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하는가
조광호 신부의 동검도 이야기
가을이 왔다 — 빛과 음이 열어 놓는 초월의 문
가을이 왔다. 동검도 채플의 아침 공기가 어느새 맑고 투명해졌다. 문을 열면 강화만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먼저 들어오고, 초가을 햇살이 채플 안으로 길게 스며든다. 멀리 마니산과 초피산의 능선이 푸른빛 속에 떠 있다.
채플 안에는 언제나 조용한 찬트가 흐른다. 노래가 공간을 채우고, 빛이 그 노래 위에 내려앉는다. 어느 순간 나는 빛 속에 펼쳐진 보이지 않는 음계를 한 계단씩 밟으며 올라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빛이 음악이 되고, 음악이 공간이 되며, 공간은 다시 깊은 침묵으로 스며든다.
그 순간 작은 채플은 더 이상 작은 공간이 아니다. 벽과 천장으로 둘러싸인 몇 평의 공간이 빛과 음을 통하여 서서히 열리고 확장된다. 창을 통과한 한 줄기 빛과 낮게 흐르는 찬트가 서로 만나면서, 눈에 보이는 공간 너머에 또 하나의 공간이 열리는 듯하다.
좁은 채플이 어느 순간 무한을 품는다. 빛은 벽을 넘어가고, 음악은 천장을 넘어가며, 침묵은 내 안의 가장 깊은 곳까지 내려간다. 나는 더 이상 하나의 공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비 안으로 들어와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쩌면 이것이 초월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초월은 현실을 떠나는 일이 아니다. 지금 여기, 아주 작은 공간 안에서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깊이를 발견하는 일이다. 빛 한 줄기에서 무한을 보고, 한 음의 떨림에서 영원을 듣고, 작은 채플 안에서 하늘의 넓이를 경험하는 것. 아름다움은 그렇게 우리를 다른 곳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을 더 깊이 보게 한다.
그때 아름다움은 더 이상 내가 바라보는 대상이 아니다. 나를 에워싸고 그 안으로 불러들이는 하나의 사건이 된다. 나는 아름다움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내가 그 아름다움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래서 아름다움 앞에서는 설명보다 침묵이 먼저 온다.
우리는 꽃을 바라볼 때 꽃의 구조부터 분석하지 않는다. 저녁노을을 보면서 색채의 파장을 계산하기 전에 마음이 먼저 움직인다. 바흐의 음악을 들을 때에도 음표를 해석하기 전에 어떤 울림이 가슴 깊은 곳을 먼저 건드린다.
아름다움은 그렇게 우리보다 먼저 도착한다. 그리고 조용히 말을 건넨다.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깊다고. 삶은 먹고 살아가는 일만으로 끝나지 않는다고. 보이는 것 너머에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무엇인가가 있다고. 아름다움은 어쩌면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오래된 초대인지도 모른다. 보이는 것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 표면에서 깊이로, 일상에서 신비로, 유한에서 무한으로 건너오라는 초대이다.
아름다움은 예쁨이 아니라 진리의 드러남이다
우리는 흔히 아름다움을 ‘예쁨’과 혼동한다. 그러나 예쁨은 우리의 눈과 취향을 만족시킬 수 있지만, 아름다움은 그보다 훨씬 깊은 곳에서 일어난다. 어떤 존재의 진실이 가려짐을 벗고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 우리는 설명하기 어려운 전율을 느끼고 때로는 눈물을 흘린다. 진리의 드러남, 바로 거기에서 아름다움이 시작된다.
아름다움은 현실의 표면을 꾸미는 장식이 아니다. 존재 깊숙이 감추어져 있던 진실이 어느 순간 빛을 얻어 우리 앞에 나타나는 사건이다. 렘브란트가 그린 늙은 얼굴,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루오의 상처 입은 인간들, 고야가 그려낸 전쟁의 참혹함은 단순히 예쁘지 않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앞에서 깊은 아름다움을 느낀다. 왜일까. 그 작품들이 인간 존재의 진실을 감추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에 내재된 깊은진실을 통해 진리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희랍어에서 진리를 뜻하는 말은 알레테이아(ἀλήθεια)이다. 철학의 전통에서는 이 말을 흔히 감추어져 있던 것이 가려짐을 벗고 드러나는 것, 곧 ‘비은폐’의 의미로 이해해 왔다. 이 말은 아름다움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실마리를 준다.
진리가 추상적인 관념으로 머물지 않고 색과 형태, 얼굴과 몸짓, 음악과 침묵을 통하여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 우리는 그것을 아름다움으로 경험한다. 아름다움은 진리가 감각할 수 있는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한 사람의 얼굴에 새겨진 주름에서 우리는 단순한 늙음을 보지 않는다. 그 속에서 지나온 세월을 보고, 고통과 인내를 보고, 사랑과 상실을 바라본다. 마침내 한 인간이 살아온 생애 전체를 만난다. 그래서 때로는 늙은 얼굴이 젊은 얼굴보다 더 아름답다. 상처 입은 손이 매끄러운 손보다 더 아름다울 수도 있다. 아름다움은 완벽함에만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상처와 흔적, 지나간 시간과 견디어 낸 삶 속에서 더 깊이 드러나기도 한다.
아름다움에는 왜 슬픔이 스며 있는가
아름다움에는 이상하게도 언제나 조금의 슬픔이 섞여 있다. 우리가 꽃을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그것이 영원히 피어 있기 때문이 아니라, 곧 시들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저녁노을이 그토록 아름다운 것도 잠시 후 사라질 빛이기 때문이다.
젊음은 지나간다. 얼굴에는 주름이 생긴다. 사랑하는 사람과도 언젠가는 헤어져야 한다. 우리가 붙잡고 싶은 순간들은 손가락 사이의 물처럼 흘러간다.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다. 그래서 아름다움은 우리를 기쁘게 하면서 동시에 가슴 한구석을 아프게 한다.
그러나 그 슬픔은 절망이 아니다. 모든 것이 영원하지 않다는 사실이 오히려 지금 이 순간을 더 깊이 바라보게 한다. 사라질 것을 알기에 우리는 더 사랑한다. 헤어질 것을 알기에 만남이 소중하다. 죽음을 알기에 한 사람의 생명이 귀하다. 아름다움에는 그래서 어떤 애틋함이 있다. 영원할 수 없는 존재가 영원을 그리워하는 데서 오는 슬픔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아름다움은 다시 초월과 만난다. 인간은 유한하지만 무한을 그리워한다. 시간 속에 살면서 영원을 꿈꾸고, 사라지는 것들을 바라보면서 사라지지 않는 것을 찾는다. 어쩌면 아름다움이 우리를 흔드는 까닭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아름다움은 인간에게 자신의 유한함을 깨닫게 하면서 동시에 그 유한함 너머를 바라보게 한다. 그래서 아름다움의 슬픔은 끝이 아니라 문이다.
유한한 존재가 무한을 그리워하는 순간, 아름다움은 초월의 문이 된다. 십자가도 바로 이 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십자가는 인간의 눈으로 보면 결코 아름다운 장면이 아니다. 폭력이고 고통이며 죽음이고 실패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는 바로 그 십자가에서 가장 깊은 아름다움을 발견한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사랑의 진실이 남김없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그 사랑이 십자가에서 형상을 얻었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은 완벽한 외형이 아니다. 진리가 사랑을 통하여 모습을 드러낼 때 생겨나는 빛이다. 진리 없는 아름다움은 장식으로 머물기 쉽고, 사랑 없는 진리는 차가운 명제가 되기 쉽다. 그러나 진리와 사랑이 만나 자신의 모습을 드러낼 때 우리는 그 빛을 아름다움이라 부른다.
예술과 종교는 왜 아름다움 안에서 만나는가
인류의 위대한 예술 앞에는 언제나 어떤 침묵이 있다. 샤르트르 대성당에 들어설 때, 바흐의 수난곡을 들을 때, 미켈란젤로의 「피에타」 앞에 설 때 우리는 잠시 말을 잃는다. 그 작품들은 무엇인가를 설명하기보다 우리를 다른 차원으로 데려가기 때문이다. 바로 여기에서 예술과 종교는 놀랍도록 가까워진다.
예술도 종교도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려는 것이 아니다. 둘은 인간을 더 깊은 세계로 이끌고, 익숙한 현실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며, 인간 자신을 변화시키려 한다. 예술은 색과 형태와 소리를 통하여 보이지 않는 것을 느끼게 한다. 종교는 말씀과 상징과 전례를 통하여 초월적인 것을 인간의 삶 안에 현존하게 한다. 그래서 예술에는 어떤 성사적 구조가 있다.
보이는 것을 통하여 보이지 않는 것이 드러난다. 한 조각의 빵과 포도주가 성사의 표징이 되듯, 하나의 색채와 선, 한 줄의 시와 하나의 음도 인간 존재의 깊은 곳을 열어 보일 수 있다. 향, 촛불, 노래, 침묵, 공간, 몸짓, 빛. 이 모든 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신비를 보이는 세계 안에서 경험하도록 이끄는 언어이다.
동검도의 작은 채플이 빛과 찬트를 통하여 물리적인 크기를 넘어서는 것처럼, 예술과 종교는 유한한 형식을 통하여 무한을 암시한다. 보이는 것 안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느끼게 하고, 유한한 것 안에서 무한의 흔적을 만나게 한다. 그래서 성당과 사원, 성화와 불상, 이콘과 스테인드글라스, 그레고리오 성가와 오라토리오는 단순히 종교를 장식하는 부속물이 아니었다. 그것들은 인간이 초월을 경험하도록 열어 놓은 문이었다.
예술과 종교는 그래서 같은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지금 눈에 보이는 세계만을 현실의 전부라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우리를 경계 너머로 데려간다. 일상에서 신비로, 소유에서 존재로, 소음에서 침묵으로, 유한에서 무한으로, 자기 자신에게서 자신보다 더 큰 존재로. 바로 그 지점에서 예술은 기도에 가까워지고, 기도는 다시 예술과 만난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을 잃은 종교는 중요한 것을 잃는다.
아름다움을 잃은 종교는 진리를 말하면서도 그 진리를 삶으로 드러내지 못하기 쉽다. 그러면 신앙은 규칙과 금지와 명령만으로 남는다. 그래서 아름다움을 잃은 종교는 미신으로 기울기 쉽다. 여기서 말하는 아름다움은 화려한 성당이나 값비싼 예술품을 뜻하지 않는다. 사랑의 아름다움, 자비의 아름다움, 겸손의 아름다움, 침묵과 배려의 아름다움이다.
예수께서는 죄인을 정죄하기 전에 함께 식탁에 앉으셨고, 병든 사람에게 교리를 설명하기 전에 손을 내미셨다. 상처 입은 이에게 다가가셨고, 버림받은 사람 곁에 머무르셨다. 그리스도교의 아름다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진리가 사랑의 얼굴로 드러날 때 복음은 아름다워진다.
교회가 아름다워진다는 것은 건물이 화려해진다는 뜻이 아니다. 상처 입은 사람이 위로받고, 외로운 사람이 환대받으며, 죄책감에 짓눌린 사람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곳이 되는 것이다. 그곳에서 하느님은 설명되는 것이 아니라 드러난다. 그리고 그 드러남이 아름답다.
그래서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
그렇다면 정말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을까. 아름다움이 전쟁을 당장 멈추게 하지는 못한다. 굶주림을 하루아침에 없애지도 못한다. 인간 안에 깊이 뿌리내린 욕망과 증오를 한순간에 지워 버릴 수도 없다. 그런데도 나는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에는 인간 안에서 아직 죽지 않은 것을 깨우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한 곡의 음악을 듣다가 오래 미워했던 사람을 문득 다시 생각할 수 있다. 한 편의 시를 읽다가 잊고 살았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를 수 있다. 한 장의 그림 앞에서 자신이 걸어온 생을 처음부터 다시 바라볼 수도 있다. 해 질 무렵 바다 위에 번지는 빛을 바라보다가, 아무 이유 없이 그저 살아 있다는 사실이 고마워 눈물이 날 때도 있다. 바로 그 순간, 인간은 조금 달라진다.
아주 조금일지라도 그 변화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변화는 결국 한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은 우리를 멈추게 한다. 멈추어 바라보게 하고, 오래 바라보다가 경탄하게 하며, 마침내 나보다 더 큰 무엇 앞에 조용히 서게 한다. 그 순간 움켜쥐고 있던 손이 조금씩 풀린다.
소유하려던 사람은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 되고, 경쟁하던 사람은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 되며, 지배하려던 사람은 사랑할 줄 아는 사람으로 조금씩 변해 간다. 그래서 아름다움은 윤리보다 먼저 인간의 마음을 준비시킨다. 선을 행하라고 명령하기 전에 선을 사랑하게 하고, 진리를 믿으라고 강요하기 전에 진리를 그리워하게 하며, 하느님을 증명하기 전에 하느님의 흔적을 느끼게 한다. 아마도 이것이 아름다움이 지닌 가장 깊은 구원의 힘일 것이다.
나는 다시 동검도 채플의 아침에 앉아 찬트를 듣는다. 가슴이 시리도록 맑고 투명한 초가을 햇살이 좁은 바닥을 지나 벽을 타고 오른다. 빛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데 공간을 바꾸어 놓는다. 낮게 울리는 찬트의 한 음이 그 빛을 따라 천천히 떠오른다. 그러자 몇 평 되지 않는 작은 채플이 어느 순간 더 이상 작은 공간이 아니다. 한 줄기 빛은 무한을 향해 길을 내고, 한 음의 떨림은 침묵 속에서 영원으로 번져 간다. 빛과 음은 벽을 넘어 공간을 넓히고, 마침내 내 가슴 깊은 곳까지 들어온다.
그때 나는 잠시 나를 잊는다. 한순간도 놓지 못했던 나, 나의 생각, 나의 욕심, 나의 상처, 나의 옳음까지 잠시 내려놓는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서 있는 마니산과 초피산을 바라본다. 산은 말하지 않는다. 빛도 설명하지 않는다. 음악도 무엇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침묵 속에서 나는 알아듣는다. 인간은 자기 자신만으로 완성될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우리 안에는 언제나 지금 보이는 것보다 더 멀리 가고 싶어 하는 그리움이 있다. 유한한 것을 사랑하면서도 영원을 꿈꾸고, 사라지는 것 앞에서 슬퍼하면서도 사라지지 않는 것을 갈망한다. 칼 라너가 인간 안의 초월적 지향을 말했듯이, 하느님께서는 우리 존재 가장 깊은 곳에 자기 자신을 넘어서는 그리움을 심어 놓으셨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름다움 앞에 서면 기쁨만 오는 것이 아니다. 어딘가 모르게 가슴이 시리다. 너무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보며 슬퍼지는 까닭도, 꽃이 피는 순간 벌써 질 것을 생각하는 까닭도,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오래 바라볼수록 언젠가 헤어져야 한다는 사실이 아파오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아름다움은 우리에게 인간의 유한함을 보여 준다.
그러나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사라지지 않는 것을 그리워하게 하고, 상처 속에서도 사랑을 발견하게 하며, 보이는 것 안에서 보이지 않는 신비를 느끼게 한다. 그리하여 아름다움은 유한한 인간 안에 무한을 향한 문 하나를 열어 놓는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놀라운 은총이다. 아름다움이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진리만을 주신 것이 아니다. 그 진리가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을 알아볼 수 있는 눈도 주셨고, 그 신비가 울려 오는 소리를 알아들을 수 있는 귀도 주셨으며, 그 앞에서 가슴 떨릴 수 있는 마음까지 주셨다.
진리가 사랑의 빛을 입고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낼 때, 우리는 그것을 아름다움이라고 부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아름다움은 장식이 아니다. 삶의 가장 깊은 곳에서 진리가 자신을 드러내는 하나의 사건이다. 그리고 바로 그때 인간은 변한다. 닫혀 있던 마음이 열린다. 굳어 있던 마음이 부드러워진다. 미워하던 사람이 다시 사람으로 보이기 시작한다. 잊고 있던 감사가 돌아오고, 오래 놓쳐 버렸던 사랑이 다시 말을 건다.
어쩌면 하느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는 방식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억지로 끌고 가시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으로 마음을 움직이시고, 명령으로 굴복시키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빛으로 우리를 부르시는 것.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시지만, 그 부르심의 가장 깊은 곳에는 강제가 아니라 사랑이 있다.
한 사람이 그 빛을 본다. 그리고 다시 사랑을 선택한다. 그 사랑이 또 한 사람에게 건너간다. 한 사람의 용서가 한 가정을 살리고, 한 사람의 자비가 한 공동체를 바꾸며, 한 사람의 따뜻한 손길이 절망 속에 있던 한 생명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
세상은 아마 그렇게 구원되어 갈 것이다. 거대한 함성보다 조용한 마음 하나에서, 거창한 선언보다 다시 사랑하기로 결심한 한 사람에게서. 그래서 나는 이제 조금 알 것 같다. 도스토옙스키의 말처럼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것은, 아름다움 자체가 세상을 마술처럼 바꾸어 놓는다는 뜻이 아니다.
아름다움은 인간이 다시 사랑할 수 있도록 인간을 되돌려 놓는다. 그것이 구원의 시작이다. 다시 채플에 찬트가 흐른다. 빛은 천천히 벽을 타고 오른다. 나는 그 빛 안에서 멀리 마니산과 초피산을 바라본다. 모든 것은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이 아침도, 이 빛도, 이 노래도, 그리고 나 역시. 그러나 이상하게도 슬프지만은 않다. 사라지는 것 한가운데서 사라지지 않는 무엇을 잠시 보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그리고 바로 그 사랑이 진리의 얼굴이며, 그 진리가 빛을 입고 우리 앞에 나타난 모습을 우리는 아마 아름다움이라 부르는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아름다움 앞에서 멈추어 서고, 자기 자신을 잠시 내려놓고, 다시 누군가를 사랑하기로 선택하는 바로 그 순간, 세상은 이미 아주 조금 구원되고 있다.
아니, 어쩌면 하느님의 구원은 언제나 그렇게 시작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 줄기 빛으로. 한 음의 떨림으로. 한 사람의 가슴속에서 다시 살아나는 사랑으로. 그래서 나는 믿는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한다.
조광호 신부
1967년 천주교 성 베네딕도 수도회에 입회하여 서울 가톨릭대 신학부를 졸업하고, 신부가 된 다음 독일 뉘른베르크 미술대학을 졸업했다. 천주교 주교위원회 출판국장으로 천주교 200주년 기획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독일유학 후 한국현대미술 50년전, 일본 국제 현대미술전 및 국내외(독일, 미국, 오스트리아) 10여 차례 개인전과 여러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월간 영성문화교양지 <들숨날숨>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인천가톨릭대학교 조형예술대학 학장을 역임하고, 현재 강화 동검도 채플과 갤러리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대표적인 미술 작품으로는 부산 남천 성당 유리화와 서울 2호선 당산철교 외벽의 벽화, 서소문 현양탑 등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그대 문의 안과 밖에서>, <꽃과 별과 바람과 시 - 조광호 신부 그림 에세이>, <얼굴 - 조광호의 그림과 글>, <Angel - 조광호 신부 명상 Drawing>, <조광호의 스테인드글라스> 등이 있다.
종이신문<가톨릭일꾼>(무료)정기구독 신청하기
http://www.catholicworker.kr/com/kd.html
도로시데이영성센터-가톨릭일꾼후원하기
https://v3.ngocms.co.kr/system/member_signup/join_option_select_03.html?id=hva8204
유튜브 강의/한상봉TV-가톨릭일꾼
https://www.youtube.com/@tv-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