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이웃을 네 몸을 위해 부려먹으라ㅡ 애덤 커시의 『인류에 대한 대반란』 읽기
장준식 칼럼
"객체지향 존재론은 이 딜레마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체와 객체 사이의 장벽을 허물려 한다. 우리가 자신을 사람(person)이라고 이해하고 나머지를 모두 객체(object)라고 보는 방식을 버리고, 모든 사람 역시 하나의 사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애덤 커시, 『인류에 대한 대반란』, 47쪽)
위 인용문에서 '딜레마'는 인간 자신의 주관성(인간이 스스로를 주체(subject)로 생각한 것, 인간만이 주체성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가져온 필연적인 결과가 '인류세'(Anthropocene)라는 것이다. 풀어서 설명하면 이런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가지기 위하여 스스로의 주체성을 극대화시킨 결과, 인간은 자신의 삶의 터전을 제 손으로 파괴하고, 존엄성을 지키지 못하는 몰락의 상황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갔다는 것이다. 인류는 몰락하고 있다. 적에 의해서가 아니다. 스스로 몰락하고 있다. '인류세'라는 용어는 이러한 비극적 정황을 포괄적으로 담아내는 용어다.
현시대의 지성은 '근대'(modernity)를 사유한다. 근대에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으며, 그것은 인간을 어떻게 형성했는가를 사유한다. 근대를 한 마디로 규정할 수 없지만, 그래도 규정해 본다면, '근대는 주체의 탄생'이다. 이것은 처음에 굉장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인간이 비로소 모든 만물의 '주인'으로 올라섰기 때문이다.
근대 전까지만 해도 '인간' 존재는 미약했다. 육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철학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인간은 자기를 둘러싼 모든 환경에 압도당하면서 살았다. 거대한 동물에 비해 몸집과 힘이 미약했고, 대자연을 보면 심리적으로 위축되며 경외감에 사로잡혔고, '나는 누구일까'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고, 신의 은총이 없으면 하루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런데, 근대는 이러한 인간의 자기 제약을 모두 깨뜨린 '사건'이다. 근대에 이르러 '주체'가 탄생한 것이다. 인간은 자기를 중심으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재해석하고 재배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현시대의 지성은 바로 이 '주체의 탄생'이 현재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모든 비극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이 모든 사유를 담아내는 용어가 바로 '인류세'이다.
인류세의 사유, 근대의 사유, 즉 '주체의 탄생'을 성경의 용어로 표현하면 무엇일까? 나는 생각해 보았다. 근대의 주체는 성경을 살짝 뒤틀어버린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신적 명령을 주체화시킨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 사랑의 극대화에 빠진다. 그래서 이러한 문장이 탄생한다. "네 이웃을 네 몸을 위해 부려먹으라." 우리는 온통 이 늪에 빠져 있다.
이 늪에 빠진 우리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일단 죽여놓고 보자. 그래야 내 맘대로 먹을 수 있다. 삶아 먹든, 튀겨 먹든, 날것으로 먹든. 인간의 욕망은 이렇게 작동한다. 상대를 죽여야 한다. 그래야 내 맘대로 내 몸을 위해 부려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다. 그야말로, 야만의 시대다.
그런데 정말 더 큰 문제가 있다. 서로 같은 욕망에 사로잡혀 있고, 서로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보니, 자신이 어떠한 욕망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는지, 자기 자신을 돌아볼 메타인지도 함께 상실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네 이웃을 네 몸을 위해 부려먹으라'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시대의 명령에 따라 움직일 뿐이다. 그 명령은 헤겔이 말한 '시대 정신'이라고 명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시대 정신은 그만큼 잔인하고 포악하고 못됐다.
애덤 커시의 『인류에 대한 대반란』은 바로 이 메타인지의 회복을 돕는 치료제 같은 책이다. 이 책이 끊임없이 보여주는 것은 근대의 사고에 우리가 얼마나 깊이 묻혀 사는지다. 우리는 이미 근대라는 바다에 들어와 있다. 그렇다 보니, 물 바깥의 사고를 못한다. 칸트의 표현을 빌리면, 인간은 사물 그 자체(things in themselves)를 알 수 없다.
우리가 아는 것은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인간의 이성을 통해 구성된 어떤 것이다. 이렇게 주체는 심화되고, 사물(객체)은 상대화된다. 사물 그 자체를 알 수 없으니, 우리는 그냥 우리 마음대로 생각하고 우리 마음대로 처분한다. 커시는 바로 이 지점에서 '객체지향 존재론'이라는 새로운 사유의 틀을 제안한다. 주체와 객체의 장벽을 허물고, 인간 역시 하나의 사물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자는 것이다.
이 책에서 커시는 생태 철학자 티머시 모턴(Timothy Morton)의 책 『인류』도 소개하고 있는데, 그 책의 부제는 '비인간 존재들과 연대'(Solidarity with Nonhuman People)이다. 우리 말로는 '비인간 존재'라고 옮겼지만, 영어로는 'Nonhuman People'이라고 표현하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대개 'people'이라는 용어를 '인간 존재'에게만 사용한다. 비인간 존재에게는 주로 'things'를 붙인다. 이런 생각은 근대의 특징이다. 근대에 비로소 인간 존재가 다른 존재에 비해 압도적으로 특별해졌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은 이렇게 인간 존재가 극대화된 것의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창세기 이야기는 인간 창조의 이야기를 다룬다. 거기에 보면 명시적으로 나와 있다. 인간은 '하느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이 진술은 근대에 이르러 증폭되어 해석된다. 인간의 주체성은 이 진술로 인해 정당화된다. 이 세상의 중심은 인간이고, 인간을 둘러싼 모든 비인간 존재들은 인간의 번영을 위해서 하느님이 인간에게 주신 선물로 인식된다. 이제 인간은 자신감 있게 비인간 존재들을 자신의 번영을 위해서 마음껏 써도 된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이것은 준엄한 하느님의 명령이다. 이것을 잘 지키는 자가 참된 신앙인이 된다. 인간은 폭주한다. 그 결과가 인류세다.
그러나 창세기의 인간 창조 이야기는 인간 주체의 폭주를 위한 면허증이 아니다. 바벨론의 폭력적인 세계에 대한 저항이다. 바벨론 제국판 창세기라고 볼 수 있는 '에누마 엘리시'(Enūma Eliš)를 보면, 그들의 세계관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알 수 있다. 에누마 엘리시에 의하면, 인간은 신들의 폭력 가운데 탄생한다. 그러므로 누군가를 '노예' 삼는 일은 그들의 세계관에서는 아무렇지도 않은 일이었다. 이스라엘은 그 폭력의 잔혹한 피해자였다. 그 폭력의 한복판에서 태어난 이야기가 바로 구약성경의 창세기이다. 기본적으로 창세기의 인간 창조 이야기는 바벨론의 폭력에 맞선 하느님의 평화에 대한 이야기이지, 인간의 폭주를 허용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창세기 이야기를 통해서 아직도 인간의 특별함을 사유하고, 인간과 비인간 존재를 질적으로 다른 존재로 인식하여 비인간 존재들에 대하여 본인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 것처럼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면, 미안하지만, 그들은 근대의 시대 정신에 사로잡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뒤틀어 '네 이웃을 네 몸을 위해 부려먹는' 일을 자신도 모르게 실천하고 있는 '비신앙인'일 수 있다. (단정적으로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원해 주실 테니 말이다.) 애덤 커시는 이렇게 말한다.
"비인간 존재들과의 연대(Solidarity with nonhuman people)는 그저 비인간 존재들을 친절하게 대하는 것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그것은 동물, 식물, 돌, 폭포 같은 존재들이 세상 속에서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며, 그 방식이 우리의 방식만큼이나 타당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46쪽).
그런데 나는 이 대목에서 멈추지 않을 수 없다. 인간에 대해서조차 비인간적으로 사유하고 대우하는 '인간 존재들'이 과연 '비인간 존재들'에 대하여 이러한 마음을 가질 수 있을까? 분명히 우리 눈앞에 '존재'하고 있는 성소수자들을 '비인간' 취급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유하는 이들이 '비인간 존재들과의 연대'라는 사유를 받아들일 수 있을까? '동물신학'을 말했더니, 그런 게 성경 어디에 있느냐고, 성경적인 근거를 대라고 말하는 이들에게 '비인간 존재들'과의 '연대'를 기대할 수 있을까? 커시의 책은 바로 이 물음 앞에 우리를 세운다. 우리가 인간 존재들 사이의 연대조차 이루지 못하면서 비인간 존재들과의 연대를 말할 수 있는가.
인류세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어디에 있을까? 근대의 사유, 곧 인간중심주의를 끝까지 밀어붙이려 하는 기술지상주의자들은 기술(technology)이 인류를 인류세의 위기에서 구원해 줄 거라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그렇게라도 인류가 구원받으면 좋겠다.) 하지만 이 책에서 던지고 있는 질문을 우리는 간과할 수 없다. 근대가 가져온 가장 큰 문제는 '인간 존재들'과 '비인간 존재들' 사이의 '단절'(severing)이다.
교회는 이 깊은 '단절'을 알지 못한 채, 그저 '죄'로 인한 '하느님과 인간의 단절'만 주구장창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 단절은 이미 그리스도를 통해 회복되었다. 그것이 복음이다. 이제 우리는 하느님과의 단절을 극복한 그 복음, 그 화해 안에서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단절'을 극복하기 위해 진력을 다해 살아야 한다. 그게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우리 시대, 인류가 극복해야 할 '단절'은 무엇인가? 너무도 자명하다. "네 이웃을 네 몸을 위해 부려먹으라"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로 돌려놓는 것이다. 말씀과 현실 사이의 단절, 이 단절이 우리 삶의 현실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인류세는 인류가 극복해야 할 시급한 '단절'로 '인간 존재들'과 '비인간 존재들'의 단절을 말한다. 그리고, 나는 거기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인간만 'people'이 아니다. '비인간 존재들'도 'people'이다. 우리(Human Beings & Nonhuman Beings)는 모두 하느님의 백성(people of God)이다. 우리가 이러한 '객체지향 존재론'(Object-Oriented Ontology), 또는 '객체지향 신학'(Object-Oriented Theology)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인류는 인류세를 끝으로 이 땅에서의 여정을 마무리 짓게 될 것이다.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장준식 목사
미국 실리콘밸리 소재 세화교회 담임.
<예배자의 기도>, <기후 교회로 가는 길> 등의 저자.
여러 신문에 글을 기고 하는 칼럼니스트
미국 에모리대학교와 GTU에서 조직신학(정치신학)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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