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靈性) 드로잉 Spiritual Drawing_관상적 침묵의 선
조광호 신부의 동검도 이야기
1. 드로잉은 멈춤에서 시작됩니다
영성 드로잉은 무엇인가를 능숙하게 그려 내는 기술에서 시작되지 않습니다. 먼저 멈추는 데서 시작됩니다. 말을 줄이고 판단을 내려놓으며, 익숙한 형상을 만들려는 의지를 잠시 비우는 일입니다. 흰 종이 앞에 앉는 순간, 작가는 자신을 표현하는 사람이기 전에 침묵을 듣는 사람이 됩니다.
침묵은 아무것도 없는 공백이 아닙니다. 그 안에는 아직 말이 되지 않은 기억과 감정, 상처와 그리움, 몸의 미세한 떨림과 무의식의 움직임이 머물고 있습니다. 더 깊은 곳에는 인간의 언어와 형상으로 다 붙잡을 수 없는 보이지 않는 현존이 자리합니다.
영적 침묵은 이러한 내면을 억누르는 것이 아닙니다. 떠오르는 것을 성급하게 해석하거나 이름 붙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 오래 바라보는 일입니다. 침묵이 깊어질수록 의식 아래 가려져 있던 생명의 움직임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냅니다. 영성 드로잉은 바로 그 움직임을 듣는 데서 시작됩니다.
2. 무의식의 자유와 영적 분별
침묵 속에서는 잊고 있던 기억과 설명하기 어려운 불안, 이름 모를 기쁨과 슬픔이 떠오릅니다. 무의식은 논리적인 말보다 감각과 호흡, 몸의 긴장과 손의 움직임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영성 드로잉은 무의식에서 솟아나는 것을 그대로 쏟아 놓는 행위에 머물지 않습니다.
무의식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면서도, 그 움직임을 깨어 바라보는 분별이 필요합니다. 분별은 나타난 것을 곧바로 좋거나 나쁘다고 판단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를 향하는지, 나를 더 깊은 진실과 자유로 이끄는지를 조용히 살피는 일입니다.
무의식을 억압하지 않으면서도 그것에 끌려가지 않고, 떠오르는 형상을 받아들이면서도 절대적인 계시로 여기지 않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영성 드로잉의 자유는 아무렇게나 그리는 자유가 아닙니다. 잘 그려야 한다는 강박, 새로워야 한다는 욕망,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으로부터 조금씩 벗어나는 자유입니다. 자유로운 손과 깨어 있는 정신이 만나는 곳에서 영성 드로잉은 시작됩니다.
3. 침묵이 선(線)이 되는 순간
내면의 움직임을 충분히 들은 뒤, 비로서 손이 움직이기 시작합니다. 첫 선은 의도보다 먼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손끝이 떨리고, 그라파이트나 목탄이 종이를 스치며, 먹물과 잉크가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자유롭게 번집니다.
선은 곧게 나아가지 않습니다. 흔들리고 멈추며, 겹쳐지고 끊어지거나 지워집니다. 작가는 선을 지배하기보다 선이 어디로 향하는지를 바라봅니다. 자신이 선을 긋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 선을 처음 만나는 사람이 됩니다. 이때 선은 단순한 조형 요소를 넘어섭니다. 침묵이 몸을 지나 손끝에 이르러 남긴 흔적이 됩니다.
말이 되지 못한 감정은 선의 강약으로, 기억의 깊이는 먹의 농담으로, 내면의 호흡은 선의 속도와 간격으로 드러납니다. 굵은 선에는 억눌린 힘이 머물 수 있고, 가느다란 선에는 망설임과 연약함이 스며들 수 있습니다. 끊어진 선은 상실과 중단을 떠올리게 하고, 번지는 먹은 굳어진 경계가 풀리며 서로 스며드는 존재의 상태를 보여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선의 의미는 미리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작가가 하나의 해석으로 닫지 않을 때, 선은 보는 이의 기억과 경험 안에서 새롭게 살아납니다. 여기에서 하나의 조심스러운 주장을 제안할 수 있습니다.
드로잉은 작가가 자신의 내면을 밖으로 표현하는 행위만이 아니라, 아직 알지 못하는 자신과 타자와 세계가 작가에게 다가오는 사건일 수 있습니다. 작가가 선을 만드는 동시에, 그 선 또한 작가를 새롭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영성 드로잉은 자기표현을 넘어, 자아가 변화되는 상호적인 창조 행위가 됩니다.
4. 여백은 보이지 않는 존재를 위한 자리입니다
영성 드로잉은 선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선을 감싸고 받아들이는 여백이 더 필요합니다. 여백은 그리지 못한 부분이나 미완성의 공간이 아닙니다. 선이 태어나고 사라지는 자리이며, 아직 말해지지 않은 것이 머무는 곳입니다. 선이 인간의 응답이라면, 여백은 그 응답을 감싸는 더 큰 침묵입니다.
작가는 종이를 모두 채우려 하지 않습니다. 형상이 나타나지 않는 시간을 억지로 메우지 않고, 비어 있는 공간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여백에는 작가가 알지 못하는 것과 아직 이름 붙이지 못한 것이 들어올 수 있습니다. 작가가 화면의 모든 의미를 결정하지 않기 때문에, 작업이 끝난 후 그림을 보는 사람도 자신의 기억과 침묵을 가지고 작품 안으로 들어올 수 있습니다.
이 점에서 여백은 미적 절제를 넘어 환대의 공간이 됩니다. 마침내. 작품은 작가의 내면만을 드러내는 독백이 아니라, 자기와 타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만나는 관계의 장이 됩니다.
영성 드로잉은 영적 침묵에서 출원되는 예술입니다. 그 침묵은 그 어떤 사건 앞에서 입을 다무는 침묵이 아닙니다. 고통받는 사람에게 조용히 참으라고 요구하는 침묵도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목소리를 낮추어, 그동안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드러날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 주는 침묵입니다.
따라서 영성 드로잉의 여백은 때때로 침묵당한 존재가 다시 머물 수 있는 자리이며, 말로 다 설명되지 않는 고통이 함부로 해석되거나 소비되지 않은 채 존중받는 자리가 됩니다. 여기서 여백은 단순한 조형 원리가 아니라 하나의 윤리적 태도가 됩니다. 선을 긋는 일이 존재를 드러내는 행위라면, 여백을 남기는 일은 타자가 존재할 권리를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5. 잃어버린 정신을 다시 깨우는 예술
미술의 역사는 새로운 형식을 만들어 온 역사이면서, 인간이 자신과 세계의 근원을 물어 온 역사이기도 합니다. 선사시대 동굴벽화의 손자국과 선, 종교미술의 성스러운 형상, 동양 서화의 일필과 여백에는 예술이 단순한 장식이나 개인적 표현을 넘어 삶과 우주, 인간과 초월적 신비를 잇는 행위였다는 기억이 남아 있습니다.
근대 이후 예술은 종교와 공동체의 제약에서 벗어나 개인의 자유와 새로운 형식을 얻었습니다. 현대미술은 무의식과 신체, 우연과 행위, 물질과 개념의 영역을 넓히며 예술의 가능성을 크게 확장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자유가 때로는 끝없는 새로움의 경쟁, 자기표현의 과잉, 시장과 제도의 요구 속에서 방향을 잃는 모습도 보여 왔습니다. 오늘 우리는 수많은 이미지를 보지만 깊이 바라보는 능력은 약해지고, 수많은 말을 주고받지만 자신과 타인의 내면을 듣는 일에는 서툴러지고 있습니다.
영성 드로잉은 현대미술이 발견한 무의식의 자유, 몸의 직접성, 우연과 추상의 가능성을 받아들이면서, 그 자유 안에 침묵과 관상, 분별과 책임을 다시 불러들이려는 작은 시도입니다. 자동기술법이 의식의 통제에서 벗어난 손의 자유를 발견했다면, 영성 드로잉은 그 자유가 어디를 향하는지를 묻습니다. 추상표현주의가 작가의 몸과 행위의 흔적을 화면에 드러냈다면, 영성 드로잉은 그 몸을 자기주장의 도구가 아니라 경청과 응답의 통로로 바라봅니다.
동양의 서화가 선과 호흡, 정신과 여백의 관계를 중시했다면, 영성 드로잉은 그 오래된 지혜를 오늘의 무의식과 상처, 타자에 대한 환대와 연결하려 합니다. 영성 드로잉은 현대미술이 어렵게 얻어 낸 표현의 자유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그 자유에 내적 방향과 윤리적 깊이를 더하려는 실천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형식을 과거로 되돌리는 복원이 아니라, 예술의 내면을 새롭게 하는 쇄신입니다. 이 때 영성은 무엇을 그렸는가보다 어떤 마음과 태도로 보고, 듣고, 기다리고, 응답했는가에 더 깊이 관계합니다. 이것이 영성 드로잉이 조심스럽게 제안하는 새로운 관점입니다.
예술의 영성은 작품의 소재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태어나는 관계와 과정 안에도 존재합니다. 작가가 자기 의지를 잠시 내려놓고 침묵을 들으며, 무의식의 움직임을 분별하고, 타자와 신비를 위한 여백을 남길 때 드로잉의 과정 자체가 관상이 될 수 있습니다.
영성 드로잉이 지향하는 것은 새로운 형식의 발명보다 새로운 시선의 탄생입니다.
더 천천히 보고,
더 깊이 들으며,
더 적게 주장하고,
보이지 않는 것을 존중하는 시선입니다.
그 시선이 한 줄의 선 안에서 깨어날 때, 선은 표현의 도구를 넘어 경청의 흔적이 됩니다. 여백은 부재가 아니라 현존의 자리가 되고, 그림은 소비되는 이미지에서 벗어나 오래 머물 수 있는 장소가 됩니다. 영성 드로잉은 무의식에서 솟아나는 움직임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되, 침묵 속에서 그것을 깨어 바라보고 분별하며, 자신과 타자와 보이지 않는 현존을 선(線)과 여백으로 환대하는 관상적 예술 행위입니다.
침묵이 몸을 지나 한 줄의 선이 되고, 그 선이 다른 사람의 내면에 잠들어 있던 침묵을 깨울 때, 드로잉은 단순한 흔적을 넘어 하나의 만남과 관계가 됩니다. 그 과정에서 작가는 비로소 깨닫습니다. 자신이 침묵을 그린 것이 아니라, 침묵이 자신의 몸을 지나 한 줄의 선으로 잠시 모습을 드러냈음을.
그러므로 영성 드로잉은 표현의 결과보다 창작의 과정을 더 깊이 바라보는 예술입니다. 그러므로 영성 드로잉은 침묵을 표현하는 그림이 아니라, 침묵이 선으로 태어나는 과정을 경청하는 예술입니다.
조광호 신부
1967년 천주교 성 베네딕도 수도회에 입회하여 서울 가톨릭대 신학부를 졸업하고, 신부가 된 다음 독일 뉘른베르크 미술대학을 졸업했다. 천주교 주교위원회 출판국장으로 천주교 200주년 기획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독일유학 후 한국현대미술 50년전, 일본 국제 현대미술전 및 국내외(독일, 미국, 오스트리아) 10여 차례 개인전과 여러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월간 영성문화교양지 <들숨날숨>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인천가톨릭대학교 조형예술대학 학장을 역임하고, 현재 강화 동검도 채플과 갤러리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대표적인 미술 작품으로는 부산 남천 성당 유리화와 서울 2호선 당산철교 외벽의 벽화, 서소문 현양탑 등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그대 문의 안과 밖에서>, <꽃과 별과 바람과 시 - 조광호 신부 그림 에세이>, <얼굴 - 조광호의 그림과 글>, <Angel - 조광호 신부 명상 Drawing>, <조광호의 스테인드글라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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