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걸이도 등받이도 없는 낡은 목의자 곁에서

조광호 신부의 동검도 이야기

2026-06-28     조광호

의자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서 이 글을 시작하고 싶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이 인종차별의 어둠에 갇혀 있던 시절이었다. 피부색이 곧 신분이 되고, 인간의 존엄이 거리와 식당과 학교와 교회 안에서조차 차별되던 시대였다. 그때 어린 투투는 한 장면을 보았다. 낯선 백인 성직자 한 사람이 뻐스 정류장에서 그의 어머니에게 정중히 인사하고, 앉을 자리를 양보한 것이다. 그것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었다. 혁명적 구호도 아니었고, 역사적 연설도 아니었다. 다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준 작은 몸짓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작은 몸짓 하나가 한 인간의 영혼을 바꾼다. 어린 투투는 그 장면에서 인간 존엄의 빛을 보았을 것이다. 흑인이라는 이유로 밀려나야 했던 어머니가 한 사람으로 존중받는 모습을 보며, 그의 인생은 그 어느 불길 속으로 빨려드는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신앙은 말보다 먼저 태도이고, 사랑은 교리보다 먼저 나타난 진리였다. 누가 앉느냐보다, 누구에게 자리를 내어 주느냐가 더 깊은 복음이 될 때가 있다. 의자는 인간이 만든 사물 가운데 가장 인간을 닮은 물건인지 모른다. 탁자는 사물을 받치지만, 의자는 사람을 받친다. 침대는 몸 전체를 눕히지만, 의자는 깨어 있는 몸을 잠시 쉬게 한다. 의자는 노동과 휴식 사이, 권위와 겸손 사이, 고독과 환대 사이에 놓여 있다. 인간이 앉는 곳에는 언제나 인간의 욕망과 피로와 꿈과 두려움이 함께 앉는다.

빈 의자

무엇보다 의자는 비어 있을 때 가장 많은 말을 한다. 빈 의자는 기다림이다. 누군가를 위한 자리다. 아직 오지 않은 사람을 향한 조용한 초대다. 그러나 빈 의자는 동시에 부재이기도 하다. 다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의 자리, 더 이상 앉지 못하는 사람의 자리, 기억 속에서만 남아 있는 한 인간의 흔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의자의 아름다움은 형태에만 있지 않다.

의자의 아름다움은 관계에 있다. 누가 앉았는가. 누구에게 자리를 내어 주었는가. 누구를 앉히지 않았는가. 누구를 기다리고 있는가. 의자는 그렇게 인간의 권력과 사랑, 배제와 환대, 고독과 위로를 조용히 드러낸다. 왕이 앉으면 왕좌가 된다. 재판관이 앉으면 심판의 자리가 된다. 교황이 앉으면 베드로의 직무와 교회의 가르침을 상징한다. 그러나 그 의자의 깊은 뜻은 군림이 아니라 섬김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자리는 언제나 높은 왕좌보다 낮은 발 씻김의 자리 가까이에 있었기 때문이다. 반대로 사형수의 의자도 있다. 그 의자는 인간 문명의 어두운 얼굴이다. 사람이 사람을 심판하고 생명을 끝내는 자리에 놓인 의자. 그때 의자는 휴식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이 얼마나 차갑고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침묵의 증거가 된다.

결국 의자의 문제는 자리의 문제다. 자리의 문제는 인간의 문제다. 그리고 인간의 문제는 곧 신앙의 문제다. 신앙이란 내가 차지한 자리를 묻는 일이 아니라, 내가 누구를 위해 비워 둔 자리를 묻는 일이기 때문이다.

빠삐용 의자

법정 스님의 빠삐용 의자도 떠오른다. 송광사 불일암의 고요 속에서 스님이 손수 만들었다는 소박한 의자. 이름은 ‘빠삐용’이었다. 감옥을 탈출하는 사람의 이름, 자유를 갈망하는 인간의 이름이다. 그러나 그 의자는 세상으로부터 달아나기 위한 의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게서 도망치지 않기 위한 의자였다. 그 의자에 앉아 스님은 물었을 것이다.

나는 무엇을 붙들고 있는가.
무엇을 비우지 못하고 있는가.
삶을 낭비하고 있지는 않은가.

빠삐용 의자는 안락의 의자가 아니라 수행의 의자였다. 더 넓고, 더 부드럽고, 더 비싼 의자를 향해 달려가는 세상 앞에서 그 의자는 조용히 묻는다. 좋은 의자에 앉는다고 좋은 삶이 되는가. 편안한 자리에 앉는다고 영혼까지 편안해지는가. 높은 자리에 앉는다고 인간이 높아지는가. 의자는 자리의 상징이다. 세상은 끊임없이 더 좋은 의자를 권한다. 더 편안한 의자, 더 빛나는 의자, 더 높아 보이는 의자. 그러나 삶의 진실은 종종 반대편에 있다. 인간을 깊게 하는 것은 더 높은 의자가 아니라, 더 낮아질 수 있는 마음이다.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것은 더 많은 소유가 아니라, 필요한 것만 곁에 두고 그것마저도 마음의 주인이 되지 못하게 하는 절제다.

내 화실의 목의자

내 화실에도 의자가 하나 있다. 팔걸이도 없다. 등받이도 없다. 오래된 나무 의자다. 누가 보아도 대단한 물건은 아니다. 가구라고 부르기에도 소박하다. 그저 네 다리로 버티고 있는 작은 목의자다. 나는 그 의자에 앉기도 하고, 높은 곳의 물건을 꺼낼 때 그 위에 딛고 서기도 한다. 때로는 물감이나 붓, 종이와 공구를 올려놓는 받침대로도 쓴다. 앉는 자리였다가, 디딤돌이 되었다가, 받침대가 되었다가, 다시 아무 말 없이 구석에 놓인다.

그 의자는 자기 용도를 주장하지 않는다. “나는 의자이니 앉는 데만 쓰라”고 말하지 않는다. 필요한 순간에 필요한 모습으로 자신을 내어 줄 뿐이다. 그 낡은 목의자를 바라보다가 문득 인간의 한 모습을 본다. 진정 필요한 사람은 반드시 화려한 사람이 아닐 수 있다. 큰 이름을 가진 사람도 아닐 수 있다. 오히려 말없이 곁에 있으면서, 필요한 때 필요한 자리에서 자신을 내어 주는 사람일 수 있다.

팔걸이가 없다는 것은 붙잡을 장식이 없다는 뜻이다. 등받이가 없다는 것은 기대어 쉴 큰 장치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그 의자는 그래서 더 정직하다. 꾸미지 않고, 과장하지 않고, 자기 몸 하나로 버틴다. 그것은 소박하지만 허약하지 않다. 낡았지만 무너진 것은 아니다. 상처가 있지만 여전히 누군가를 받친다. 낡았으나 버려지지 않았다. 초라하나 쓸모없지 않다. 오래되었으나 아직 필요하다.

그 말이 어느새 은퇴한 내 인생 곁으로 다가온다. 은퇴란 무엇인가. 중심의 자리에서 물러나는 일인가. 이름이 불리던 자리에서 조용히 뒤편으로 옮겨지는 일인가. 어느 정도는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은퇴한 인생은 팔걸이와 등받이를 잃은 의자와 닮았다. 예전처럼 많은 사람이 기대어 오지 않을 수도 있고, 직함이 나를 떠받쳐 주지 않을 수도 있다. 예전처럼 중심에 앉아 말하고 결정하는 시간이 줄어들 수도 있다. 그러나 그때부터 비로소 더 깊은 일이 시작된다. 높은 자리보다 필요한 자리가 보인다. 칭찬받는 일보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보인다. 큰 역할보다 작은 쓰임의 은총이 보인다.

어머니의 무릎, 하느님의 무릎

성서의 인간도 그러했다. 아브라함은 떠남으로 시작했고, 모세는 늙어서 부름을 받았으며, 엘리야는 침묵 속에서 하느님의 소리를 들었다. 마리아는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받아들임으로 구원의 자리가 되었다. 하느님은 화려한 왕좌보다 비어 있는 자리, 낮은 자리, 준비된 자리를 찾으신다. 예수님께서도 높은 자리에 오래 앉아 계시지 않았다. 그분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다. 마지막에는 십자가라는 가장 낮은 자리에 자신을 내어 주셨다. 그러므로 신앙의 성숙은 더 높은 의자를 차지하는 데 있지 않다. 내가 앉았던 자리에서 조용히 일어나, 누군가가 앉을 수 있도록 비켜 주는 데 있다.

생각해 보면 인간의 첫 의자는 어머니의 무릎이었다. 나무도 아니고, 돌도 아니고, 쇠도 아니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안전한 자리였다. 젖 냄새와 체온과 심장 박동이 있던 자리. 그곳에서 우리는 세상을 배우기 전에 먼저 신뢰를 배웠고, 말보다 먼저 사랑을 배웠다. 그리고 인간의 마지막 의자는 하느님의 무릎일 것이다. 모든 직함을 내려놓고, 모든 역할을 벗고, 모든 피로와 두려움에서 풀려나 마침내 어린아이처럼 기대어 앉는 자리. 어머니의 무릎에서 시작한 인간은 하느님의 무릎을 향해 걸어간다.

 

Stuhl

사랑으로 비워 둔 작은 자리

독일 현대 조각가, 요제프 보이스(Joseph Beuys, 1921–1986)의 대표작 〈지방 의자>(Fat Chair/Fettstuhl)는 낡은 나무 의자 위에 지방 덩어리를 올려놓은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의자는 단순한 가구가 아니라 인간이 앉는 자리, 곧 권위, 휴식, 결핍, 상처가 모이는 장소를 뜻한다. 그런데 그 자리에 사람이 아니라 지방이 놓여 있다. 지방은 따뜻함을 품고, 쉽게 녹고, 형태가 변하는 물질이다. 그래서 보이스에게 지방은 열, 생명, 치유, 변화의 가능성을 상징한다.

결국 보이스의 의자는 이렇게 말한다. 의자는 인간의 자리이고, 지방은 그 자리에 남은 체온이다. 빈 의자는 부재를 말하지만, 지방은 아직 식지 않은 생명의 흔적이다. 그 생명의 흔적은 사랑이다. 그렇다. 그 사이에 놓인 수많은 의자들은 잠시 머물다 떠나는 순례자의 자리일 뿐이다. 가장 편안한 의자는 가장 비싼 의자가 아니다. 가장 푹신한 의자도 아니다. 가장 잘 만들어진 의자도 아니다. 가장 편안한 의자는 나를 판단하지 않는 자리다.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자리다. 낡고 지치고 작아진 그대로도 받아들여지는 생명의 자리, 곧 사랑의 자리다.

어머니의 무릎은 우리가 세상에 와서 처음 앉은 사랑의 의자이고, 하느님의 무릎은 우리가 모든 길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쉬게 될 영원한 안식의 의자다. 그 사이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내 화실의 낡은 목의자는 오늘 내게 조용히 말한다. 너는 높은 자리에 앉으려 애쓰지 말라. 누군가의 무릎 같은 사람이 되어라. 지친 이가 잠시 기대고, 상처 입은 이가 잠시 쉬며, 길 잃은 이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작고 따뜻한 자리가 되어라.

이제는 앉기보다 내어 줄 시간이다. 기대기보다 받쳐 줄 시간이다. 높아지기보다 낮아질 시간이다. 필요한 곳에 조용히 놓여 하느님의 손길이 지나가도록 비켜서는 시간이다. 팔걸이도 등받이도 없는 낡은 목의자 하나가 오늘 내게 가장 소박하고도 깊은 복음을 들려준다.

사람은 높은 자리에 앉아야 귀한 것이 아니다. 필요한 곳에 놓일 때 귀하다. 자신을 주장하지 않고 누군가를 받쳐 줄 때 귀하다. 낡아도, 작아도, 이름 없어도 사랑 안에서 쓰임 받을 때 인간은 여전히 하느님의 도구가 된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 내 화실 한쪽의 낡은 목의자 곁에서 다시 배운다. 인생은 끝내 자리를 차지하는 일이 아니라, 자리를 내어 주는 일이라는 것을. 높은 의자에 오래 앉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길 위에 조용한 디딤돌이 되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가장 아름다운 의자는, 화려한 왕좌가 아니라 사랑으로 비워 둔 작은 자리라는 것을.

 

조광호 신부
1967년 천주교 성 베네딕도 수도회에 입회하여 서울 가톨릭대 신학부를 졸업하고, 신부가 된 다음 독일 뉘른베르크 미술대학을 졸업했다. 천주교 주교위원회 출판국장으로 천주교 200주년 기획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독일유학 후 한국현대미술 50년전, 일본 국제 현대미술전 및 국내외(독일, 미국, 오스트리아) 10여 차례 개인전과 여러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월간 영성문화교양지 <들숨날숨>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인천가톨릭대학교 조형예술대학 학장을 역임하고, 현재 강화 동검도 채플과 갤러리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대표적인 미술 작품으로는 부산 남천 성당 유리화와 서울 2호선 당산철교 외벽의 벽화, 서소문 현양탑 등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그대 문의 안과 밖에서>, <꽃과 별과 바람과 시 - 조광호 신부 그림 에세이>, <얼굴 - 조광호의 그림과 글>, <Angel - 조광호 신부 명상 Drawing>, <조광호의 스테인드글라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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