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낯선, 죽음의 다양한 얼굴들
이정화 칼럼
박혜윤 작가를 처음 만난 것은 행성 B 이윤희 편집장님 집들이 때였다. 방학 동안 홍콩 대학에서 일정을 마치고 오신 강남순 교수님과 이론그룹 동료들이 만나는 자리였다. 미리 와 있던 그녀는 처음 본 사람 같지 않게, 집주인처럼 서글서글 웃으며 우리를 맞아주었다. 돌아가면서 유난히 더웠던 여름을 어떻게 보냈는지 이야기하는 시간에 작가는 자연스럽게 본인 소개를 했다. 이름은 박혜윤. 그녀는 서울대병원 조직은행 간호사이자 성균관대에서 응용현상학을 가르치는 겸임교수다. 나는 '조직은행'이라는 단어도, '응용현상학' 이라는 학문도 낯설었다. 독특한 이력을 가진 그녀는 소위 ‘철학하는 간호사’였다. 행성 B에서 책을 출간하게 되어 겸사겸사 편집장님이 초대한 것이다.
책의 가제는 '죽음 낯설게 보기'. 우리 모두의 관심사이자, 어느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죽음에 관한 책이다. <죽음 낯설게 보기>라니, 나는 오히려 제목이 낯설었다. 요즘 우리 주위엔 죽음이 널려있다. TV만 켜면 다양한 사건사고와 전쟁과 폭력, 무엇보다 고령화 사회에 드리운 죽음의 분위기까지 밝은 소식이 없다. 나 역시 일하는 곳이 치매 어르신들과 만나는 데이케어센터라는 현장이다 보니, 죽음을 낯설게 보기는커녕 너무 친숙하다. 그런데 박혜윤 작가의 책을 읽기 시작하면서 작가가 왜 제목을 <죽음 낯설게 보기>라고 지었는지, 죽음에 관한 책을 쓸 수밖에 없었는지 깊이 알게 되었다.
그녀는 의료 현장의 간호사로서, 철학가로서 임상과 철학 사이를 오가며 부모나 배우자, 가족들의 죽음 앞에서 망설이고 주저하고 회피하고, 결국은 죄책감과 무력감으로 무너지는 인간을 목도한다. 이 책은 그런 인간들이 얻은 답이 아니라, 우리는 어떻게 죽고 어떻게 떠나보낼 것인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어떤 선택을 하며 어떻게 품위 있는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를 낯선 눈으로 바라본 깊이 있는 '사유'의 책이다.
박혜윤 작가는 죽음이라는 '감정'에 휘둘리지 않으면서, 의료 현장 간호사로서 경험한 다양한 죽음들, 장기와 조직 기증, 연명치료와 연명의료의 차이점, 죽음의 질에 대해 차분하게 설명한다. 그리고 이름도 낯선 응용현상학을 가르치는 철학 교수로서 인간 존재의 의미, 안락사와 조력자살이 갖는 한계와 자기결정권, 고독사와 고립사 사이의 고민, 돌봄의 철학적 의미들을 꼼꼼하면서도 조심스럽게 다룬다. 작가는 그 어떤 죽음도 좋은 죽음과 나쁜 죽음이라고 함부로 단언하지 않는다.
이 책을 읽으면서 놀란 것은, 내가 얼마나 죽음을 '단순 무식'하고 '가벼이' 생각하고 있는지에 대한 깨달음이다. 작가가 낯설게 보라는 것은 타인의 죽음이 아니라 '나의 죽음'이다. 나의 죽음과 타인의 죽음은 본질적으로 다른 차원에 있다. '죽음의 학자' 엘리자베스 퀴불러-로스는 "타인의 죽음은 동물원 철창에 갇힌 호랑이를 보는 것과 같지만, 자신의 죽음은 그 호랑이가 철창 밖으로 나와 덤벼드는 것과 같다," 고 한다. 그만큼 극심한 공포와 혼란을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천년만년 살 것처럼 말하고, 실제로 그러길 희망한다. 죽음이 나만은 비켜 가길 바라며.
작가는 책에서 '연명치료'와 '연명의료'에 대해 확실하게 알려준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연명치료'는 시쳇말로 목숨을 연장할지 말지 결정하는 의료 행위와 직접 연결된다. 심폐소생술, 인공호흡기, 투석 같은 의학적 시술에 대한 결단이다. 반면 '연명의료'는 단순히 상처나 질병을 치료하는 수준을 넘어 '포괄적인' 의미를 담는다. 연명의료란 환자의 현재 상태만을 말하기보다 삶의 마지막 길목에서 임종에 이르기까지의 시간 동안 인간으로서 '존엄'을 유지할 수 있는지, 삶의 질은 어떠한지를 살피는 총체적 틀이라고 한다. 우리는 소중한 가족의 죽음 앞에서 슬픔과 불안에 휩싸여 허둥대다가, 바른 선택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제대로 된 '앎'이 중요하다.
자연스러운 죽음이 자연스럽지 않은 시대
어릴 때 할머니는 늘 입버릇처럼 '죽음 복'을 잘 타고나야 한다며, "나는 자면서 죽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정말 할머니는 그렇게 주무시면서 돌아가셨다. 노환으로 집에서 돌아가신 '자연사'다. 그런데 요즘은 어떤가. 죽고 싶어도 죽지 못하게 '최선'을 다해 살려 놓는다. 모 대기업 총수는 자식들이 유산 상속 문제로 계속 연명치료를 하고 있다는 믿지 못할 일도 있었다. 요즘도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는 게 씁쓸하다. '자연스러운 죽음'을 전혀 자연스럽게 여기지 않는 시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어쩌면 모두 떠밀리듯 죽음의 길로 향하는지도 모른다고 작가는 말한다.
작가는 당뇨 합병증으로 심장과 신장이 망가진 아버지를 간호하다가 지치고, 결국 돌아가신 후 느낀 당혹감과 죄책감을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나 역시 2018년 아버지를, 2021년 코로나 시기에 어머니를 떠나보냈다. 두 분의 죽음을 생각해 보니 그 과정 안에 작가가 책에서 언급한 연명치료, 어른의 기저귀, 돌봄의 문제가 고스란히 자리하고 있었다.
죽음 속에 똬리 튼 문제들
아버지는 알콜성 녹내장과 황반변성으로 뒤늦게 시력을 잃었다. 두 분을 모시고 있던 남동생이 손을 놓은 때가 바로, 화장실을 찾지 못해 동생 방에다 일을 보신 때다. 죽어도 가기 싫다는 요양원에 두 분을 밀어 넣다시피 했다. 이틀 만에 아버지는 폐렴으로 병원으로 옮겨지고, 한 달쯤 후에 돌아가셨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당연히 집으로 오실 줄 알았던 어머니는, 요양원에서 뇌출혈로 쓰러졌다. 고혈압도 없었던 엄마가 뇌출혈이라니. 기저귀를 거부하는 환자였으니 낙상이었을 것이라 짐작했다. 자식들은 연명치료 거부에 동의했지만, 결국 비위관 삽입술을 해서 소위 '콧줄식사'를 했다. 엄마를 굶어 죽게 할 수는 없다는 마지막 선택이었다. 코로나로 제대로 면회도 못하고 자식들 얼굴도 알아보지 못한 채, 그렇게 어머니는 떠났다. 한동안 나는 후회와 죄책감에 시달려야 했다.
작가는 묻는다. 존엄한 죽음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삶이 멈추는 순간뿐 아니라, 죽음을 향해 나아가는 시간 동안 인간다움을 잃지 않는 과정일 거라고. 그저 스스로 '뒤처리'를 할 수 있을 만큼의 기력이 있고없음이 곧 존엄의 척도는 아닐까?라고. 죽음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죽음의 '과정'이 아닐까?라고.
죽음의 옵션, 안락사
책의 뒷부분으로 갈수록 안락사, 조력자살, 고독사 같은 말하기 어렵고 무거운 주제들을 다룬다. 소생 불가능한 환자의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행위, 즉 소극적 안락사를 제외하고 모든 안락사, 조력자살은 불법이다. 안락사라는 말은 죽음에서 고통을 송두리째 삭제하고 오로지 편안함만 남긴다는 점에서, 죽음을 지나치게 '낭만화'한 단어라는 작가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인류를 살리기 위한 의술을 '잘 죽기 위해' 사용해야 하는 아이러니. 죽음의 과정에서 마주치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 죽음을 '옵션' 중 하나로 선택하는 사회는 과연 건강한가를 질문해야 한다.
안락사와 대조되는 죽음 중 하나가 '고독사'다. 솔직히 말하면 '고립사' 혹은 '독거사'라고 해야 한다. 이 죽음은 '가족, 친척 등 주변 사람들과 단절된 채 홀로 사는 사람이 자살이나 병사 등으로 혼자 임종을 맞고 시신이 일정 시간이 흐른 뒤에 발견되는 죽음'을 말한다. '1인 가구, 시신 방치, 수개월 쌓인 고지서'로 묘사되는 그들의 죽음은 그 이면에 있는 '관계의 단절'과 '고립'을 살펴야 한다. 고독사는 결국 그들의 '삶'이 고독했음을 입증하기 때문이다. 고독사를 한 그들에게 모진 낙인만 찍을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고독' 자체를 들여다봐야 한다.
몇 년 전에 읽은 김완의<죽은 자의 집 청소>(김영사, 2020)는 내겐 충격이었다. 김완은 자살하거나 홀로 고립사한 사람의 집을 치우는 특수청소를 한다. 가족도 지인도 꺼리는, 힘들고 불쾌한 일을 직업으로 삼는 그가 놀라웠다. "누군가 홀로 죽으면 나의 일이 시작된“다며 그는 망자가 남기고 간 쓰레기를 포함해서 체취까지 지운다. 그는 일상적으로 맞닥뜨리는 죽음의 현장에서 드러난 인간의 삶과 존재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
죽음의 위계
이 세상에는 다양한 위계가 존재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위계를 우리는 어쩌면 당연하게 받아들이며 살아간다. 그런데 참으로 슬픈 일은 삶을 마무리하는 죽음에서조차 위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누군가는 수많은 조화 속에 묻혀 끊이지 않는 문상객들의 절을 받으며 배웅받는다. 하지만 누군가는 혼자 쓸쓸히 죽어가는 것도 서러운데, 가족 없는 망인만 있는 ‘무연고’ 장례를 치른다. 이들은 세상과 연결된 관계가 없기에, 죽은 이의 삶의 맥락을 '시신 처리'라는 행정 과제로 압축해 버린다. 작가는 "삶의 고립이 정서적이고 사회적인 비극이라면, 무연고 장례는 그 비극의 사무적인 '마침표'인 셈이라고 지적한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사람을 '쓸모'의 잣대로 평가한다. 쓸모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단연 '돈'이다. 생산성과 효율성이 떨어지는 존재들, 돈을 벌지 못하면서 돈이 들어가기만 하는 존재를 우리는 '쓸모없다'고 낙인을 찍고 그림자 취급을 한다. 돌아가신 교종 프란치스코는 <복음의 기쁨> 53항에서 "배제된 이들은 착취를 당한 사람들이 아니라, 내버려진 사람들이며, '다 쓰고 찌꺼기처럼 남은 (잉여의) 사람들이다."라고 지적한다. 기저귀를 찬 어른, 노쇠한 이들, 병실 한가운데를 차지한 말기 환자들은, 작가 말대로 최대한 저만치 떨어져 있거나 적어도 눈에 띄지 않아야 할 존재가 된다.
돌봄의 다양한 얼굴
박혜윤 작가는 '돌봄의 홍수 시대'에 돌봄의 본질을 물으며, 이런 돌봄의 문제점들을 짚어간다. 애초에 '객관성'과는 거리가 먼 돌봄의 자리는 애매모호하다. 여성의 전유물로 여겨져 온 돌봄은 늘 '헌신'과 '희생'이라는 단어가 따라다닌다. 그래서 마땅히 치러야 할 '비용'이 무시된다. '독박 돌봄' 역시 문제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강요된 돌봄, 특히 결혼하지 않은 딸, 혼자 사는 자녀에게 그 짐은 자연스레 지워진다. 심지어 돌봄 현장에서도 '가족 같은 헌신'을 요구받는다.
돌봄은 본래 마음을 쓰는 일인데, 그것은 필연적으로 상대의, 혹은 나의 슬픔과 고통을 기꺼이 끌어안는 일이다. 하지만 현실은 철학적 정의처럼 명쾌하지도 녹록하지도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내 삶에 마음을 쓰고 주의를 기울이며 보살피는 모든 방식, 서로 기대어 살 수밖에 없는 타자에 대한 연민을 가지고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 돌봄이고, 인간의 삶이 아닐까?
<죽음 낯설게 보기>는 죽음을 너무 당연하고 가벼이 여긴 내게, '앎'과 '사유'라는 부분을 동시에 만족시켜 준 귀한 책이다. 앎으로 머리를, 철학으로 가슴을 채워준 박혜윤 작가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이제 나도 어떻게 죽고, 어떻게 떠나보낼 것인가라는 질문을 안고, 어떻게 인간답게 살 것인지 새롭게 고민하는 매일의 여정을 떠나야겠다.
이정화 크리스티나
가톨릭일꾼 코디네이터
신수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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