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해협은, 어디나 있다
조광호 신부의 동검도 이야기
이름 하나가 세상의 두 얼굴을 동시에 품을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호르무즈(Hormuz)일 것이다.
요즘 미디어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지명 중 하나가 호르무즈이다. 전 세계 원유의 약 20%가 통과하는 이 해협은 폭이 40킬로미터 남짓에 불과하지만, 국제 정세가 흔들릴 때마다 그 이름은 어김없이 갈등의 중심에 떠오른다. 사람들은 이곳을 "세계 에너지의 목줄"이라 부른다. 이 목을 쥐었다 놓았다 하면서 세계가 요동치고 있다.
봉쇄와 긴장,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우는 곳. 뉴스 속 호르무즈는 언제나 그런 얼굴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이름의 뿌리를 조용히 거슬러 올라가면, 전혀 다른 세계와 마주하게 된다.
호르무즈는 고대 페르시아어에서 유래한 말로, 본래 '지혜의 신', '빛과 질서의 신'을 뜻한다고 한다. 신성함과 빛, 그리고 세상을 선으로 이끄는 근원적 "빛과 지혜" 고대 페르시아인들은 이 이름 안에 질서와 희망을 조심스럽게 담았다. 그것이 호르무즈의 본래 얼굴이었다.
빛의 이름을 가진 곳이, 오늘날 어둠의 협박이 반복되는 곳이 되었다. 우리는 지금, 어디서부터 어긋난 것일까. 빛은 그 자체로 선하다. 지혜도 그 자체로 아름답다. 그러나 그것을 손에 쥔 인간은 그 빛을 언제든 방향을 바꿀 수 있다. 등불로 삼으면 어두운 길을 밝히지만, 무기로 삼으면 세상을 더 깊은 어둠으로 몰아넣는다.
빛에는 죄가 없다. 지혜에도 죄가 없다. 다만 인간의 오욕이 그 빛을 굴절시키고, 그 지혜를 왜곡할 뿐이다. 호르무즈는 바로 그 이율배반의 현장이다. 생명을 잇는 통로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욕망이 가장 날카롭게 충돌하는 지점이다. 이것이 인간이 만들어 낸 가장 오래된 모순이며, 가장 처절한 아이러니다.
인간은 언제나 두 얼굴을 가진 존재였다. 사랑을 말하면서 지배를 꿈꾸고, 평화를 외치면서 무기를 쌓는다. 정의를 내세우면서 욕망을 관철한다. 호르무즈는 그 모순을 숨기지 않고 날것 그대로 세상 앞에 드러낸다. 그래서 이 해협은 단순한 지리적 요충지가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내면을 비추는 거울이다.
그리고 바로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그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이 강대국만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 그것은 놀랍도록 우리 자신을 닮아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 해협은 어디에나 있다.
페르시아만의 좁은 물목에만 호르무즈가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사회 곳곳에 관계형성이 존재하는 모든 곳에 호르무즈는 존재한다. 우리각자의 일상 안에도 저마다의 호르무즈가 있다. 누군가를 향해 건네는 말 한마디, 작은 이익 앞에서 내리는 결정 하나, 불편한 진실 앞에서 눈을 감을 것인지 마주할 것인지의 선택. 우리가 매일 통과하는 그 선택의 자리가, 곧 우리 삶의 호르무즈다.
직장에서 후배에게 공을 돌릴 것인지 가로챌 것인지. 자존심을 내려놓을 것인지 끝까지 고집을 부릴 것인지. 힘없는 이웃의 억울함 앞에서도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그의 목줄을 쥐어 짤 것인지. 이 모든 순간이 우리에게 주어진 호르무즈 해협이다.
그 폭은 40킬로미터가 아니라 고작 한 걸음, 한 마디, 한 호흡에 불과하지만, 그 선택이 만들어 내는 세계는 결코 작지 않다. 우리가 손에 쥔 작은 빛과 지혜를 어디로 향하게 하느냐, 그 선택 하나하나가 쌓여 우리가 사는 세상의 얼굴을 만든다. 거대한 해협의 운명이 강대국들의 결정에 달린 것처럼, 우리 공동체의 미래도 결국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선택 위에 세워진다.
인간은 자유 안에서 선택한다. 그리고 그 자유를 사랑과평화의 길로 이끌수도 있고 이기심으로 증오와 폭력으로 파멸로 이끌 수 도 있다. 결국 선택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며, 그 선택의 결과 또한 인간이 감당한다. 빛과 욕망, 지혜와 탐욕. 이 두 힘은 인간 안에서 끊임없이 충돌하며, 그 충돌의 결과가 곧 역사였다.
강대국들은 저마다 정의를 내세우며 이 해협을 두고 다툰다. 그러나 그 다툼의 이면에는 언제나 이기심과 두려움, 그리고 더 많이 갖고자 하는 욕망이 자리하고 있다. 우리는 그것을 알면서도 쉽사리 다르게 살지 못한다. 그 사실 앞에서 우리는 겸손해지지 않을 수 없다. 남의 욕망을 손가락질하기 전에, 내 안의 욕망을 먼저 들여다보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신앙은 바로 이 갈림길 앞에서 우리에게 조용히 묻는다. 당신은 그 빛을 어디로 비추겠느냐고. 그 빛을 나누는 손이 될 것인가, 그 빛으로 상대를 겨누는 손이 될 것인가. 그 선택은 생명이 될 수도 있고, 죽음이 될 수도 있다.
호르무즈는 오늘도 그 질문을 멈추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아직 충분히 대답하지 못한 채, 오늘도 그 해협을 바라본다. 어쩌면 그 침묵 속에 인류의 가장 오래된 모순이 여전히 숨 쉬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침묵이 반드시 절망을 뜻하지는 않는다. 질문 앞에 머무는 사람은, 아직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호르무즈라는 이름이 처음 품었던 것처럼, 우리의 선택도 언젠가 빛이 될 수 있다. 그 믿음을 조심스럽게 붙들고, 우리는 오늘도 저마다의 호르무즈를 건너간다. 크고 화려한 결단이 아니어도 좋다. 오늘 하루, 내 손안의 작은 빛을 한 사람에게 따뜻하게 건네는 것으로도, 우리는 충분히 이 이름의 본래 의미에 가까워질 수 있다. 그 해협은 어디에나 있다. 그리고 그 해협을 건너는 선택도, 언제나 우리 안에 있다. 그것이 부족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정직하고 가장 아름다운 시작일 것이다.
조광호 신부
1967년 천주교 성 베네딕도 수도회에 입회하여 서울 가톨릭대 신학부를 졸업하고, 신부가 된 다음 독일 뉘른베르크 미술대학을 졸업했다. 천주교 주교위원회 출판국장으로 천주교 200주년 기획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독일유학 후 한국현대미술 50년전, 일본 국제 현대미술전 및 국내외(독일, 미국, 오스트리아) 10여 차례 개인전과 여러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월간 영성문화교양지 <들숨날숨>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인천가톨릭대학교 조형예술대학 학장을 역임하고, 현재 강화 동검도 채플과 갤러리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대표적인 미술 작품으로는 부산 남천 성당 유리화와 서울 2호선 당산철교 외벽의 벽화, 서소문 현양탑 등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그대 문의 안과 밖에서>, <꽃과 별과 바람과 시 - 조광호 신부 그림 에세이>, <얼굴 - 조광호의 그림과 글>, <Angel - 조광호 신부 명상 Drawing>, <조광호의 스테인드글라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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