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과 신학을 예술처럼

한상봉 칼럼

2026-06-22     한상봉 편집장

고정희는 <사십대>라는 시에서 “사십대 문턱에 들어서면/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안다/기다릴 인연이 많지 않다는 것도 안다/아니, 와 있는 인연들을 조심스레 접어 두고/보속의 거울을 닦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사십대 들녘에 들어서면 “땅바닥에 침을 퉤, 뱉아도/그것이 외로움이라는 것을 안다/다시는 매달리지 않는 날이 와도/그것이 슬픔이라는 것을 안다”고 했지요. 그런데 저는 육십대에 들어서니 그런 느낌을 확연히 받습니다. 제게 사십대는 여전히 한여름이었고, 육십대에 이르니 늦가을에 접어든 심경입니다. 이제 바라볼 시간이 많지 않고, 기다릴 인연도 많지 않으니, 작은 친절에도 눈물이 나고, 애잔한 인연에도 고맙다, 생각합니다. 그리고 뒤끝이 아름다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게 됩니다.

가톨릭일꾼운동을 시작했지만 아직 손에 잡히는 것도 별로 없고, 그저 제가 잘 할 수 있는 일을 몸 닿는 데까지 해볼 생각만 하고 있지요. 프리드리히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에서 “일단 한 번 선택한 길을 끈질기게 고수하는 사람은 많지만, 목표를 끈질기게 추구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말했답니다. 그가 하는 일이 그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우리가 쓰는 자서전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나는 나를 조각하고, 나를 만들어가야 하기에, 나는 내 인생을 소재로 작품을 짓고 있는 예술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무엇이 삶을 예술로 만드는가>(프랑크 베르츠바흐, 불광출판사, 2016)라는 책에서 지적인 사람은 “해야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 하고, 창조적인 사람은 “하고자 하는 일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그러니, 내가 하고 싶은 일이 하늘의 뜻과 맞닿아 있기를 희망하는 것은 가장 거룩한 갈망이 되겠지요.

 

사진출처=pixabay.com

베르츠바흐는 창조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잠시 멈추는 것’이라 합니다. 중세 사람들은 일어날 때와 일할 때, 기도할 때와 쉬고 잠드는 시간까지 자연의 리듬과 신적 질서에 따라 정해두고 살았다고 합니다. 모든 게 ‘때’가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지금은 “전혀 멈추지 않는 노동세계에 직면해 있다”고 말합니다. 디지털 기술 등의 진보로 우리는 더 많은 시간을 벌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그 때문에 점점 더 시간이 모자란다고 합니다. 지금은 “모든 것을 언제나, 어디서나, 즉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럴 때는 출퇴근 시간조차 의미가 없습니다. 직장과 집의 경계가 흐릿해지고, 노동과 휴식이 뒤엉켜 있는 것입니다. 이런 숨돌릴 틈 없는 노동문화가 빚어내는 호흡곤란을 걱정합니다.

그럴 때, 내가 내 삶을 창조적인 일이 되게 하려면, 일상의 짧은 여유를 반드시 가져야 한다고 베르츠바흐는 제안합니다. 1906년에 오카쿠라 가쿠조가 지은 <차의 책>에서는 다도(茶道, さどう/ちゃどう)에 대해 “차의 철학은 단순히 차의 일상적 의미와 관련된 심미주의만이 아니다. 그것은 윤리, 종교와 더불어 우리의 전체적인 인간관과 자연관을 표현한 것”이라 합니다. 일본에서 다도가 오늘날과 같은 형식을 갖춘 것은 16세기 센고쿠 시대(전국시대)로, 무로마치 막부가 무너진 뒤에 전국에서 크고 작은 막부 세력들이 들고 일어나 다이묘와 쇼군이 되려고 전쟁을 벌이던 혼란기였습니다. 이때 이른바 평화운동의 일환으로 다도가 시작되었다 합니다. 찻집의 입구는 작은 내리닫이문으로 되어 있어서 당당한 장수도 칼을 내려놓고 몸을 숙여야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그 안에서는 성별의 차이도 신분의 차이도 없었다고 합니다.

다도의 형식을 정립한 센노 리큐는 다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다도의 본질은 물을 끓이고 차를 우려서 마시는 것이다. 오직 그뿐이다.” 이 단순함에는 불필요한 것은 다 걷어내고 본질적인 것만을 남기는 차 문화의 비밀이 모두 담겨 있다 합니다. 중국에서는 “차를 마시며 세상의 시름을 잊는다”고도 했습니다. 슈투트가르트에서 ‘대나무다리’(Die Bambusbrücke)라는 중국 차 학교를 운영하고 있는 카를라 슈텐베르크와 후 시앙판은 이렇게도 이야기합니다. “차는 정신을 맑게 깨어 있게 하고 영감을 촉진하기 때문에 수도승과 시인들이 매우 소중히 여기는 음료”라 했습니다. 아시아의 더운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차를 마시는데, 차는 몸을 덥히는 동시에 시원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실제로 차를 우려 마시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과 차분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차를 마시는 일상의 작은 의식을 치를 때마다 일을 잠시 중단할 계기가 마련됩니다.

어찌보면 물을 끓이고 차를 마시는 평범하고 평온하고 소박한 일상이 창조의 원천인지도 모릅니다. 삶에서 애태우며 매달려야 하는 더 특별하달 수 있는 일이 있을까, 의심하게 합니다. 잠시 자신을 놓아두는 시간이 인생의 가장 깊은 곳을 만질 수 있도록 허락하는 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베르츠바흐는 맑은 정신이 무어냐고 묻는 제자에게 “가서 차나 마셔라!”하고 스승이 말하는 연유를 발견합니다.

“일상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평범한 것이다. 일상은 그냥 벌어지는 것이며, 거기에 어떤 드라마틱한 배경음악은 없다. 우리에게 병이 될 정도로 끊임없이 스트레스를 주는 일이 아주 큰 의미를 부여받게 되는 것은, 우리가 그 일에 온 세상이 달려 있는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미래에 대해 불안하고, 현재에 대해 불만스러워하며, 과거에 대해 화를 낸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이 너무 창의적이지 않다거나 교양이 없다거나 운동을 못한다거나 매력이 없다거나 너무 가난하거나 너무 게으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과 편안한 관계를 맺지 못한다. 이 스펙트럼의 반대쪽 끝에는 무한한 자만심과 자기중심성과 자기애가 자리잡고 있다.”

그럼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지 생각해 봅니다. 명료하게 혁명가도 신학자도 작가도 아닌 내가 하고 싶은 일은 정말 무엇일까요? 내가 나를 작품으로 만드는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삶으로 자서전을 쓰면서 마침내 생각하는 것은, 그 모든 혁명과 신학과 글과 강의와 만남을 예술로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음성을 가다듬어 강의하고, 언어를 참구(參究)하여 글을 쓰고, 일상과 신학을 예술로 만드는 것이 내 깊은 갈망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시는 하느님처럼, 너보다 너를 더 사랑하는 이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아마 불가능한 일일 테지만, 그래서 신앙이 필요하지, 생각하면서 말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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