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정말 그분을 사랑하는 것일까
한상봉 칼럼
“그냥 그 곁에만 있으믄 배도 안 고프고, 몇 날을 나도 힘이 안 들고, 잠도 안 오고 팔다리도 개뿐허요. 그저 좋아 자꾸 콧노래가 난다요. 숟가락 건네주다 손만 한번 닿아도 온몸이 다 찌르르허요. 잘 있는 신발이라도 다시 놓아주고 싶고, 양말도 한번 더 빨아놓고 싶고, 흐트러진 뒷머리칼 몇올도 바로 해주고 싶어 애가 씌인다요. 거기가 고개를 숙이고만 가도, 뭔 일이 있는가 가슴이 철렁허요. 좀 웃는가 싶으먼, 세상이 봄날같아 환해져라우. 그 길로 그만 죽어도 좋은 것 같아져라우. 남들 모르게 밥도 허고 빨래도 허고 절도 함시러, 이렇게 곁에서 한 세월 지났으면 혀라우.”
김사인 시인의 <어린 당나귀 곁에서>라는 시집에 실린 ‘보살’이란 시입니다. 그이 곁에 있으면 “세상이 봄날같이 환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이에게로 자꾸 손길이 다가서고, 뭐라도 해주고 싶다 합니다. 그런 사랑 한번 해볼 수 있다면, 그런 사랑 한번 만날 수 있다면 여한이 없을 테지요. 시인에게는 그런 사랑이 ‘어린 당나귀’일 수도 있겠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시인은 후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 어린 당나귀는 “고집 세고, 욕심많은 이놈”이라고. 그래서 서로를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염려하는 당나귀이고, 언젠가 그를 버릴지도 모른다는 예감 때문에 슬픈 짐승입니다. 그런데도 그와 더불어 지렁이처럼 “가는 데까지 배밀이로 나아갈 뿐”이라 합니다. 그리고 시인에게도 당나귀에게도 “모과나무 너머 파란 하늘이 고요하고 귀하다” 합니다. 그래서 조용히 숨을 쉬고, 손발의 힘도 빼고 가만히 있는다 합니다.
‘임’이란 그런 것이겠지요. 흠결 없이 투명한 영혼이어서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흠 많고 흐릿해도 사랑하는 게 사랑입니다. 예전에 알던 조희선 시인은 <아주 잠시>라는 시집에서 우리들 사랑은 조금씩 다르다고 말합니다. ‘차이’라는 시에서는 “나는/그래서, 사랑하고//그분은/그래도, 사랑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우리 사랑은 ‘그래서’라는 당연히 흘러드는 사랑이 아니라 ‘그래도’라는 역설적인 사랑이어야 예수님의 사랑을 닮아가겠지요.
위험을 무릅쓰는 사랑
우리에게 예수님이 내가 사모하는 ‘임’이라면, 가난한 백성들은 예수님이 연모하던 ‘임’이었습니다. 하혈병을 앓는 여인이든, 천장을 뚫고 내려온 중풍병자든, 배고픈 군중이든, 해맑은 어린아이든, 심지어 간음하다 거친 남정네들에게 붙잡혀 온 여인까지도 그분에겐 ‘임’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라고 하셨던 분은 아버지 하느님이 사랑하시던 백성을 당신도 사랑하자고 나선 분입니다. 모세를 통해 드러난 하느님은 이집트 노예들을 구출하시는 분입니다. 그이들을 당신 백성으로 삼으신 분입니다.
이런 사랑은 상식을 거스르고 위험을 무릅쓰는 사랑입니다. 예수님이 나도 아버지처럼 일한다고 선언한 배경에는 벳자타 못가에 있던 서른여덟 해나 누워지내던 사람이 있습니다. 그이는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었던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이란 꼭 필요할 때 부를만한 이웃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이 주변에는 판검사도 변호사도, 의사도 간호사도, 사업가도 공무원도, 친구도 가족도 사실상 없습니다. 마땅히 신세한탄을 들어줄만한 사람도 없습니다. 요즘으로 치자면, 고독사 하기 딱 좋은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그이를 고쳐주었는데, 하필이면 그날이 안식일이었고, 요한복음서에서는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5,16)라고 적어놓았습니다.
박해받기를 두려워하지 않은 사랑이 예수님 사랑이고, 예수님 사랑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은 산상설교를 하시면서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라 하신 것입니다. 세상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하느님만은 내 사랑을 알아주리라 믿는 게 신앙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를 마다하고, 하느님 현존 안에서 사는 게 신앙인입니다.
먼저 동무도 되고 동지도 되고
언젠가부터 저는 예수님을 ‘하느님’이라고 고백하는 걸 접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몰라서도 아니고, 거부해서도 아닙니다. 교회 전통이 가르치는 대로 예수님은 성자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의 마음을 지니셨겠지요. 그분은 성령으로 어머니 마리아의 자궁에 맺혔던 거룩한 씨앗이고, 그분은 죽어 되살아나셨고, 승천하신 분이겠지요. 하지만 이 모든 교리보다 제 가슴에 와서 닿는 것은 그분이 ‘온전한 사람’이셨다는 것이고, 남다른 사랑으로 나를 놀라게 하신 분이란 사실입니다. 하늘에 속한 것은 하늘에서 논하고, 땅에 속한 것은 땅에서 논할 문제입니다. 그래서 아득한 하느님보다는 친밀한 예수님과 사귀고 싶습니다. 만나서 동무도 되고 동지도 되고 연인도 되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분이 ‘아버지’라고 발음했던 그분의 하느님을 나도 따라서 섬기고 싶습니다. 그렇게 그분께 속한 모든 것에 마음을 쓰고 싶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알고 알아서, 내가 그분을 배우고 익혀서, 내가 그분을 따라 걷고 일하다 보면, 어느 날 문득 십자가 아래 서 있던 백인대장처럼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고 고백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그분은 제게 동무였다가, 동지였다가, 연인이었다가 ‘주님’이 될지도 모릅니다. 나를 온통 드려도 아깝지 않은 분, 그분 말씀이라면 뭐든 곧이곧대로 믿고, 기꺼이 그분의 소유가 되기를 자청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이처럼 어느 날 문득 예수님을 두고 나도 토마스 사도처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이라고 말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모든 걸 주어도 아깝지 않을 사랑
섣부른 사랑 고백은 위태롭습니다. 우리는 낯선 자에게 나를 맡기지 않습니다. 그이를 알고 알아서, 배우고 익혀서, 따라 살며 함께 일하고 나서야, 그이가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뒤늦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를 알고 싶다.” 알고 싶다는 것은 사랑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이 성전세력에게 연행되어 처형될 때까지도 그분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 생전에 그분이 제자들과 지낸 시간은 서로 알아가는 과정이었으며, 정(情)을 곱들이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분이 돌아가시고 나서야, 이분이 그분이시구나, 깨닫게 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 사후에야 사랑이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예수님이 누군지, 왜 그때 그런 말씀을 하셨는지 뒤늦게 알아차리게 됩니다. 진실은 항상 한걸음씩 늦게 깨닫게 되는 모양입니다.
그분이 ‘아버지’라고 부른 하느님이 사랑이시고, 예수님이 사랑이시고, 우리도 사랑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사랑해서 우리도 그분처럼 죽어야 한다는 걸 알았습니다.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요한 15,13)기 때문입니다. 그때부터, 사랑이 사랑임을 알게 된 뒤로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내 모든 것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사랑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부활 신앙은 그렇게 오는 것입니다. 복음서에서는 생전에 예수님을 경험하지 못했던 이들이 부활한 예수님을 만났다는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부활한 예수님은 생전에 그분과 이야기를 나누고 함께 일했던 사람들에게만 나타나십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경험하지 않으면 그분을 사랑할 수 없고, 그분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분의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걸 알려 줍니다. 말로 입으로 신앙고백을 한다고 그분의 사람이 되는 게 아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녀들을 만드실 수 있”(마태 3,9)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입 싸게 고백하기 전에 그분의 동무가 되어야 합니다. 그분과 친밀하게 우정을 나누고, 그분과 뜻을 함께 나누는 동지로 살면서 그분을 맛들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찬찬히 그분을 알아가야 합니다. 그러다 그분을 정말 사랑하게 되면 그때 비로소 “나의 주님”이라 말해도 늦지 않습니다. 육십 평생 신앙생활을 했다고 저절로 하느님의 사람이 되는 게 아닙니다. 성당에 다닌다면서 우상숭배에 빠지지 말라는 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습관적 신앙이 무서운 것입니다. 그분이 누군지도 모르고 하는 사랑은 정작 사랑이 아닙니다. 그래서 질문하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오늘 저녁 잠자리에 들기 전에 한번 생각해 봅니다. 나는 과연 예수님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나는 과연 하느님이 누구신지 알고 있기나 한가? 잘 알지도 못하는 분을 ‘주님’이라 부르고, 사랑한다 말하지 않았나? 이럴 때 ‘사랑’이라고 발음하는 내 입술이 부끄럽지 않다면, 그이는 복된 사람입니다. 이미 그 사랑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성탄절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이제는 사순절이랍니다. 예수님에게 삶과 죽음이 그렇게 가까이 있었나 싶습니다. 아니면 태어나면서 이미 죽음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마태오복음에서는 예수님이 나신 자리에 헤로데의 칼날이 후비고 들어왔다고 하니, 그 말도 틀린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신앙고백 안에서, 성탄절이란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에게 이제 친구가 되자고, 사랑을 해보자고 작심하신 날입니다. 대림절이란 그렇게 그분이 우리에게 오는 동안 우리도 그분에게로 가는 날입니다. 황지우 시인은 ‘너를 기다리는 동안’이라는 시에서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내 가슴에 쿵쿵거린다”고 했습니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다 안다”고 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아리고도 벅찬 기쁨인지를. 그래서 마냥 기다릴 수 없음을. 그러니, 그분을 기다리는 나의 심정을 헤아리는 것만으로도 나의 사랑, 나의 믿음을 가늠할 수 있겠지요.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우정과 사랑으로 그분을 만끽하기도 사순절입니다. 봄기운이 마음에 닿기도 전에, 그분의 수난과 부음을 듣게 됩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뼈저리게 경험하는 시간입니다. 나는 정말 그분을 사랑한 것일까, 스스로 의심하는 시간입니다. 복음서를 그분의 유서처럼 받아들고, 그분이 시몬 베드로에게 했던 말을 기억합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순간에 세 번이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 하고 묻습니다. 그때 나도 베드로처럼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요한 21.16) 하고 말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사순절은 어렵게 만난 그분 앞에서 나의 사랑을 새삼 재차 확인하는 순간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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