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박정희의 과오만 바라봅니다
최태선 칼럼
바야흐로 우리나라에서는 이념전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 중심에 박정희 대통령이 있습니다. 모든 인간사는 공과(功過)가 있습니다.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사람의 몫입니다. 공을 크게 보는 일은 가능하지만 功(공)만을 보는 것은 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하지만 過(과)만을 보는 일은 필요한 일입니다. 공과 과를 똑같이 보아서는 안 됩니다. 공은 인정해도 좋은 것이지만 과는 결코 용납되어서는 안 됩니다. 만일 공과 과를 똑같이 취급한다면 그것은 인간성을 포기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언론은 역사에서 전쟁의 참상 속에서도 지속되는 인간성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역할을 한다.”
전쟁에 관한 기사에서 위 내용을 보았습니다. 종군기자의 관점입니다. 위 내용에 따르면 이는 언론의 순기능, 곧 공입니다. 하지만 언론에는 순기능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작금의 한국의 언론은 순기능보다는 인간성을 말살하는 일에도 탁월합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분명 관점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 나라가 무엇인지를 모릅니다. 대부분은 하느님 나라를 죽은 후에 가는 천국으로 알아 듣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나라는 살아서 들어가는 나라이며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느님 나라의 관점을 가지게 되고, 하느님 나라의 관점으로 보고 판단하고 살게 되는 것이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세상의 관점을 그대로 지닌 채 하느님 나라를 죽은 후에 가는 나라로,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일을 요구하는 나라가 된 것입니다. 그런 관점을 지니면 하느님 나라는 현실과는 상관없는 나라가 됩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봅니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1코린 4,18)
어떤 사람이 제가 쓴 글에 하느님 나라가 인간이 판단할 수 없는 나라라는 근거로 인용한 성서의 구절입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명백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하느님 나라와 하느님의 의를 구할 때 그들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임합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기교회의 모습은 바로 그런 하느님 나라가 임한 교회의 모습입니다.
그런 하느님 나라는 “이미”와 “아직”이라는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오늘날 교회에 나가는 이들은 알고 있습니다. 사도행전의 초기교회에 임한 하느님 나라도 완성된 하느님 나라는 아닙니다. 온전한 하느님 나라는 아직 임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이미 하느님 나라가 임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한 마음과 한 뜻이 되고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제 것이라고 하는 이가 없고,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하나도 없는 그 모습이 그들 가운데 이미 임한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이런 하느님 나라의 건설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세상의 빛이 될 때 하느님의 구원 사역은 이루어지고 완성됩니다. 늘 말하고 있지만 “개인구원”은 없습니다. 구원은 하느님의 구원 사역의 일부로서 하느님 나라의 건설이라는 목표에 동참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을 것이니, 너는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마태 1,21)
우리는 이 말씀에서 예수라는 이름의 뜻이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하실 분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의 목적이 개인구원이 아니라 자기 백성, 곧 하느님 나라 백성이 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 백성은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의 방식으로 사고하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런 하느님 백성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 나라를 실재로 여기며 지금 이곳에서 하느님 나라의 방식대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일이 인간의 의지적인 노력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 됩니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 살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살고 계십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살고 있는 삶은,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갈라 2,21)
바울 사도가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하느님 백성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 삶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삶이며 믿음의 본질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처럼 아직 완전히 도래하지 않은 하느님 나라의 삶을 지금 이곳에서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 나라의 관점을 가지게 되면 보이는 것이 달라집니다. 세상 사람들은 공만을 보라고 주장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과만을 바라보는 사람들이 됩니다. 세상은 역사가 생긴 이래 모두 “희생의 체제”였습니다. 강자들이 약자들을 발판으로 삼아 그들을 희생시키며 사는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 같은 희생양들이 사라지는 곳입니다. 하느님 백성들이 공이 아니라 과를 보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는 이집트 사람이 종으로 부리는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소리를 듣고, 내가 세운 언약을 생각한다.”(탈출 6,5)
그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고통에 민감하고, 거기에 반응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사실이 중요합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功에 집중하고, 功만을 바라보는 이들은 희생양들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희생양들의 신음소리가 들리려면 過만을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렇게 된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功만을 바라보는 이들이 되거나 공과 과를 공평하게 바라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공만을 본다거나 공과 과를 공평하게 바라보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면 그것은 스스로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버리고 세상 사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저는 박정희 대통령의 過만을 바라봅니다. 모든 독재자들이 국민들을 잘 살게 만든 것도 아니고, 그런 독재자 혼자의 힘으로 잘 살게 되는 것도 아닙니다. 잘 사는 것이 능사라는 사고는 근본적으로 왜곡된 사고입니다. 지구상에서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는 가장 잘 사는 나라가 아니라 가장 가난한 나라들 가운데 하나인 부탄입니다. 부탄이 고통 받는 사람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유일한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불교국가인 부탄이 하느님 나라에 가장 근접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하느님 백성이어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정말 하느님 나라의 방식으로 살아간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들 가운데 하느님 나라가 임하고 열릴 것이라는 대답은 당연할 것이고, 그 나라에서 모든 사람들이 사람답게 사는 것을 상상하는 일 역시 당연할 것입니다. 그 백성들의 행복 역시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그 모든 일들이 過만을 바라보는 하느님 백성들에 의해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실 역시 당연한 일입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새삼 실감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인간성의 본질입니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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