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화강 흐르는 황산도에서
조광호 신부의 동검도 이야기
1.
“나는 일생 동안 밖에서 당신을 찾았으나 당신은 내 안에 계셨습니다.”(아우구스티노, 『고백록』)
이 고백은 한 성인의 회심을 넘어 인간 존재 전체의 비밀을 드러내는 문장입니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이 문장을 살고 있습니다. 다만 아직 그것을 깨닫지 못했을 뿐입니다.
강화 초지대교를 건너 왼편으로 가면 작은 섬 황산도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나는 동검도에서 염화강을 따라 가는 이 황산도 둘레길을 자주 걷습니다.
황산도. 김포 대곶과 마주한 그 사이로 짜디 짠 염화강이 흐르고, 조석의 급한 물살은 쉼 없이 바위를 스쳐 지나갑니다. 그 흐름은 강과 바다를 따라 멈춘 적이 없이 .밀물썰물이 밀고 당기며 수 억 만년을 세상에 그무슨 사연이 있어도 아랑곳없이 침묵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2.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밖을 향해 나아갑니다. 세상을 배우고, 사람을 만나고, 무언가를 이루고, 인정받고, 증명하려 합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면 더 나은 사람이 될 것이라 믿고, 더 높은 곳에 오르면 비로소 자신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밖으로, 밖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나 그 길은 끝이 없습니다. 얻으면 또 부족하고, 도달하면 또 다른 목표가 생깁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설명할 수 없는 공허가 마음 깊은 곳에서 조용히 고개를 듭니다.
3.
염화 강가의 바위를 바라봅니다. 수억만 년 동안 물은 바위를 부수지 않았습니다. 다만 닿고, 물러나고,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 반복 속에서 바위는 아직도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대신 깍이고 깊어 졌습니다.
깊게 파인 바위의 홈 마다 물이 고여 있습니다. 그 안에는 하늘이 담겨 있고, 빛이 조용히 흔들립니다. 바다는 물러났지만 사라지지 않았고, 그 흔적은 억 만 년 침묵의 고요 속에 자신을 지키고 있습니다.
천태만상의 자연의 변화 속에서도 저 검은 침묵의 바위는 오로지 자기 모습으로 자기의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4.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어디에 있든지 주인이 되면, 그가 서 있는 그 자리가 모두 진리가 된다. 불교 임제선사의 말이 생각납니다. 이 말씀은 더 이상 수행자들만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다시 주어진 부름입니다.
오늘의 우리는 많은 것을 알고 있지만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합니다. 끊임없이 연결되어 있지만 내면과는 단절되어 있습니다. 수많은 선택 속에서 살지만 무엇이 나인지 모릅니다. 그래서 정체성은 흔들리고, 자존감은 타인의 시선에 기대며, 존재는 점점 가벼워 지고, 번뇌의 뜨거운 불로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때 임제의 “주인이 되어라.” 늘 이 말씀은 지배의 명령이 아니라 흩어진 존재 를 다시 중심으로 모으라는 초청의 귀환 언어입니다. 밖으로 흩어진 의식을 다시 자기 존재의 자리로 되돌리라는 말씀입니다.
한 뼘 자기 내면엔 깜깜 무심으로 살아 가지만 인간은 끊임없이 밖으로 밖으로 화성까지 가려고 안달을 하고있습니다. 하느님을 찾아 나서는 것도 결코다르지 않습니다.
이 길을 가장 깊이 밝힌 이는 마이스터 엑크하르트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태어난다.” 그러나 그 자리에는 하나의 조건이 있습니다. 완전히 비어 있어야 한다는 것. 그러나 죽고 나서 30분이 지나서야 완전히 비워지는 인간 조건에 어쩌면 이 말씀은 가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엑크하르트가 말하는 비움은 공간적 결핍이 아닙니다. 자기 주장과 집착, ‘나’라는 고집된 중심이 내려앉을 때 영혼 안에는 하나의 공간이 열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비움의 상태를 오히려 “영혼의 불꽃”이라 불렀습니다.
그 불꽃은 밖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 안에 있지만 비워질 때에만 드러나는 존재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5.
다시 바위를 바라봅니다. 깎여 나간 자리, 비어 있는 자리, 그러나 그 안에 어쩌면 아직도 태초의 용암의 붉은 불의 흔적이 남 아있을 것입니다. 그 흔적 위에 지금은 물이 머물고,빛이 머물고, 하늘이 머물고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돌이켜 생각 해 보면 세 사람의 말이 하나로 이어집니다.
아우구스티노: 안으로 돌아오라.
임제: 그 자리에서 주인으로 서라
엑크하르트: 비워져라, 그곳에서 태어난다
이들의 가르침은 결코 서로 다른 가르침이 아니라 하나의 길이 됩니다. 밖으로 흩어졌던 존재가 안으로 돌아오고, 그 자리에서 깨어 서며, 비워진 깊이 속에서 비로소 참된 존재가 태어나는 길을 말하고있습니다.
나는 오늘도 저 황산도 바위 앞에 서 있습니다. 아무것도 더하지 않고,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고, 그저 서 있는 자리. 바람이 스치고, 물은 다시 들어올 준비를 합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아주 미세한 울림 하나가 내 안에서 시작됩니다. 나는 묻습니다.
나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나는 누구의 시선 속에 살고 있는가.
나는 내 안으로 온전히 돌아온 적이 있는가.
그리고 아주 조용히 하나의 문장이 다시 울립니다.
“당신은 내 안에 계셨다.”
찾아 나서는 존재가 아니라 돌아오는 존재가 되어야 할것입니다. 그리고 그 귀환의 자리에서 비로서 나는 나 자신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 해 봅니다. 잠시 눈을감고 나의 내면을 관해 봅니다.
나의 내면에도 또 하나 염화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내가 태어나던 날 부터 하늘에서 내려온 강은 검은 산 그림자를 가슴에 안고 바다로 흘러 흘러 다시 저 먼 하늘가로 흘러가고 있습니니다. '그렇습니다.
하늘에서 내려 온 강은 다시 하늘로 흘러 가고 있습니다. 저 고요하고 신비스러운 거대한 침묵의 '흐름 위에서', 저 장대한 '흐름속에서'나는 잠시 꿈결 같은 세상에 또 하나 흐름이 되어, 신의 가슴 하늘 바다로 흐르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조광호 신부
1967년 천주교 성 베네딕도 수도회에 입회하여 서울 가톨릭대 신학부를 졸업하고, 신부가 된 다음 독일 뉘른베르크 미술대학을 졸업했다. 천주교 주교위원회 출판국장으로 천주교 200주년 기획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독일유학 후 한국현대미술 50년전, 일본 국제 현대미술전 및 국내외(독일, 미국, 오스트리아) 10여 차례 개인전과 여러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월간 영성문화교양지 <들숨날숨>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인천가톨릭대학교 조형예술대학 학장을 역임하고, 현재 강화 동검도 채플과 갤러리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대표적인 미술 작품으로는 부산 남천 성당 유리화와 서울 2호선 당산철교 외벽의 벽화, 서소문 현양탑 등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그대 문의 안과 밖에서>, <꽃과 별과 바람과 시 - 조광호 신부 그림 에세이>, <얼굴 - 조광호의 그림과 글>, <Angel - 조광호 신부 명상 Drawing>, <조광호의 스테인드글라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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