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모 있는 쓸모없는 종

최태선 칼럼

2026-08-03     최태선
사진출처=pixabay.com

오래 전부터 가려고 한 반찬가게가 있었습니다. 적어도 일 년 반 이상을 지난 후인 며칠 전 그곳엘 찾아갔습니다. 이것저것 몇 개 고르니 금세 오만 원어치 정도가 되었습니다. 맛있게 먹을 식구들을 생각하니 저절로 힘이 났습니다. 그리고 딸을 불러 함께 먹었습니다. 그런데 예상 밖으로 맛이 없었습니다. 딸이 좋아하는 게장무침과 간장게장도 그저 그랬고, 특히 잡채는 완전히 엉망이었습니다. 싼 게 비지떡이라는 말이 생각났습니다. 하도 맛이 없고 달기만 해서 단 것을 좋아하는 아내에게 먼저 미안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딸에게도 더운 데 오라고 해서 미안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딸은 그렇게 먼 곳까지 가서 사오느라 수고하셨는데 뭐가 미안하냐고 저를 위로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정말 미안했습니다. 그래서 거듭 미안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정말 망했습니다. 제 계획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래도 딸의 말이 위로가 되었습니다. 저의 노력을 알아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저는 미안한 마음을 거둘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일이 제게 예수님의 비유를 떠올리게 했습니다. “종의 도리”를 비유한 말씀입니다.

“너희 가운데서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있다고 하자. 그 종이 들에서 돌아올 때에 ‘어서 와서, 식탁에 앉아라’ 하고 그에게 말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오히려 그에게 말하기를 ‘너는 내가 먹을 것을 준비하여라.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너는 허리를 동이고 시중을 들어라. 그런 다음에야, 먹고 마셔라’ 하지 않겠느냐? 그 종이 명령한 대로 하였다고 해서, 주인이 그에게 고마워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을 받은 대로 다 하고 나서 ‘우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였을 뿐입니다’ 하여라.”(루카 17,7-10)

그 일이 제가 “쓸모없는 종”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었습니다. 며칠 전 “실패의 끝자락에서”라는 제목의 제 글을 읽고 힘을 내라는 위로의 표지를 찍어주신 분이 여럿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실패의 끝자락에서 힘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 감사의 마음이 되었습니다. 딸아이가 제 실패에도 불구하고 저의 정성을 인정해주었던 것처럼 주님은 저의 실패 여부가 아니라 저의 노력을 인정해주신다는 생각이 든 것입니다.

저는 최선을 다해 가난을 살아냈습니다.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습니다. 가난은 무섭게 제 주변의 사람들을 몰아냈습니다. 오래 전 쓴 글에서 저는 가난이 노숙자들의 몸에서 나는 냄새보다 더 지독하다는 표현을 한 적이 있습니다. 노숙자들의 냄새는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피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가난은 그보다 더 사람들을 피하게 만든다는 사실을 저는 오래도록 반복해서 경험해야 했습니다. 물론 가난을 그 이유로 지적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 이유가 가난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누구나 가난이 싫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난하면서 그 가난을 자랑까지 하는 저를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예수 믿으면 잘 산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돈 걱정 없이 살면서 믿는 것이 진짜 믿음이라는 사고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온갖 호사를 다 누리다가 천국에 가면 그보다 더 좋은 삶을 기대하는 것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의 일반적인 믿음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 의”입니다. 그들은 종교생활에 몰두합니다. 헌금을 많이 하거나, 남에게 해로운 일을 하지 않거나, 모든 삶의 곳곳에서 예배를 드림으로써 하느님과 동행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나, 소유의 일부로 구제나 자선을 행하는 것으로 자신의 신앙생활에 만족합니다. 그것을 믿음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자신의 공로로 내세웁니다. 그 모습이 바로 “자기 의”에 빠진 모습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이 하지만, 그 안은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채우기 때문이다. 눈 먼 바리새파 사람들아! 먼저 잔 안을 깨끗이 하여라. 그리하면 그 겉도 깨끗하게 될 것이다.”(마태 23,25-26)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빠졌던 올무에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이 다시 빠진 것입니다. 오죽하면 “예수 성공, 불신 실패”로 요약되는 내용들을 설교하는 김삼환 목사와 같은 이의 교회가 자신들이야말로 한국교회의 귀감이라는 주장을 하기에 이르렀을까요?

대부분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처럼 “회칠한 무덤”이 되었습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기념비를 꾸밉니다. 생각해보니 예수님의 이 말씀이 오늘날 그리스도교 안에서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그대로 전하는 예언자들은 죽여 무덤에 파묻고, 자신들이 바라는 대로 행동하는 이들은 성인으로 만들어, 그런 사람들을 성인으로 만드는 것으로 자신들의 정통성을 강화합니다.

특히 사람을 성인으로 만드는 일이야말로 자신을 합리화하는 대표적인 방법입니다. 그것은 겸손이 아니라 자신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는 명확한 증거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대해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쓸모없는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아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가는 일이 있을 것이다.”(마 25:30)

스스로를 가치 있다고 평가하는 이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쓸모없는 종”이라는 판단을 듣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스스로 자신을 “쓸모없는 종”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주님의 종”으로 인정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이 “종”이라는 사실을 받아드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목표를 정하고, 그것을 관철하면 “자기 의”에 빠져 예수님으로부터 “쓸모없는 종”이라는 판단을 받게 됩니다. “종”이란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스스로 목표를 정하지 않고, 주인이 정해준 목표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종”은 임무를 완성한 후에도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라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는 이 사실 앞에서도 왜 예수님께서 당신을 따르려거든 먼저 자신을 부인하라고 하셨는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종”이 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가장 적확하게 파악한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시몬 베유입니다. 그는 그래서 그리스도교를 “노예들의 종교”라고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교가 “종들의 종교”라는 이야기를 하면 그런 말을 하는 저를 이상한 사람으로 바라보면서 저와의 관계를 단절합니다. 그래서 저는 예언자들의 무덤으로 만든다는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가 “종”이며, 그것도 “쓸모없는 종”임을 알기에 예수님으로부터 “쓸모없는 종”이라는 판단을 듣지 않기 위해 제게 주어지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합니다. 날씨가 너무 덥습니다. 이 더위에 사람들이 죽거나 상하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작물들도 더위에 말라죽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산불로 거처를 떠나 피신한 사람들의 안위를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전쟁 중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물론 새로 태어날 아이들을 위해서 더 이상 자연이 망가지지 않기를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제가 안 하는 것은 “나의 일”이지 제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최선을 다합니다. 매일 매순간 최선을 다하는 것이 “종”의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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