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의 성육신ㅡAI가 몸을 얻기 시작했다
장준식 칼럼
오늘 아주 흥미로운 뉴스를 접했다. AI 기업 Anthropic이 내가 사는 지역(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 실제 생물학 실험을 수행하는 ‘wet lab’을 만들었다는 소식이다. 지금까지 생명과학에서 AI는 주로 컴퓨터 안에서 단백질 구조를 분석하고, 후보물질을 찾아내고, 실험을 설계하는 일을 해왔다. 말하자면 AI의 세계는 ‘in silico’, 컴퓨터 안이었다. 이제 상황이 달라지고 있다. Anthropic은 Claude와 실험실의 로봇, 각종 실험 장비를 연결해 AI가 실험 과정을 지휘하고 실제 물질에 개입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아직 인간의 감독이 전제되어 있지만 방향은 분명하다. AI가 몸을 얻기 시작했다.
AI의 역사를 단순하게 표현하면 이렇다. 처음에는 정보를 찾았다. 그 다음에는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코드를 만들었다. Agent가 등장하면서 컴퓨터 안에서 스스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이제 AI는 로봇 팔을 움직이고, 자동차를 운전하고, 드론을 조종하고, 실험실에서 세포와 단백질을 만지는 단계로 이동하고 있다. AI가 언어와 정보의 세계에서 물질의 세계로 들어오고 있다.
나는 이 장면을 보면서 그리스도교의 가장 중요한 교리 가운데 하나인 ‘성육신’(Incarnation)을 떠올렸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리스도교는 놀라운 주장을 한다. 하느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셨다는 것이다. 영원한 로고스가 추상적인 정신이나 관념으로 머문 것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 속으로,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의 몸 안으로 들어오셨다. 이 사건이 AI와 오버랩됐다. 그러면서 내 머릿속에서는 ‘AI의 성육신’(Embodiment)이라는 용어가 떠올랐다. (나는 AI의 성육신과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구분하기 위해, embodiment와 Incarnation으로 구분해서 쓸 것이다.) 물론 AI의 embodiment와 하느님의 성육신은 전혀 같은 사건이 아니다. AI가 로봇과 연결되는 일을 신학적 의미의 성육신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둘을 비교해 보는 것은 흥미롭다. 둘의 차이가 오히려 성육신이 무엇인지를 더 선명하게 보여 주기 때문이다.
AI의 성육신(embodiment)과 그리스도의 성육신(incarnation) 사이에는 구조적 유사성이 있다. 지능이 물질 세계 안에서 결과를 만들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몸 없는 AI는 말을 틀릴 수 있다. 그러나 몸을 얻은 AI가 틀리면 현실이 달라진다. 로봇팔이 잘못 움직이고, 자동차가 잘못 판단하고, 실험실의 AI가 잘못된 물질을 다루면 그 오류는 더 이상 화면 안에 머물지 않는다. 영어로 표현하면 이렇다. “Embodiment turns intelligence into consequence.” 몸을 얻는 순간 지능은 결과를 만들어낸다.
그래서 앞으로 AI의 가장 중요한 질문은 “얼마나 똑똑한가?”보다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가?”가 될 가능성이 크다. 같은 AI라도 검색창과 연결돼 있을 때와 드론, 발전소, 군사무기, 생물학 실험실과 연결돼 있을 때의 행위능력은 전혀 다르다. AI의 행위성은 AI 안에만 있지 않다. AI + 로봇 + 센서 + 전력 + 실험실 + 인간 + 제도. 이 관계망 속에서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행위 능력이 발생한다.
그런데 여기서 그리스도교의 성육신과 결정적인 차이가 나타난다. AI가 몸을 얻는 목적은 대체로 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다. 더 빨리 실험하고, 더 멀리 이동하고, 더 정확하게 조작하고,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 몸을 얻는다. 그러나 하느님이 몸을 취하신 방향은 정반대였다. 성육신은 능력의 확대가 아니라 자기 제한이었다. 전능한 하느님이 배고플 수 있는 몸을 취했다. 피곤할 수 있는 몸, 상처받을 수 있는 몸, 사람들에게 밀쳐질 수 있는 몸, 마침내 죽을 수 있는 몸을 취했다. 바오로 사도는 이것을 ‘케노시스’, 곧 자기비움이라고 표현한다. 여기에 나는 AI 시대에 다시 생각해 볼 만한 놀라운 대조가 있다고 본다. AI는 몸을 얻으며 강해진다. 하느님은 몸을 취하며 약해지셨다. AI의 embodiment가 power의 확장이라면, 하나님의 incarnation은 사랑을 위한 power의 제한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차이가 AI 시대에 그리스도교가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을 만들어낸다. 기술자들은 묻는다. “AI에게 몸을 주면 무엇을 더 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교 신앙은 조금 다른 질문을 던져야 한다. “몸을 얻었다면, 그 몸으로 누구를 섬길 것인가?”
그리스도에게 몸은 세상을 지배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었다. 타인에게 가까이 가기 위한 방식이었다. 몸이 있었기에 병든 사람을 만질 수 있었고, 우는 사람 곁에 앉을 수 있었으며, 배고픈 사람과 함께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몸이 있었기에 상처받을 수도 있었다. 기독교에서 몸은 agency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몸은 동시에 취약성(vulnerability)을 의미한다. 그래서 성육신의 흐름은 이렇게 된다. 육체성(Embodiment) → 취약성(vulnerability) → 연대(solidarity) → 책임(responsibility). 몸을 갖는다는 것은 더 많이 할 수 있게 되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존재에게 노출되고 관계를 맺고 책임을 지는 존재가 된다는 뜻이다.
AI 시대에 이 통찰은 중요하다. 앞으로 AI가 몸을 얻는 것 자체를 막기는 어려울 것이다. AI는 자동차와 로봇과 병원과 공장과 실험실과 군사시스템 안으로 계속 들어갈 것이다. 그렇다면 그리스도교의 역할은 단순히 “AI에게 몸을 주지 말라”고 외치는 것이 아닐 것이다. 오히려 더 근본적인 질문을 해야 한다. 그 몸은 사람을 살리는 몸인가, 감시하는 몸인가. 치유하는 몸인가, 공격하는 몸인가. 돌보는 몸인가, 착취하는 몸인가. 힘을 확대하는 몸인가, 약한 이들과 함께하는 몸인가. AI 시대의 성육신 신앙은 기술의 능력 앞에서 ‘인간에게 능력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를 묻는다. 이것이 어쩌면 AI 시대에 성육신 신앙이 다시 중요해지는 이유일지 모른다.
AI에게 몸을 주는 시대가 왔다. 그리스도교는 2천 년 전부터 훨씬 더 급진적인 이야기를 해왔다. 하느님도 몸을 가지셨다. 그 몸으로 세상을 지배하지 않고 아픈 이를 만지고, 배고픈 이를 먹이고, 약한 사람 곁에 서고, 마침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다. 그러므로 AI 성육신 시대에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AI에게 어떤 몸을 줄 것인가?” 그리고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 “그 몸으로 누구를 섬기게 할 것인가?”
장준식 목사
미국 실리콘밸리 소재 세화교회 담임.
<예배자의 기도>, <기후 교회로 가는 길> 등의 저자.
여러 신문에 글을 기고 하는 칼럼니스트
미국 에모리대학교와 GTU에서 조직신학(정치신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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