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에서 마음공부

북리뷰: [사랑 아니면 두려움], 이현주, 분도출판사, 2020

2026-09-28     한상봉 편집장

“진정한 혁명가는 모두 그 마음 속에서 신비가이기를 요청받고 있으며, 신비적인 길을 걷는 자는 인간 사회의 환상적인 속성을 벗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 신비주의와 혁명은 급진적인 변혁을 가져오려는 노력의 두 가지 측면이다. 신비가는 누구나 자기 성찰을 통해 병든 사회의 근원을 발견함으로써 사회의 비평가가 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혁명가도 새로운 세계를 위한 투쟁 가운데서 자신의 반동적인 공포나 그릇된 양심과 싸울 수 있어야 한다. 혁명가와 신비가는 안전하고 보호된 존재가 되고 싶다는 이기적인 요구에서 자유롭게 되어 자신과 그가 사는 세계의 비참한 상태를 두려움 없이 직면하지 않으면 안된다.”(헨리 나웬)

헨리 나웬은 신비적인 길과 혁명적인 길은 상반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지닌 같은 초월적 경험의 두 가지 측면이라고 말합니다. 신비와 혁명, 그 단어만으로도 가슴이 요동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때는 분도출판사에서 나온 <사진말> 가운데 한 장을 책상 유리판 밑에 끼어 두고 보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고상(十字苦像)이 걸려 있는 방안에 한 청년이 누워있는데 침대 위에는 권총 한 자루가 놓여 있는 사진입니다. ‘그리스도교 해방전사’라는 말이 낯설지 않은 젊은 날입니다. 이를 두고 관상과 실천, 시와 혁명의 통일이라고 말해도 좋습니다. 내 영혼이 닿는 곳에서 몸이 자유롭게 움직이기를 기대하는 일이지도 모릅니다.

천주사회문제연구소, 가톨릭노동사목전국협의회,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격월간 잡지 ‘공동선’으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문득 시선을 돌리기 시작한 것은 아마 1999년 가을 귀농했을 때부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모든 가엾은 목숨들을 뒤에 두고 나 또한 가엾은 목숨이 되어 흙으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그곳 전라도 무주 산골에서 시작한 공부가 표현예술심리치료였습니다. 주말마다 화물차를 몰고 광주로 가서 옥금자 선생님을 스승으로 삼아 예술치료 공부를 했던 것이지요. 오후에 시작된 공부는 밤늦도록 계속되고, 한밤중에 팔팔고속도로의 안갯속을 달려 산골로 되돌아오곤 했습니다.

그 무렵부터 만나기 시작한 사람들 가운데 이현주 목사님과 이철수 화백, 한서정과 제마스님, 임의진과 홍승표, 김민해 목사로 이어지는 흐름입니다. 이분들은 글을 쓰고 판화를 새기고, 혁명을 말하면서도 늘 ‘마음공부’의 한끝을 길동무 삼았던 분들입니다. 그 길 끝에서 김종철 선생님을 만났는데, 그분이 흠모하시던 장일순 선생님은 생전에 뵙지 못했습니다. 사실상 인연의 갈피야 여기서 그치지 않을 테지요. 능길리에 산속에 살던 선희 누님을 비롯해서 영덕이형과 길수, 복섭이도 잊을 수 없지요. 이런 상념에 빠져들면, 나는 나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생애의 구비마다 만났던 크고작은 인연들이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내 기억이 닿는 곳까지’가 ‘나’라는 생각도 합니다.

 

이현주

몸으로 하는 마음공부

이참에 ‘관옥 이현주의 수행 안내서’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사랑 아니면 두려움>(분도출판사, 2020)이라는 책을 통해 ‘마음공부’에 대해 간략하게 정리해 볼 마음을 먹습니다. 관옥 선생은 수행, 수련, 마음공부를 이렇게 나누어 설명합니다. ‘수행’이란 사람이 살면서 하는 모든 행실을 닦는다는 뜻이고, ‘수련’이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일정한 기간 집중적으로 몸과 마음을 갈고 닦는다는 뜻일 텐데, ‘마음공부’란 머리에 지식을 저장하는 것으로 주된 내용을 삼는 공부가 아니라는 뜻으로 앞에 ‘마음’이란 말을 붙인 모양이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마음공부란 게 몸은 버려두고 마음만 챙긴다는 오해를 받기 쉽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게 몸을 통해서 말고는 저를 표현할 도리가 없는 것이어서, 밥 한 숟갈 먹는 모습만 보아도 그 삶의 마음공부가 어떤 형편인지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밥을 아무렇게나 먹다가 함부로 남기는 사람은 남을 대할 때에도 제 맘대로 대하다가 제 맘대로 등질 수 있는 그런 사람이라는 거지요. 밥 한 숟갈 먹을 때마다 감사한 마음으로 정성껏 먹는 사람이라면 남을 대할 때 상대가 비록 세상에서 말하는 보잘것없는 존재라 해도, 결코 함부로 아무렇게나 대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이라면 끊임없이 눈길을 자기에게로 돌려 내가 지금 밥을 먹고 있는지, 똥을 어떻게 누고 있는지, 손님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김을 어떻게 매고 있는지, 운전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그런 것을 자세히 살펴서 자기가 과연 제대로 마음공부를 하고 있는지 점검해 봐야 합니다. 남을 대하는 태도가 좀 더 부드러워지고 품이 좀 더 넉넉해지고 말이 좀 더 느리고 어눌해지면 그러면 지금 마음공부를 제대로 하고 있다고 봐야 되겠지요. 반대로, 말이 단호해지고 남을 대할 때 ‘그건 아니야. 그러면 안 돼’라는 말이 자주 나오고, 무슨 일이 생길 때 ‘그럴 순 없어. 틀렸어’라는 말이 저도 모르게 불쑥불쑥 나온다면, 지금 하고 있는 마음공부를 의심하고 검토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관옥선생은 “마음이란 바다로 향해 흐르는 물처럼, 갈수록 깊어지고 넘어지게 마련”이라면서 “강물은 개울의 방향을 간섭하지 않고 바다는 강물의 깊이를 바꾸려 하지 않는다. 그냥 더 낮은 곳에서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때가 되면 들어오는 그것들을 받아들일 따름”이라고 했습니다.” 참 기막힌 표현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강물처럼, 바다처럼 되는 게 마음공부라면, 성인이 되는 길이 여기 있지 않나 싶습니다.

마음공부는 우리를 성직자로 만드는 방편

결국 마음공부가 몸으로 결실을 맺어야 한다면, 우리가 하는 일이야말로 마음공부의 최전선입니다. 관옥선생은 일의 종류가 아니라 사람이 그 일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귀천이 분별된다고 말합니다. 공자님 같은 분이 농사를 지으면 그 농사가 귀한 일이 되고, 제사보다 잿밥에 더 관심있는 사람이 농사를 지으면 그 농사가 천박한 일이 된다는 말입니다. 일에는 분명 귀천이 있지만, 그것을 나누는 경계가 일에 있지 않고 그 일을 하는 사람한테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성직(聖職)이 따로 있다는 착각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그래서 신부나 목사를 보면 그 사람이 성당이나 교회에서 무슨 마음으로 어떻게 일하는지 알아보지도 않고 ‘성직자’라는 이름을 달아 주지요. 하지만 그런 이름으로 행세하는 사람들 가운데 장터 상인들보다 훨씬 더 손익계산에 빠른 이들이 있잖던가요? 성직자는 계산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이익을 내가 먹고 손해는 네가 보라는 식으로 계산한다는 건 상상조차 못할 일이지요.”

관옥선생은 예수님이 계산을 하셨다면 길 잃은 양 한 마리 찾으려고 아흔아홉 마리 양을 들판에 버려둔 채 산속을 헤매지 않았을 것이고, 새벽부터 일한 사람과 해거름 와서 일한 사람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지 않았을 거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손익계산에 빠른 사람들, 이익은 자기가 챙기고 손해는 남에게 넘겨주는 오랜 인류의 관습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한 사람들이 승복을 입거나 제의를 걸치고 행세할 때, 그들에 의해서 교회와 사찰이 성스러운 기도처가 아니라 강도들의 소굴이 되고 마는 것이라고 관옥선생은 혀를 찹니다.

마음공부는 이런 뜻에서, 우리 모두를 귀한 직업인으로, 성직자로 만드는 방편이라고 합니다. 농부는 논밭에서, 기술자는 공장에서, 교사는 교실에서, 어부는 바다에서, 군인은 전쟁터에서, 주부는 집 안에서, 상인은 상점에서, 운동선수는 운동장에서, 배우는 무대에서 저마다 수행자로, 성직자로 살아갈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사랑과 두려움

날이 어둑어둑해지는데, 낯선 젊은이가 마을 입구의 느티나무 아래 천막을 칩니다. 오늘 밤은 거기 묵을 모양입니다. 이럴 때 마을 사람들은 제각각 다른 반응을 보입니다. 어떤 이는 “수상한 젊은이가 마을에 나타났으니 오늘 밤 특별히 문단속을 잘하라”고 아들에게 이릅니다. 또 어떤 이는 며느리에게, 웬 젊은이가 혼자서 천막을 차던데 밥 한 상 차려 주라고 말합니다. 물론 못 본척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여기서 마음공부란 사람의 의식수준을 낮은 데에서 높은 데로 끌어올림으로써 두려워하는 사람을 태평한 사람으로, 공격적인 사람을 너그러운 사람으로 바꾸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관옥선생은 말합니다. 예를 들어 마을에 나타난 젊은이를 보고 문단속을 잘하라고 하던 사람이 며느리를 시켜 밥상을 차려주거나 아예 자기 집으로 모셔 오는 삶으로 바뀌는 것이랍니다.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관옥 선생은 “생각만 해도 근사한 일 아닙니까? 사람이 길지도 짧지도 않은 생을 살면서 한 번 해 볼 만한 일이 아닌가?” 묻습니다.

여기서 관옥선생은 인간의 온갖 행위를 유발시키는 근본 동기는 사랑과 두려움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인간 세상은 선과 악, 정의와 불의, 빛과 어둠의 대치라기보다 사랑과 두려움의 대치 속에서 온갖 사건이 끝없이 빚어내는 광대무변한 무대인지도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문단속을 입에 올리는 이의 마음에 있는 것은 두려움이고, 그이를 집에 데려다 재우려는 이의 마음에는 사랑이 있는 것이지요. 사랑은 두려움을 모르는 법입니다.

길 찾는 공부

마음공부의 목적은 당연히 남을 변화시키는 데 있지 않고 저 자신을 바꾸는 데 있습니다. 세상을 바꿔서 나를 평안하게 하자는 게 아니라, 나를 바꿔서 세상을 평화롭게 하자는 것입니다. “인류가 성인으로 모시는 분들은, 하나같이 길을 제대로 걸어서 마침내 길 자체가 되신 (길과 하나로 되신) 분들”이라고 말하는 관옥 선생은 마음공부를 ‘길 찾는 공부’ 도는 ‘길 닦는 공부’라고 전합니다. 그래서 이 길을 찾고 닦는 이들을 수도자(修道者)라든가 구도자(求道者)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그 길을 가는 데도 순서가 있다고 말하는 관옥 선생은 ‘사람이 먼저이고 생각은 나중’이라고 합니다. 나라 사이에, 종교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는 이유는 사람보다 사람의 생각(이데올로기)을 더 무겁게 여기고 백성보다 나라를 더 중요시하는 ‘잘못된 생각’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이념보다 생명이, 조국보다 인민이 더 근본이고, 그래서 만약에 누가 이념을 위해 생명을 바치라고 하거나 조국을 위해 인민을 죽이라고 하면, 그럴 수 없다고, 오히려 생명을 살리기 위해 이념을 꺾고 인민을 살리기 위해 조국을 버리겠다고 해야, 그래야 먼저 할 일 먼저 하는 구도자의 길을 제대로 가는 것이라고 봅니다.”

마음공부 시작하기

관옥 선생은 “마음공부도 공부니까 한 번 해 보겠다는 결심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강변 모래알처럼 많은 보물로 자선을 베풀어도 그 공덕(功德)이 경(經) 한 구절 암송하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는 부처님 말씀을 생각하며, 설혹 별다른 진척을 보지 못했다해도 죽기 전에 마음공부를 결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성과라고 말합니다.

“태어나서 숨지는 순간까지 그림자 같고 메아리 같은 세상 부귀영화를 좇아 이리저리 헤매느라고 자기 마음 한 번 챙겨 보지 못한 채 아까운 인생 보내고 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기는 그런 이들도 아주 헛되이 인생을 살았다고만 볼 수는 없겠지요. 적어도 숨지는 순간 ‘이게 아닌데, 이렇게 사는 게 아니었는데’ 하고 뉘우칠 수 있으니까요. 윌리엄 블레이크라는 시인이 말했다지요. ‘맙소사! 죽음이 코끝에 닿아서야 인생 헛살았음을 알아차리다니!’”

관옥 선생은 아무리 헛된 짓을 해서 아까운 시간과 정력을 낭비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헛된 짓인 줄 깨닫는다면 그 사람은 헛되이 산 것이 아니라고 위로합니다. “등불 하나가 천 년 어둠을 단숨에 물리친다고, 한 번 밝게 깨치면 지난날 모든 어리석음이 한순간에 지혜로 바뀌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진짜 얼굴 찾기

공자님은 “나를 닦음으로서 남을 평안케 한다”(修己以安人)고 했습니다. 남의 허물을 내 허물보다 먼저 보고 더 잘 보는 사람이 그 눈을 그대로 가지고서 마음공부를 계속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문제와 해답을 바깥에서 찾으려 하지 말고 먼저 자신을 들여다보라고 권합니다.

“남한테서 찾지마라(切忌從他覓)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나로부터 멀어지느니(超超與我疏)
나 이제 홀로 가는데(我今獨自往)
가는 곳곳에서 그를 만나노라(處處得逢渠)
그는 곧 나인데(渠今正是我)
나는 그가 아니로(我今不是渠)
이렇게 깨달아야만(應須恁麽會)
문득 여래(如來)와 하나 되리라(方得契如如)”

불교의 조동종(曹洞宗)의 시조가 된 양개(良价) 스님은 “네가 어디를 가든지 부처가 바로 거기에 있으니 지금 너 있는 곳 아닌 다른 어디에서 그를 찾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불자가 찾아가는 ‘너’가 ‘부처’라면, 그리스도인이 찾아가는 ‘너’는 ‘그리스도’일 겁니다. 이처럼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내가 오랫동안 주님 없는 곳에서 주님을 찾았더니 이제 비로소 내 안에 계신 주님을 만났으매 마침내 영혼이 쉼을 얻었나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요한 17,21)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 안에 있다”는 말은 두 분 사이에는 ‘바깥’이 없다는 말입니다.

참 자기와 하느님을 밖에서 찾지 말고 안에서 찾으라는 말씀은 또한 저기나 거기에서 찾지 말고 ‘오늘 여기’에서 찾으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지금여기를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게 우리 몸입니다. 그런데 마음이 문제죠. 마음은 좀처럼 지금 여기에 있지를 못하고 언제나 거기나 저기에서, 지난날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날을 헤매고 돌아다니기 때문입니다. 결국 관옥 선생에 따르면, 마음공부란 “내 몸과 마음이 온전히 하나로 되어 하느님의 때와 곳인 ‘지금 그리고 여기’로 돌아와서 머물도록, 더돌아 다니는 마음을 이끌고 다스리는 것”입니다. 한 제자가 스승께 “무엇이 깨달음입니까?” 하고 묻자, “배고플 때 먹고 졸릴 때 자는 것”이라고 말한 연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찰나’이면서 ‘영원’인 ‘지금’과, 끝없이 좁으면서도 끝없이 넓은 ‘여기’로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지요.

‘왜’에서 ‘어떻게’로

관옥 선생은 해럴드 쿠시너라는 미국의 유대인 랍비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하느님의 법대로 살려고 노력하던 이 랍비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그이가 너무 빨리 늙는 조로증(早老症)에 걸렸던 모양입니다. 결국 14년만에 백발노인이 되어 죽은 아들을 생각하며 쿠쉬너는 ‘왜 이런 엄청난 고통이 나와 내 집안에 일어났는지’ 묻게 됩니다. 하지만 하느님은 묵묵부답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좋다. 내 아들은 영문도 치료방법도 알 수 없는 이상한 병에 걸렸다. 이것이 현실이다. 일단 현실을 받아들이자. 그러면 이제 내가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묻기 시작했습니다. 그때부터 무거운 침묵으로 쿠쉬너에게 고통을 더해 주었던 하느님이 갑자기 활기를 띠면서 그를 돕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쿠쉬너는 그동안 고통받고 있는 아들과 자기 자신을 떠나서 아들이 병을 얻은 ‘과거 어느 날’에서 헤매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에게 하느님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만 생생하게 살아 계셨던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궁금한 것은 마음공부를 하는 방법입니다. 관옥 선생은 누구에게나 합당한 방법은 없다고, 제게 맞는 방법을 찾아가는 것 자체가 수행이라고 말합니다. 다만 뜻을 세우고 눈과 귀를 활짝 열어놓으면, 나를 이끌어 줄 선생과 나한테 맞는 방법이 차츰 모습을 드러낸다고 말합니다. 중요한 것은 ‘깨달음을 구하는 마음’이겠지요. 예수님은 ‘구하지도 않는데 그냥 준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청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는 얻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마태 7,7-8)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영성센터 코디네이터

종이신문<가톨릭일꾼>(무료)정기구독 신청하기
http://www.catholicworker.kr/com/kd.html

도로시데이영성센터-가톨릭일꾼후원하기
https://v3.ngocms.co.kr/system/member_signup/join_option_select_03.html?id=hva8204

유튜브 강의/한상봉TV-가톨릭일꾼
https://www.youtube.com/@tv-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