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물로 내어주는' 노동의 존엄

최태선 칼럼

2026-09-21     최태선
사진출처=pixabay.com

올해 텃밭농사는 완전히 엉터리였습니다. 마지막 심은 옥수수도 개미와 진딧물의 공격으로 과연 옥수수를 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잘 자라다 이유 없이 시들어버린 방울토마토 자리에 심은 것입니다. 옥수수마저 망한다면 가지와, 여러 종류의 고추 중 청양고추만이 열매를 딴 것이 됩니다. 청양고추도 수확량이 형편없기는 마찬가지지만 그나마 살아남아 적게라도 딸 수 있었다는 것이 위안입니다.

옥상에서 빗물을 받는 일부터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항아리 5개에 물을 받아놓는데 일주일이면 다 썼습니다. 하지만 비는 그렇게 자주 내리지 않아 할 수 없이 집에서 물을 받아 가지고 내려가야 했습니다. 우리 집은 4층입니다. 4층에서 계단으로 2리터 물병 열여섯 개 정도를 매일 나르는 일은 그야말로 중노동이었습니다. 그래도 처음에 상추를 몇 집과 나눌 수 있었던 것이 위안이 됩니다.

어쨌든 형편없는 농사였습니다. 하지만 들어간 노동은 어마어마했습니다. 모기에 물려가며 날마다 물을 주는 일과 일일이 진딧물을 손으로 긁어내는 일과 잘 보이지도 않는 작은 벌레들을 잡는 일까지 정말 손이 많이 갔습니다. 중간에 포기하고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지금까지 왔습니다.

도대체 왜 주님은 이런 일을 하게 하셨을까요?

저는 제게 일어나는 모든 일은 주님의 허락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다고 믿고 있습니다. 올해의 텃밭농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왜 이토록 형편없는 농사를 짓게 하셨는지를 곰곰이 생각해왔습니다. 물론 저의 인내심과 신실함을 위한 영적인 훈련이 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 이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생명을 소중하게 대하는 것도 있고, 노동을 계속한다는 사실도 있습니다. 특히 애정을 가지고 노동을 한다는 것에 주목합니다.

'선물로 내어주는' 노동의 존엄

오늘 대전에 있는 빵집 성심당을 주제로 한 기사에서 AI가 할 수 없는 일로 언급된 표현인데 이 말이 제게 다가왔습니다. AI가 과연 이타적일 수 있을까요? AI가 이타적인 일을 할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 AI가 이타적이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AI가 노동을 선물로 내어주는 일은 생각보다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무엇보다 그렇게 선물로 내어주는 노동이 존엄한 것이라는 이해는 제게 참 의미 있게 다가왔습니다.

무엇이든 돈으로 환산할 수 있어야 가치를 부여하는 돈 세상에서 “선물”이라는 단어는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하지만 선물을 생각해 보면 비싼 것이 좋다는 의식이 제 머릿속에도 자리하고 있습니다. 선물까지도 오염되었다는 것을 이 사실을 통해 확인하게 됩니다. 사실 데라다가 말하는 “부채의식이 없는 선물”이란 우리 시대에 낯선 개념입니다. ‘선물로 내어주는’ 노동의 존엄이란 말도 그런 의미에서 우리 시대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개념임에 틀림없습니다.

삼십 년도 더 된 오래 전 일입니다. 타고 다니던 포니의 배터리가 나갔습니다. 보닛을 열고 들여다보고 있는 제게 한 차량이 다가왔습니다. 제게 배터리가 나갔냐고 물어본 후에 트렁크에서 점프선을 꺼내 연결한 후 제 차의 시동을 걸어주었습니다. 다행히 시동이 걸렸고, 집으로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백미러를 통해 보니 시동을 걸어주었던 분의 차가 저를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저는 이제 집에 거의 다 왔으니 가셔도 된다는 손짓을 하였지만 그분은 웃으며 저를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손짓을 하고 난 후 다시 시동이 꺼졌습니다. 그러자 그분은 다시 점프선을 꺼내 연결해 시동을 걸어주었습니다. 다시 출발한 제가 아파트 입구로 들어가는 곳을 본 후에 그분은 자신이 갈 곳으로 가셨습니다.

그 일이 제게는 큰 교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저도 점프선을 사서 차에 싣고 다니게 되었고, 시동이 꺼진 차를 보면 차를 세우고 시동을 걸어주게 되었습니다. 신학교를 다니던 시절이었는데 신학생들의 차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티코였고, 기온이 내려가면 배터리가 방전되어 시동이 걸리지 않는 차들이 많았습니다. 그런 차들에게 시동을 걸어 준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나중에는 배터리가 방전되면 신학생들이 저를 찾아올 정도가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렇게 시동을 건 신학생들 가운데 저처럼 점프선을 사서 가지고 다니는 사람들이 생겼을 것입니다.

이런 것이 선순환입니다. 그런 선순환이 일어나게 한 것이 바로 '선물로 내어주는' 노동의 존엄이었습니다. 제 과거의 경험이 그 말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었고, 소득 없는 텃밭농사는 그 일을 위한 훈련이었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것은 가치가 없는 것이라는 先(선)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해로부터 벗어나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저는 그것을 깨야 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을 늘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 백성들의 삶의 방식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고, 다른 사람과 이익을 공유하거나 나누고, 자신의 몫을 절약하여 일할 수 없거나 소득이 없는 사람들과 나누는 것은 노동의 존엄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땅을 아무리 파 보라면서 십 원짜리 하나도 안 나온다는 말을 합니다. 돈에 경도된 사람들의 가치관에서 나오는 말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를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거기에 보면 강제노동수용소에 갇힌 죄수들이 하는 일은 하루 종일 언 땅을 파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구덩이를 다 판 후에는 그것을 다시 매몰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기껏 파놓은 땅을 다시 메우는 일이 죄수들의 절망을 불러온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그 일이 노동의 존엄을 깨뜨리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는 가서 설교하던 요양원엘 안 나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받던 오십만 원도 받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기초연금 외에 제가 받을 수 있었던 유일한 수입이 사라졌습니다. 아내에게 미안한 일입니다. 그리고 오래도록 잊고 지내던 가장으로서의 무책임이 다시 소환되었습니다. 노인 일자리라도 지원할까 하는 생각이 늘 머리에 머물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돈이 모든 것인 세상에서 돈 없이 사는 것이 저의 사명입니다. 가난하게 사는 것이 제가 받은 사명입니다.

제가 '선물로 내어주는' 노동의 존엄이라는 표현에 이끌린 것은 가난이 제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선물로 내어주는' 노동의 존엄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 것이야말로 그 사명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노동이 노동을 존엄 있게 한다는 제게는 정말 큰 울림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주님은 그 일을 위해 제게 쓸모없는 텃밭농사를 짓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기대합니다. 주님께서 저를 어떻게 사용하실지 늘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하루는 천 년 같습니다. 하지만 천 년이 하루 같기도 한 것이 그분의 시간입니다. 그래서 저는 최선을 다해 '선물로 내어주는' 노동을 할 수 있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운동을 합니다. 바라기는 '선물로 내어주는' 노동의 존엄이 무엇인가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보여주고 싶습니다. 성심당처럼 선순환을 일으켜 세상을 바꾸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철학이 아니라 복음으로 그 일을 하고 싶습니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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