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투하면 지는 게 아니라, 인생이 망가진다
장준식 칼럼
젠슨 황은 “모든 사람이 질투할 만한 멋진 회사를 만들자”는 포부 아래 회사 이름을 '엔비디아'로 지었다. 엔비디아는 라틴어 invidia, 곧 ‘질투’에서 온 말이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는 바로 그 질투의 여신 ‘인비디아’가 등장한다. 로마 신화에는 수많은 신들이 등장하지만, 그중에서도 인비디아만큼 끔찍하게 그려진 신은 없다. 오비디우스는 그녀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한다.
“인비디아의 안색은 창백했고 몸은 형편없이 말라 있었다. 게다가 인비디아는 지독한 사팔뜨기였다. 이빨은 변색된 데다 군데군데 썩어 있었고, 가슴은 시퍼렇게 멍들어 있었다.”(<변신 이야기>, 이윤기 역, 민음사, 1998에서)
이 묘사는 단순한 신화적 상상이 아니다. 그것은 질투가 한 사람의 내면에 들어와 오래 머물 때, 그 영혼이 어떤 형상이 되는지를 보여주는 정직한 그림이다. 창백한 얼굴, 메마른 몸, 사팔뜨기의 눈, 썩은 이, 멍든 가슴. 이 모든 것은 바깥에서 누가 입힌 상처가 아니다. 질투하는 자가 스스로의 몸에 새긴 흔적이다.
특히 사팔뜨기라는 표현이 마음에 오래 머문다. 질투하는 사람의 눈은 정면을 보지 못한다. 자기 앞에 펼쳐진 자기 삶을 바라보는 대신, 곁눈으로 끊임없이 남을 흘깃거린다. 그 시선은 비뚤어져 있고, 자기 자신에게도 닿지 못한다. 질투는 그렇게 시선을 빼앗는 병이다. 자기 인생을 똑바로 응시할 능력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병이다.
오비디우스는 인비디아에 대하여 한 문장을 덧붙인다. “이 인비디아의 입술에 미소가 감돌게 할 수 있는 것은 남이 고통받는 광경뿐이었다.”
이 문장은 우리를 좀 더 오래 머물게 한다. 마치 우리가 애써 감추고 있는 진실을 폭로하는 듯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잘되었다는 소식 앞에서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진 적은 없었는가. 가까운 이의 성공을 축하한다고 말하면서, 돌아서서는 까닭 모를 피로감에 휩싸인 적은 없었는가. 반대로 한때 나를 앞서갔던 그 사람이 무너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입가에 잠깐 떠올랐다가 황급히 지워버린 그 옅은 웃음을 기억하지 못하는가. 우리는 그 미소를 자기 자신에게도 들키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인비디아의 얼굴은 바로 그 순간, 거울 속에서 우리를 마주 본다.
질투는 남을 향한 감정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정확히 말하면, 질투는 자기 자신과의 화해에 실패한 마음이다. 내가 나에게 충분하지 않다는 느낌, 내 자리가 너무 좁고 내 몫이 너무 적다는 느낌, 그 결핍의 자리에서 질투는 자란다. 그래서 질투는 늘 비교에서 시작된다. 비교는 감사를 갉아먹고, 감사가 떠난 자리에 불평이 들어서며, 불평이 깊어지면 원망이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원망은 시간이 지나면 방향을 바꾼다. 처음에는 남을 향하던 화살이, 어느 순간 자기 자신을 향한다. 왜 나는 이것밖에 안 되는가, 왜 내게는 저것이 없는가. 그렇게 질투하는 사람은 남의 인생을 바라보느라 정작 자기 인생을 살지 못한다. 자기 삶의 자리에서 추방당한 자, 그가 바로 인비디아의 얼굴을 한 사람이다.
사람들은 흔히 “질투하면 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질투의 진짜 무서움은 승패에 있지 않다. 질투는 이기고 지는 게임이 아니라, 영혼이 서서히 부패하는 과정이다. 처음에는 작은 부러움으로 시작된다.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그러나 어느 순간 그 마음은 살짝 미끄러진다. “저 사람이 저렇게 잘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다시 한 번 미끄러진다. “저 사람이 차라리 무너졌으면 좋겠다.” 이 미끄러짐은 본인도 잘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조용히 일어난다. 그러나 그 끝에서 사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사랑해야 할 이를 미워하고, 축복해야 할 이를 저주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인비디아의 시퍼렇게 멍든 가슴은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질투는 노력으로 극복되기 어렵다. 질투에서 벗어나기 가장 좋은 길은 자족을 배우는 것이다. 자족은 체념이 아니다. 자족은 내 삶을 내 것으로 받아들이는 일이다. 내가 받은 계절, 내가 받은 토양, 내가 받은 햇빛의 양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는 일이다. 남의 꽃이 먼저 피었다고 내 계절이 끝난 것은 아니다. 남의 열매가 크다고 내 삶이 작아지는 것도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같은 모양으로 빚지 않으셨다. 같은 속도로 자라게 하지도 않으셨다. 그러니 남의 정원을 흘깃거리느라 내 정원에 내리는 비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인비디아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본다. 창백하고, 야위고, 비뚤어진 눈에, 썩은 이와 멍든 가슴을 가진 그 얼굴. 그것은 신화 속 어떤 여신의 얼굴이 아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을 오래 품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우리 모두가 천천히 닮아갈 수 있는 얼굴이다. 마음은 결국 얼굴이 되고, 얼굴은 결국 그 사람의 삶이 된다. 질투의 칼을 내려놓는 일은 남을 살리는 일이기 이전에, 무엇보다 먼저 나 자신을 살리는 일이다.
장준식 목사
미국 실리콘밸리 소재 세화교회 담임.
<예배자의 기도>, <기후 교회로 가는 길> 등의 저자.
여러 신문에 글을 기고 하는 칼럼니스트
미국 에모리대학교와 GTU에서 조직신학(정치신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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