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람스코이, 광야의 그리스도 “이 길을 계속 걸어갈 수 있을까?”

2월 22일 사순 제1주일 복음묵상

2026-02-16     한상봉 편집장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로 광야에 나가시어,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그분께서는 사십 일을 밤낮으로 단식하신 뒤라 시장하셨다.
그런데 유혹자가 그분께 다가와,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1-4)

공관복음에서는 모두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뒤에 광야에서 사탄에게 유혹을 받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알다시피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에 대한 전갈은 세례자 요한에게서 시작된 운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요한의 뜻에 깊이 공감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로마제국의 속주였던 팔레스타인에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한다는 것은 요즘 말로 ‘역모’(逆謀)에 다름 아니었고, 세례자 요한처럼 목이 잘려 죽을지도 모르는 위험한 일입니다. 산상설교에서 예수님이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마태 5,12)고 말한 것은 괜스레 던진 말이 아닙니다.

광야에서 예수님은 세 가지 엄청난 유혹을 받고도 당당히 사탄을 물리쳤다는 이야기를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에서는 장엄하게 ‘승전보처럼’ 전합니다. 하지만 마르코복음에서는 이 부분을 아주 간단히 소개하고 넘어갑니다.

“그 뒤에 성령께서는 곧 예수님을 광야로 내보내셨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또한 들짐승들과 함께 지내셨는데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마르 1,12-13)

많은 화가들이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그렸습니다만, 이반 크람스코이(Ivan Nikolaevich Kramskoy, 1837-1887)는 ‘광야의 그리스도’(Christ in the Wilderness, 1872)에서 지치고 잔인한 슬픔에 잠겨 있는 그리스도를 화폭에 담았습니다. 거기엔 영웅적인 메시아의 모습도 통쾌하게 사탄을 물리치는 무용담도 없습니다. “과연 이 길을 끝까지 걸어갈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배어나오는 그림입니다. 톨스토이는 이 작품을 두고 “내가 본 그리스도 중 최고”라고 찬사를 보냈지만, 교회 지도자들이 보면 언짢아할 만한 그림입니다.

이반 크람스코이는 1837년 러시아 오스트로고쥬스크 시의회 서기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1857년 상트페테르부르크 미술 아카데미에서 미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1863년에 졸업작품을 준비하면서 ‘농노 해방령’을 내린 황제를 칭송하는 그림을 그리라는 요구를 거절하고, 중도에 학교를 나와야 했던 크람스코이와 동료들은 ‘페테르부르크 예술가 조직’을 결성하고 작업실과 주거지를 공유하는 공동체 생활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1870년 ‘러시아 이동전시협회’를 창립해, 일리야 레핀(Ilya Repine), 바실리 수리코프(Vasily Surikov), 바실리 페로프(Vasily Perov), 이사크 레비탄(Isaak Levitan) 등과 더불어 러시아의 여러 도시를 이동하면서 전시회를 개최한다는 의미에서 스스로 ‘이동파(移動派)’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반

이동파 작가들은 귀족이나 부유한 사람들의 호기심을 만족시켜 돈과 명예를 얻는 미술전시회의 관행을 깨고, 누구든지 그림을 관람할 수 있도록 하였고, 당연히 민중의 정서를 반영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크람스코이는 “화가는 사회에 대해 도덕적인 의무를 가진다”고 생각했으며, 러시아 사회의 이상과 도덕을 추구했습니다. 즉, 러시아 현실에서 민중들에게 예술을 통해 삶의 방향과 지혜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가운데 한 작품이 ‘광야의 그리스도’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고뇌를 담아내는 그림이기도 하고, 어쩌면 당대의 러시아 지식인 또는 예술가들이 피해갈 수 없었던 현실적 고민을 표현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을 두고 ‘사막의 그리스도, 크람스코이 씨의 그림’이라는 평론을 쓴 이반 곤차로프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 그림에는) 축제 분위기도, 영웅적인 모습도, 승리의 모습도 없다. 세상과 모든 생명체의 미래 운명은 누더기 옷을 입은 초라하고 작은 이의 모습 속에, 진정한 위엄과 깊이 연결되어 있는 겸손한 단순함 속에 감춰져 있다.”

이 그림에 대해서는 동해시 북평성당 손용환 신부님이 쓰신 글이 너무 감동적이라서 덧붙일 말이 없습니다. 그 글을 옮겨 적습니다.

“이른 새벽 동이 트는 시간에 바위투성이 광야에 예수님 홀로 바위에 앉아계신다. 살아 있는 생명은 잡초 하나도 보이지 않는 완전한 돌무더기 황무지이다. 예수님께 확대경을 대고 보면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너무 슬퍼서 가슴이 먹먹하고 숨이 멎어버린다. 그냥 작은 화면의 그림으로 보았을 때는 잘 몰랐는데, 확대 기능을 통해 그리스도의 얼굴과 눈과 손과 발을 보는 순간, 심연을 알 수 없는 고뇌하는 예수님의 깊은 눈동자에 어린 우수에 가슴이 저미고, 꽉 쥐고 있는 두 손과 뼈만 앙상하고 거친 맨발에 목이 메게 된다.

예수님은 세상을 구원해야 하는 자기 소명에 대한 깊은 고뇌로 밤을 새워 기도하신 모습이 역력하게 드러나는 초췌하고 피곤한 모습이다. 돌만 가득한 광야는 맨발로 걷기에 너무 힘든 곳이기에 그분의 맨발은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보이지 않는 상태를 묘사하고 있다. 힘줄이 드러나도록 굳게 깍지를 낀 두 손은 너무나도 간절하게 바친 기도의 마무리를 아직도 마치지 못한 상태이다.

그분은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이 세상에 온 하느님의 아들로서 앞으로 자기가 걸어야 할 미지의 길에 대한 깊은 의문과 불안에 찬 모습이다. 먹을 것도 없고 밤의 찬 기운을 피할 곳도 없는 사십 일 동안의 광야 생활은 그분의 얼굴을 핼쑥하게 만들었지만, 그분의 눈빛은 점점 고뇌로 깊어졌다. 지금 세상과 다가올 세상에 대한 새로운 약속을 준비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은 이렇게 고통스러운 일이다.

이 작품은 밑바닥에서부터 저며 오는 깊은 고통으로 인해 예수님의 잔인한 슬픔이 진한 감동으로 전해진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깨달음을 얻기 위해 깊은 명상에 잠겨 있다. 세상의 모든 욕망과 유혹을 떨쳐버리기 위해 광야에서 깊이 내면으로 침잠해 있다. 그분의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경외심을 느끼게 한다. 소박한 마음이지만 그럴 수만 있다면 예수님께 따뜻한 양말이라도 신겨 드리고 싶고, 어깨에 담요라도 덮어드리고 싶으며, 뜨거운 커피라도 들고 가 한 잔 건네고 싶은 심정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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