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 설교 하나, "완전하여라!"
최태선 칼럼
그리스도교 신앙에서 가장 어려운 것은 무엇일까요?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가장 어려운 것은 근본적으로 욕망의 극복입니다. 남성들에게 여성의 유혹은 넘기 힘든 본성입니다.
예수원을 세우신 대천덕 신부님이 육십 대일 때 그분은 자신이 가장 경계하는 것이 성적 유혹이라는 사실을 밝힌 적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젊은 여인들을 조심해서 대한다는 말을 하였습니다. 조금은 의외였습니다. 굳이 그런 말을 할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이 매우 현명했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오래 전 들은 일입니다. 통일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 자신들의 신분을 감추고 한국의 유명한 목사들을 해외여행을 보내주었습니다. 개인에게 호텔 방을 배정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밤이 되자 도어벨이 울렸고, 문을 열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아름다운 여자가 목사의 품으로 달려들었습니다. 목사들 가운데 여자를 밀어낸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그 일 이후 영향력을 가진 그 유명하신 목사님들은 통일교가 한국에 들어오는 것에 반대하는 이가 단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미 책을 잡힌 그분들은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그렇게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여인을 거절할 수 있는 남자는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특히 권위가 생기면 그런 유혹은 다가오기 마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수많은 여인들을 거느리는 것은 황제만이 아닙니다. 권위는 유혹을 가능하게 하고, 특히 그럴 때 그 유혹을 거절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도 거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을 저는 장 바니에와 하워드 요더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공동체의 권위자인 그 둘은 모두 성적인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장 바니에는 물론 도덕적 평판이 높은 아나밥티스트였던 하워드 요더 역시 성적인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단순히 넘어간 것이 아니라 의도적이었고 반복적이었습니다.
가난해진 저는 그런 유혹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특히 나이가 드니 제 옆으로 지나가는 여인들조차 발걸음을 빨리 해서 지나칩니다. 가난이 얼마나 영적으로 유익한지를 이 사실을 통해서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더욱 가난해진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래도 경계를 풀지 말아야 합니다.
오래 전 읽은 시드니 쉘던이 쓴 소설의 한 대목이 생각납니다. 그곳에 등장하는 늙은 남자는 돈이 많고 탐욕스러울 뿐만 아니라 잔인하기까지 한 사람이었습니다. 돈이 많기에 그는 많은 여자들을 취했습니다. 그중 한 여인은 나이가 많은 그 남자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나이 많은 그 남자가 사고로 전신마비 장애인이 되었습니다. 그런 남편이 보는 앞에서 아내가 된 여인은 젊은 다른 남자를 불러 바람을 피웠습니다. 그렇게 잔인했던 그 남자에게 복수한 것입니다. 전신이 마비되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남자는 질투와 죽이고 싶은 마음으로 이글거리는 눈으로 젊은 두 연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쉘던은 그런 상태에서도 정욕이 사라지지 않던 늙은 남자의 심리를 정확하게 묘사했습니다. 정욕은 늙어서도 사라지지 않습니다. 오래도록 노인요양원을 드나들었던 저는 기저귀를 차면서도 자신들을 보살피는 케어 선생님들에게 성희롱을 하지 않는 할아버지를 본 적이 없습니다.
"나하고 침실로 가요!"
용모가 준수하고 잘생긴 미남이었던 요셉에게 보디발의 아내가 한 말입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을 자기 방으로 불러 이렇게 유혹하였습니다. 막무가내로 요셉을 끌어안았습니다. 요셉은 그런 보디발의 아내를 밀어내고 도망을 쳤고, 수치심에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을 모함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결백함에도 불구하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의 시험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통과하기 어려운 하느님의 시험을 통과하였습니다. 새삼 요셉이 존경스럽습니다. 누구도 이기기 어려운 하느님의 시험을 그는 이렇게 통과하였습니다. 사실 부럽기도 한 대목입니다. 그동안 저는 크고 작은 하느님의 시험에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가난한 제게 요셉과 같은 시험은 닥치지 않았지만 그래도 시험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길에 휴지 하나 버리는 것조차도 도덕적인 시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무의식적으로 반복해서 그런 작은 시험들에 굴복하곤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마태 5,48)
우리는 하느님처럼 전지전능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우리에게 전지전능해지라는 요구가 아니라 도덕적으로 흠결이 없는 사람이 되라는 요구로 바라보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영성 신학자인 리처드 포스터는 <돈 섹스 권력>이라는 책에서 인간이 얼마나 욕망의 유혹 앞에 무력한 존재인지를 보여주었습니다. 처음 그의 책을 대했을 때, 제가 얼마나 그 제목에 등장하는 욕망들을 추구하고 있는지를 인정해야 했습니다. 사실 저는 그렇게 솔직한 것이 인간이라는 생각까지 했습니다. 지금도 여전히 그런 욕망에 휘둘리는 존재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확인하게 됩니다.
“나는 속사람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즐거워하나, 내 지체에는 다른 법이 있어서 내 마음의 법과 맞서서 싸우며, 내 지체에 있는 죄의 법에 나를 포로로 만드는 것을 봅니다. 아, 나는 비참한 사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 주겠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건져 주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러니 나 자신은, 마음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섬기고,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고 있습니다.”(로마 7,22-25)
저는 이 말씀이 정확한 인간의 실존이라고 생각합니다. 욕망의 존재인 나는 시도 때도 없이 죄의 법에 사로잡히는 존재입니다. 그런 나에 대한 절망이 없다면 나는 언제나 욕망에 굴복하는 존재가 되어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집니다. 내 의지로는 욕망을 극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저는 인정합니다.
하워드 요더와 장 바니에와 같이 훌륭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성취와 그로 인한 권위가 오히려 그들의 자아를 부풀리고 그들을 죄의 법에 포로가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자신이 비참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그들이 욕망의 포로가 되었던 것은 얼마나 당연합니까. 그래서 저는 그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나머지 네 손가락이 저를 향하고 있다는 사실만을 기억합니다.
이방인 노예가 되어 요셉은 그 유혹을 물리쳤습니다. 가난이 저를 구원했던 것처럼 그의 신분이 그를 구원했습니다. 죽음의 몸의 성공은 치명적인 영적 올무입니다. “완전하여라”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늘 제 귀에 쟁쟁하기를 기도합니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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