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하는 신과 침묵 당하는 사람' 북토크를 다녀와서

이정화 칼럼

2026-08-03     이정화

지난 7월 18일, 가톨릭일꾼 월례미사가 명동에 위치한 ‘전진상영성센터’에서 봉헌되었다. ‘성분도 은혜의 뜰’에서 공간을 옮긴 것이다. 미사 후 조민아 교수의 신간 <침묵하는 신과 침묵 당하는 사람들> 북토크가 이어졌다. 아이러니하게도 ‘침묵’을 들으러 가는 명동길에는, 많은 인파가 쏟아내는 ‘말’이 난무했다.

조민아 교수는 가톨릭일꾼 사이트와 신문에 가끔 글을 올려주셨는데, 글이 너무 따뜻하고 좋아서 울컥한 때도 있었다. 꼭 한번 얼굴을 보고 싶었는데 이렇게 좋은 책으로, 그것도 ‘가톨릭일꾼’에서 강의까지 해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다. 조민아 교수는 현재 조지타운대학교에서 구성 신학과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같은 거대 담론을 가르치지만, 그녀의 시선은 늘 제도 교회와 신학의 언어 뒤에 가려진, 취약하고 소외된 이들에게 머문다. 그리고 말과 글을 넘어 ‘침묵’을 몸으로 살아내려고 애쓰고 있다.

<침묵하는 신과 침묵 당하는 사람들>은 2025년 미국에서 영어로 쓴 책을, 번역자의 손을 거쳐 한국어로 새롭게 태어났다. 이 과정을 저자는 이렇게 쓰고 있다. “책을 한국어로 옮기는 일은, 단순히 기호를 재배열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생각하고, 다시 쓰는 일에 가까웠다. 한국어 글쓰기는 또 다른 호흡과 책임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번역이 진행되는 동안, 나는 저자의 자리에서 잠시 비켜서 있어야 했다. 그 비켜섬은 상실이라기보다는 이 책이 다른 언어 안에서 새롭게 자리 잡아가는 과정을 가만히 받아들이는 일이었다.” 이 문장 속에는 글쓰는 이의 겸손과 독자에 대한 책임감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나오자마자 구입한 따끈따끈한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경이롭고, 아릿하고, 가슴이 벅차오른다.”는 김기석 목사의 추천사와 달리, 내 머리는 지진이 난 듯 혼란스러웠고 강렬했다. 거의 모든 문장에 밑줄을 치고 포스트잇을 붙였다. 그렇게 책은 ‘고슴도치’가 되어가고 있었다. 1장에서 5장까지 장이 끝날 때마다 각 주가 첨부되어 있는데, 참고도서만도 그 양이 방대하다. 저자가 얼마나 이 책에 심혈을 기울였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최대환 신부는 추천사에서 “그의 삶과 학문의 궤적은 그를 어렵고도 소중한 주제인 ‘침묵’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이토록 섬세하면서도 절실하게 말할 수 있는 공간에 닿게 했다”고 말한다.

저자는 강의 주제가 ‘침묵’이니까 우리도 1분간 침묵하자고 제안한다. 저자가 침묵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한 시기는 ‘코로나19 펜데믹’이었다고 한다. 수백만 명의 죽음을 애도해야 할 바로 그 시간에, SNS를 통해서 수많은 말과 선동, 거짓 정보, 비아냥들이 쏟아져 나왔고, 말로 인해 분열하고 상처받았다. 소위 ‘언어의 위기’를 느꼈고, 말이란 것이 너무 무력하고 빈약해서 펜데믹과 그 이후의 사건들이 남긴 참혹함과 고통을 감당해 낼 수 없었다고 한다.

 

침묵, 강렬한 현존으로 다가온 그 부재

저자는 “언어보다 먼저 존재했고 언제나 우리 곁에 있었던 그 무엇, 누군가 알아채든 알아채지 못하든, 모든 말의 깊은 밑자리에 고요히 깔려 있는 그것, 아직 태어나지 않은 말들의 밑바닥에도, 언어만으로는 온전히 전할 수 없는 의미를 묵묵히 품은 채, 슬픔과 파괴의 한복판에서 그 어떤 것보다 강렬한 현존으로 다가온 그 부재, 그것은 침묵이었다.”고 말한다.

침묵의 얼굴들

저자는 침묵의 ‘다양한 얼굴’들을 설명한다. 코비드로 뉴욕 거리가 텅 비고 시체들을 싣고가는 사람들만 보이는 섬뜩한 침묵, 텅 빈 상점의 침묵, 흑인이라는 이유로 백인 경찰관 데릭 쇼빈의 무릎 아래서 죽어간 ‘조지 플로이드’의 침묵, 코로나로 공장들이 멈추자 맑은 공기와 깨끗한 하늘을 볼 수 있던 신비로운 침묵들까지. 침묵은 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다른 형태의 ‘존재 방식’이며, 침묵은 없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품고 있는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늘 질문한다. “고통의 순간에 하느님은 왜 침묵하시는가?” 저자는 이 질문에 질문을 더한다. “만약 침묵이 하느님의 ‘독특한 언어’인데 우리가 그 침묵을 듣지 못하고 있다면?” “우리는 침묵 속에서, 침묵을 통해서 하느님과 대화할 수 있나?” “하느님은 그 침묵 속에서 침묵을 통해 우리가 무엇을 듣길 바라시나?” 이것이 이 책의 질문들이고 책을 쓴 동기라고 한다.

‘침묵 당하는 사람들’은 ‘억압적인 침묵’을 경험한 사람들, 즉 목소리가 있는데 빼앗긴 사람들이다. 성차별, 인종차별, 가난, 여성들, 성소수자들, 주류에서 벗어난 사람들이다. 억압적 침묵은 이들의 말을 빼앗고 관계로부터 고립시키고 자아를 파괴하고 타인의 존재를 지워버리는 침묵이다. 저자는 “기득권을 가진 우리가 말을 많이 함으로써 그들이 말할 기회를 뺏지 않을까? 언제 예언자처럼 말하고 언제 들어야 할까? 를 고민하며, 우리의 말을 줄이고, 그들의 목소리를 경청하며, 분별과 식별을 하는 자리가 이 책의 의도라고 한다.

저자는 동자동 쪽방촌 청소 봉사를 하면서 오히려 자신이 말을 잃었던 경험을 나눈다. 최악의 고통 속에 있는 이들에게 침묵의 영성을 말하는 것은 위험하며, 영적으로 ‘승화’하라는 말은 그들에게 큰 상처요, 또 다른 폭력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어떤 자리에서 내가 편히 말하고 있다면, 나는 이미 ‘주류’다. 주류에서 밀려난 이들은 이야기를 어떻게 꺼내야 할지 모르고, 어떤 단어를 선택해야 할지도 모르며, 여성들은 남성들이 무슨 생각을 할지 두렵다, 흑인들은 백인들에 비해 발언권을 얻지 못한다. 가난한 사람들은 교육받을 기회의 부재로 ‘무지의 침묵’을 당한다.

반면 ‘영성으로서의 침묵’은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능력 너머의 침묵이다. 하느님과의 관계 형성을 돕는 침묵이며 성찰, 분별, 식별을 통해 나를 돌아보고 이웃을 보는 침묵이다.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들을 드러내는 침묵이다. 침묵하지 않으면 들을 수도 볼 수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코로나 극성기에 예수회에서 고심 끝에 모집한 <금요침묵학교>를 다녔는데, 결석없이 꼬박 3년을 다녀 개근상까지 타는 열성을 보였다. 그때 이냐시오 ‘영신수련’에 대한 강의도 듣고, 실제로 침묵 속에서 간절히 기도도 했다. ‘내가 그때 침묵 속에서 들은 건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기도 안에서라도 만나고 싶은 깊은 갈망이 아니었을까?

망설임과 주저함, 하느님이 일하시는 공간

영성으로서의 침묵이 가능하려면 의도적으로 침묵의 공간과 시간을 마련해야 한다. 세상의 불확실한 것들에 불안해하지 않고 잠시 쉬며, 불확실한 것들 속에서 하느님의 은총이 어떻게 깃드는가를 발견하는 침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은 불확실함보다는 확신을 강요하며 기다려주지 않는다. 저자는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의 <침묵>의 등장인물 중 기치지로를 제일 좋아한단다. 작가는 끊임없이 배신하고 다시 돌아옴을 반복하는 기치지로의 모습에 공감하며, 거기엔 ‘망설임’과 ‘주저함’이 있고, 그 망설임과 주저함이 ‘하느님이 일하시는 공간’임을 발견한다. 소외되고 뿌리뽑힌 이들에 대한 공감과 이해를 한 자만이 볼 수 있는 깊은 통찰이다.

그럼, 침묵 (silence)은 무엇일까? 침묵은 말의 처음과 말의 끝에 있으며, 침묵의 존재 방식은 어디에나 있고, 어디에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침묵은 소리와 말이 사라질 때 드러나는 ‘특정한 유형의 존재’이다. 인간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하느님의 존재 방식’과 닮아있다. 작가는 인간의 고통 또한 말로 표현할 수 없으니, 침묵을 하느님의 ‘신비’와 인간 ‘고통’의 두 실제가 만나는 ‘공간’으로 이해하면 어떨까? 라고 묻는다.

빈 무덤, 가장 비극적이고 신비롭고 장엄한 공간

이 책의 핵심은 ‘빈 무덤의 침묵’에 관한 성찰이다. 성경을 통틀어서 가장 비극적이고 가장 신비롭고 가장 장엄한 공간이 예수의 ‘빈 무덤’이다. 하느님에 대한 말씀 자체가 사라진 공간, 시신이 사라진 상황에서 제자들이 겪은 트라우마는 엄청났을 것이다. 우리는 성경 속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을 단죄하지만, 그들은 죽음과 폭력의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면서 ‘홀로코스트’같은 감정을 겪었을 것이다. 두려움, 절망, 죄책감, 수치심, 자신에 대한 실망 등.

부활을 믿지 않은 제자들에게 남겨진 것은 ‘절망의 끝’이었다. 그때도 하느님은 침묵하신다.

우리는 빈 무덤을 부활의 승리를 극적으로 만들기 위한 ‘문학적 장치’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작가는 동의 못 한다고 단호히 말한다. 빈 무덤은 제자들이 겪었을 그 시간을 생각하면, 그 이후에 주어질 어떤 보상이나 승리나 행복 정도로 축소할 수 없다. 어떤 이는 평생을 빈 무덤에 갇혀 살기도 한다. 세월호의 트라우마가, 이태원의 트라우마가, 팔레스타인 가자의 트라우마가 사라지고 잊혀지는가. 우리들은 빈 무덤의 시간보다 부활에만 집중한다. 작가는 삶과 죽음 사이에서 고통과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며,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트라우마 생존자들의 빈 무덤의 공간을 깊이 들여다봐야 한다고 말한다.

 

가톨릭일꾼에게 바란다

작가는 ’가톨릭일꾼‘에게 바라는 것이라며 ‘저항과 연대를 위한 적극적 침묵’을 제안했다. 첫째, 말하지 않는 연습이다. 언어와 개념으로 규정될 수 없는 영역을 남겨 두는 것, 이것은 대안적 사고, 행동, 존재 방식을 상상할 수 있는 공간이다. 둘째, 불확실한 것을 위한 개방이다. 신비와 은총을 받아들일 수 있는 예측 불가능한 공간을 남겨 두는 것, 이것은 자기중심적 사고와 타인을 지배하려는 강박, 효율성 중심, 즉각적으로 반응해야 하는 불안감에서 자유로워진다. 셋째, 타자를 위한 공간을 마련하는 것이다. 침묵의 신비주의는 우리의 삶이 본질적으로 타자들(산 자와 죽은 자)과 연결되어 있음을 드러내며, 그들과 연대할 수 있는 공간을 제시한다. 상실과 부재를 통한 기억과 연대인 것이다.

<침묵하는 신과 침묵 당하는 사람들>은 읽기 쉽지 않은 책이다. 하지만 놀라운 책이다. 신학과 영성에만 갇히지 않고, 침묵이라는 은유를 통해 나를 성찰하게 하고 이웃, 특히 침묵 당하는 억눌린 이들을 돌아보게 한다. 수많은 말이 난무하는 세상이지만, 그 사이사이 틈새를 타고 침묵이 개입한다. 그 침묵의 소리가 내게 어떤 말을 건네는지 집중해 보자. 내가 감히 이 책에 대한 글을 쓰는 이유는 조민아 작가에 대한 신뢰와 애정 때문이고, 침묵 ‘앞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침묵을 ‘통해서’ 빈 무덤의 삶을 살아가는 억눌린 이들과 ‘고요한 기쁨’을 나누기 위해서다. 글로 담지 못한 주옥같은 문장들을 책으로 만나시길 바란다.

책의 맨 마지막 부분 ”침묵하는 신과 침묵 당하는 자들을 위한 기쁨”을 나눈다.

“우리가 스스로 목소리를 낮추고, 자신의 한계를 겸손히 인정하며, 상처가 깃든 우리의 가장 여린 곳을 믿으며 인내하며 서로에게 귀를 기울인다면, 그 안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다, 침묵 안에서 경외와 경이로 신비 앞에 겸손히 머무는 법을 배울 때, 그 경외와 경이는 다시 침묵으로 돌아간다. 모든 음악이 그러하듯, 신의 말할 수 없는 신비가 된다."

 

이정화 크리스티나
가톨릭일꾼 코디네이터
신수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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