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디에서 용서와 자비를 구할 것인가"

조광호 신부의 동검도 이야기

2026-09-14     조광호
동검도

1. 세상이 뜨거워졌다

우리는 참으로 뜨거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자연부터 뜨거워졌다. 살인적인 폭염이 사람과 생명을 지치게 하고, 산불은 숲과 삶의 터전을 삼킨다. 또 다른 곳에서는 폭우와 홍수가 모든 것을 휩쓸어 간다. 불과 물이 재앙이 되어 인간에게 되돌아오는 모습을 우리는 날마다 목격한다.

세상도 뜨겁다. 전쟁의 불길은 좀처럼 꺼지지 않는다. 폭력은 폭력을 낳고,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부른다. 그러나 자연과 세상보다 더 뜨거워진 것이 있다. 바로 인간의 마음이다. 정치와 사회, 인터넷과 일상의 관계 속에서 분노는 너무 쉽게 번진다. 생각이 조금만 달라도 상대를 적으로 만들고, 이해하기 전에 판단하며, 대화하기 전에 공격한다.

모두가 상처받았다고 말한다. 모두가 정의를 요구한다. 모두가 누군가의 사과를 기다린다. 그런데 정작 나는 누구에게 용서를 청해야 하는지, 누구를 용서해야 하는지는 점점 더 알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묻게 된다. 이 뜨거운 분노의 시대에 우리는 어디에서 용서와 자비를 구할 것인가.

그리스도교 신앙의 중심에는 사랑이 있다. 그리고 사랑이 가장 힘겨운 모습으로 드러나는 자리에 용서가 있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잘못을 못 본 체하는 사랑이 아니다. 죄와 상처를 직시하면서도 인간을 그 죄와 상처 속에 영원히 가두지 않고 다시 살아갈 길을 열어 주는 사랑이다.

2. 용서의 주객이 뒤바뀔 때

오늘의 분노에는 묘한 혼란이 있다. 때로는 용서의 주객이 뒤바뀐다. 내가 상대에게 상처를 주었는데도 내가 더 화를 낸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분노하면서도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왜 나를 인정하지 않는가."
"왜 내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가."
"왜 내 뜻대로 하지 않는가."

그 분노의 밑바닥을 조용히 들여다보면 때로는 정의보다 상처 입은 자존심이 있고, 사랑보다 인정받고 싶은 욕망이 있으며, 관계보다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집착이 숨어 있다. 물론 모든 분노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불의와 폭력 앞에서 일어나는 분노는 필요하다. 피해자에게 용서를 서둘러 요구하는 것은 또 다른 상처가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내 분노를 식별해야 한다.

이 분노는 정의에서 오는가, 아니면 내 욕망에서 오는가.
나는 정말 상처받은 사람인가, 아니면 자존심이 상한 사람인가.
나는 용서해야 할 사람인가, 아니면 먼저 용서를 청해야 할 사람인가.

이 질문을 잃어버리는 순간 우리는 너무 쉽게 자신을 피해자로 만들고 상대를 죄인으로 만든다. 신앙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헤아리기 전에 나 자신을 하느님 앞에 세운다. 내가 옳다는 확신을 잠시 내려놓고 내 마음의 어두운 구석까지 바라보게 한다. 어쩌면 용서는 상대방을 내려놓는 것보다 먼저, '내가 옳다'는 집착과 모든 것이 내 뜻대로 되어야 한다는 욕망을 내려놓는 데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3. 나는 용서하기 전에 먼저 용서받았다

마태오 복음에서 베드로가 예수님께 묻는다.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그리고 만 탈렌트를 빚진 종의 비유를 들려주신다.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진 종이 주인 앞에 엎드려 자비를 청한다.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빚까지 탕감해 준다. 그런데 그 종은 밖으로 나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를 만나자 멱살을 잡는다. 
"빚진 것을 갚아라."
이 장면은 인간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여 준다.

그는 용서받았다. 그러나 용서받은 사람답게 살지 못했다. 그의 문제는 용서받지 못한 것이 아니라, 용서받고도 변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자비를 받은 사람이 심판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우리 역시 하느님께는 한없는 자비를 청하면서 다른 사람의 작은 허물에는 냉정할 때가 있다. 내 잘못에는 사정이 있다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의 잘못에는 이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나는 이해받기를 바라면서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데에는 인색하다.

그래서 복음이 말하는 용서는 "내가 누구를 용서할 것인가"라는 질문보다 더 깊은 곳에서 시작한다. 나는 용서하는 사람이기 전에 먼저 용서받은 사람이다. 하느님께서 먼저 나를 사랑하셨고, 기다려 주셨으며, 다시 시작할 기회를 주셨다. 그러므로 용서는 내가 남에게 베푸는 대단한 관용이 아니다. 내가 받은 자비를 기억하는 일이며, 그 자비가 나에게서 멈추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4. 용서와 화해 사이에서

그러나 용서를 말할 때 반드시 구별해야 할 것이 있다. 용서와 화해는 같지 않다. 용서는 한 사람이 하느님 앞에서 시작할 수 있다. 상대에 대한 미움과 복수심이 내 삶 전체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마지막 심판을 하느님께 맡기는 것이다. 그러나 화해는 관계를 다시 세우는 일이다. 그러므로 화해에는 잘못한 사람의 인정과 회개, 진실한 사과와 책임이 필요하다.

상처 준 사람이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살아가면서 피해자에게만 "용서해야 한다"고 요구한다면 그것은 화해가 아니다. 용서가 반드시 이전의 관계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도 아니다.

때로는 거리를 두어야 한다.
때로는 책임을 물어야 한다.
때로는 관계를 새롭게 정리해야 한다.
그래도 용서는 가능하다.

화해는 둘이 함께 만들어 가야 하지만, 용서는 내가 하느님 앞에서 먼저 시작할 수 있다. 용서는 불의를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불의가 내 안에서 끝없는 미움과 복수로 자라지 못하게 하는 일이다. 그리고 참된 화해를 위해서는 용서받는 사람도 변해야 한다. 

"나는 용서받았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하느님의 용서를 진정으로 체험했다면 그 용서는 회개와 삶의 변화로 드러나야 한다. 그러므로 일흔일곱 번의 용서를 말한다면, 우리에게는 일흔일곱 번이라도 고개 숙여 말할 수 있는 겸손도 필요하다.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가 당신에게 상처를 주었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어쩌면 "당신을 용서합니다."라는 말보다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라는 말이 더 어려울지도 모른다. 용서는 그렇게 정의와 자비, 진실과 사랑이 만나는 자리에서 비로소 깊어진다.

5. 분노가 나에게서 멈추게 하는 것

용서는 기억을 지우는 일이 아니다. 상처를 없었던 일로 만드는 것도 아니며, 잘못을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잘못은 분명히 잘못이라고 말하면서도, 그 잘못 때문에 한 인간 전체를 미움 속에 가두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용서를 이렇게 생각해 본다.

용서는 상처가 내 안에서 미움으로 변하는 것을 멈추는 일이다. 그리고 조금 더 깊이 말한다면, 용서는 상처 입은 기억 속에 다시 사랑을 심는 일이다. 어떤 상처는 오래 남는다.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도 그 사람을 다시 만나면 마음이 아플 수 있다. 오래된 기억 하나가 되살아나 다시 분노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용서에 실패한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여라."라는 말씀은 모든 상처를 한순간에 잊어버리라는 뜻이 아닐 것이다.
상처가 다시 떠오를 때마다,
분노가 다시 고개를 들 때마다,
일흔일곱 번 다시 미움보다 사랑을 선택하라는 말씀일 것이다.

그리스도교 사랑의 절정은 십자가에 있다. 십자가는 상처가 없는 사랑을 보여 주지 않는다. 오히려 상처 입고 버림받으면서도 증오로 끝나지 않는 사랑을 보여 준다. 그래서 사랑은 상처받지 않는 능력이 아니라, 상처받고도 미움으로 끝나지 않는 힘인지도 모른다. 이 뜨거운 분노의 시대에 우리가 세상의 모든 분노를 멈출 수는 없다. 그러나 한 가지는 할 수 있다.

분노가 나에게서 멈추게 하는 것.
복수가 나에게서 멈추게 하는 것.
그리고 나에게서 다시 자비가 시작되게 하는 것.

그렇다면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어디에서 용서와 자비를 구할 것인가. 결국 하느님의 마음이다. 내가 먼저 그 자비로 용서받았음을 깨달을 때, 비로소 나도 누군가에게 자비가 될 수 있다. 뜨거운 분노의 시대에 필요한 것은 더 큰 분노도, 더 큰 목소리도 아닐 것이다. 어쩌면 한 사람의 조용한 결심이면 충분할지도 모른다.

나는 또 하나의 분노가 되지 않겠다. 
누군가에게서 시작된 미움이 나를 지나 또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게 하지 않겠다.
내가 받은 하느님의 자비가 나에게서 다시 시작되게 하겠다.

그 작은 결심에서 용서가 시작된다. 그리고 바로 그 자리에서 사랑은 다시 살아난다. 그 사랑을 구하며, 오늘도 이렇게 청한다.

 

조광호 신부
1967년 천주교 성 베네딕도 수도회에 입회하여 서울 가톨릭대 신학부를 졸업하고, 신부가 된 다음 독일 뉘른베르크 미술대학을 졸업했다. 천주교 주교위원회 출판국장으로 천주교 200주년 기획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독일유학 후 한국현대미술 50년전, 일본 국제 현대미술전 및 국내외(독일, 미국, 오스트리아) 10여 차례 개인전과 여러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월간 영성문화교양지 <들숨날숨>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인천가톨릭대학교 조형예술대학 학장을 역임하고, 현재 강화 동검도 채플과 갤러리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대표적인 미술 작품으로는 부산 남천 성당 유리화와 서울 2호선 당산철교 외벽의 벽화, 서소문 현양탑 등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그대 문의 안과 밖에서>, <꽃과 별과 바람과 시 - 조광호 신부 그림 에세이>, <얼굴 - 조광호의 그림과 글>, <Angel - 조광호 신부 명상 Drawing>, <조광호의 스테인드글라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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