 발가벗은 나(Nuda essentia!). 벌거벗은 본질을 만나는 것이 될 것이다.
내가면을 지나며 다시 ‘내가’라는 두 글자를 생각한다. 평생 우리는 ‘내가’를 세우며 살지만, 마지막에는 그 ‘내가’마저 내려놓고 떠난다. 직책도 남겨 두고, 재산도 남겨 두고, 명예도 남겨 두고, 마지막에는 몸마저 내려놓는다. 결국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하나, 내게 맡겨진 포도밭에서 어떤 열매를 맺었는가. 그것만 남는다. 그래서 오늘 나는 다시 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주인처럼 살았는가, 맡은 사람으로 살았는가. 움켜쥐었는가, 흘려보냈는가. ‘내가’를 키웠는가, 사랑의 열매를 키웠는가. 그리고 언젠가 모든 이름을 벗고 하느님 앞에 서는 날, 조용히 이렇게 말할 수 있기를 기도드린다.
“주님, 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모두 당신께 받은 것이었습니다. 다만 제가 받은 것으로 조금 사랑했고, 조금 나누었으며, 작은 열매 몇 송이를 맺었습니다. 이제 그것마저 당신께 돌려드립니다.”
Totus tuus!
“모든 것이 당신의 것입니다."
조광호 신부
1967년 천주교 성 베네딕도 수도회에 입회하여 서울 가톨릭대 신학부를 졸업하고, 신부가 된 다음 독일 뉘른베르크 미술대학을 졸업했다. 천주교 주교위원회 출판국장으로 천주교 200주년 기획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독일유학 후 한국현대미술 50년전, 일본 국제 현대미술전 및 국내외(독일, 미국, 오스트리아) 10여 차례 개인전과 여러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월간 영성문화교양지 <들숨날숨>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인천가톨릭대학교 조형예술대학 학장을 역임하고, 현재 강화 동검도 채플과 갤러리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대표적인 미술 작품으로는 부산 남천 성당 유리화와 서울 2호선 당산철교 외벽의 벽화, 서소문 현양탑 등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그대 문의 안과 밖에서>, <꽃과 별과 바람과 시 - 조광호 신부 그림 에세이>, <얼굴 - 조광호의 그림과 글>, <Angel - 조광호 신부 명상 Drawing>, <조광호의 스테인드글라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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