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기도할 때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은 다음,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 주실 것이다.”(마태 6,6)
그리스도교 신앙의 요체는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따져보면 예수님은 살아 생전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벌거벗은 채 십자가상에서 돌아가셨을 뿐만 아니라, 제자들조차 스승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그래도 원망 없이 그네들을 용서하며 봉헌된 목숨입니다. 그러니, 우리 교회는 사순절의 시작인 재의 수요일에 우리 자신이 본래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갈 것”을 기억하고, 이마에 재를 묻히며 오로지 하느님께서 내어주신 목숨을 그분께 다시 내어드리자고 마음 먹습니다.
오로지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자만이 ‘하느님의 사람’이 됩니다. 기도하고 단식을 하는 것도 그 뜻을 깊이 헤아리려는 몸짓입니다. 본당활동과 성지순례, 대단한 교회건축물과 빛나는 전례가 우리의 구원을 보증하지 않습니다. 그분을 신뢰하고 온전히 자신을 맡기지 못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쌓은 공덕에 기대어 구원을 바라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그분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분이 사랑하시는 백성을 사랑하는지 여부입니다. 하느님의 슬픔을 감당하려는 자만이 하느님의 사람이 됩니다.
오늘 복음은 “숨어계신” 하느님은 “숨은 일도” 보신다고 전합니다. 그분은 우리가 드리는 전례와 기도와 선행 뒤에 숨어 계신 분입니다. 우리들이 겪는 행복과 불행의 갈피에 숨어계신 분입니다. 우리가 말하지 않아도 알아듣고, 우리가 흐느끼지 않아도 울고 계신 분입니다. 그러니 그럴듯한 전례와 기도 뒤에 자신의 욕망을 숨기지 말고, 오히려 그분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야 합니다.
먼저 니콜라이 야로셴코(Nikolai Alexandrovich Yaroshenko, 1846~1898)라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러시아 화가를 소개합니다. 야로셴코가 영감을 받았던 스승은 농노였던 이반 드라티예비치 자이체프(1805~1887)입니다. 야로셴코는 평생 그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품었고, 나중에 그의 초상화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야로센코는 작가와 과학자, 예술가와 배우, 수도자, 죄수 등 100여 점의 초상화를 남겼는데, 한 인간이 지닌 힘겹고 고매한 정신과 마음에 이끌렸기 때문입니다. 사람이란 하느님의 형상이고, 사람을 살피지 않고서 하느님을 가늠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야로셴코의 풍속화는 주로 시민의 슬픔을 주제로 다루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화부>, <죄수 >, <삶은 어디에나 있다>, <학생>, <자비의 수녀>, 그리고 <늙음과 젊음>, <이유는 알 수 없다>, <잊혀진 사원> 등이 있습니다. 오늘은 <죄수>(The Prisoner, 1878)라는 작품을 읽어 보려고 합니다. 차가운 돌로 지은 어두컴컴한 감옥 안에서 한 사내가 쪽창으로 다가가 햇살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쪽창에 가까이 가서 보면, 유리 블럭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 사내는 실제로 감옥에 있기도 하고, 어쩌면 그 감옥만큼 어두운 내면에 갇혀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사실이 어쨌든 그 어둠은 절망적인 상태를 상징합니다.
사내는 빛과 어둠의 경계선에 있습니다. 야로센코는 평소 톨스토이와 친분이 깊었고, 러시아의 전제군주정에 저항하던 진보적 지식인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마도 야로센코는 시국사범으로 감옥에 갇힌 자의 절망을 보여주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는 감옥에 갇힌 자의 좌절과 분노, 그리고 우울함보다는 빛을 향한 갈망이 먼저 눈에 들어옵니다.
사실상 감옥에 갇혀 있는 자는 그 사람뿐이 아닙니다. 자본의 늪에 깊이 침식된 사람은 나이기도 하고, 너이기도 합니다. 어떤 성직자들은 사제의 권위에 갇혀 있고, 어떤 평신도들은 유아적 신앙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오늘과 다를 바 없는 내일을 사는 사람들은 다 수인(囚人)입니다. 이제 사순절이 시작되지만, 우리는 교회력에서 배정된 의식을 행하고, 적절하게 가슴을 몇번 치고나서, 마음은 벌써 부활절로 옮겨가 있습니다. 이마에 재를 받으며, 그동안 내가 움켜잡고 있던 것들이 깃털처럼 가벼운 것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우리 몸은 여전히 어둠에 잠겨 있고, 그 어둠은 쉽게 가실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 그림의 사내처럼 좁은 창가로 다가가 안간힘으로 “빛을 호흡하고 싶다”고 발음하는 사람을 보고 싶습니다. 중력의 법칙에서 벗어나 은총을 갈망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님은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라고 말합니다. 살던 대로 그만그만하게, 무리없이 사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리 사셨다면 십자가에 매달릴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그림의 사내처럼 감옥에 갇힐 일도 없었을 것입니다. 한 가지라도 세상 속에서 세상과 다르게 처신하기로 마음먹는 사순절이 되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