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받는 타자의 자리, 팔레스타인에 오신 예수
김선주 칼럼
‘우리’는 내가 속한 무리에 대한 1인칭 복수 호칭입니다. 서양철학은 ‘나’를 주체로 설정하고 그것에 절대성을 부여했습니다. 나와 우리가 세계의 중심이라고 볼 때 나와 우리 밖에 있는 존재들은 타자입니다. 타인과 타자는 비슷한 뜻처럼 보이지만 다릅니다. 타인이 나와 동류 인간이면서 동일한 주체성을 가진 존재라면, 타자는 ‘나’라는 주체성으로부터 배타적 관계에 있는 존재입니다. 타자는 무관심과 무책임의 영역에 있습니다. 내가 굳이 책임지지 않는 존재가 타자입니다. 타인과 타자는 동류성과 배타성이라는 엄밀한 차이가 있습니다.
하느님과 동일한 주체성을 공유한 인류가 낙원에서 추방되어 타자의 영역으로 유폐됩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인간이 됨으로써 주체가 타자의 영역에 들어가게 됩니다. 예수의 탄생은 하느님이 인간이 된 우주적 사건입니다. 예수의 탄생은 주체가 타자의 영역에 들어감으로써 인간의 타자성이 극복되고 주체성이 회복된 사건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하여 그들 가운데 들어간 이유는 그들이 뛰어나서도 아니고 다른 민족에 비해 죄가 덜해서도 아닙니다. 그들은 떠돌이 유목민에 불과했습니다. 제국의 노예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발전된 문명국가도 아니었습니다. 무능하고 약해 빠진 민족이었습니다. 그들이 선택받은 이유는 순전히 하느님의 주체적인 선택일 뿐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선택은 궁극의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을 통해 인류를 사랑하고 구원하려는 궁극의 계획을 이루어가기 위한 수단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주체성을 또 다른 타자를 만드는 데 사용했습니다. 선민의식은 주체성을 강화하고 타민족과 문화를 타자화시켰습니다. 주체의 폭력이 일어난 것입니다. 스스로 하느님께 선택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입니다. 12.3 내란 이후 대형교회 일부 목회자들의 방자한 태도에서 폭력적 주체성을 보게 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마태오복음 1장 23절 “보라, 처녀가 아이를 가져 아들을 낳을 텐데, 사람들이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이다. 그 이름을 번역하여 옮기면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라는 뜻이다”(새한글성경). 이 본문은 이사야(이사야 7장 14절) 예언자를 통해 주셨던 위로와 회복의 비전을 예수의 탄생에서 확인합니다. 고통받는 팔레스타인의 히브리민족에게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말이 얼마나 큰 위로와 소망이 되는지는 2천 년 전 성서가 기록되던 시대 상황으로 돌아갈 때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의 탄생이 하느님이 인간이 된 사건이고, 그 하느님은 고난의 길을 우리와 함께 걸어가시는 분이라고 말함으로써 말할 수 없는 소망과 위로를 얻고 새 힘을 얻었던 것입니다. 빼앗기고 짓밟히는 오늘의 삶 가운데 하느님이 오셔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의 고백이 ‘임마누엘’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 이름을ᅠ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이다."라는 본문을 오늘의 언어로 바꾸어 말하면 이와 같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부를 것이다, 임마누엘이라고.”
“사람들이 말할 것이다, 그가 하느님이셨다고.”
“사람들이 깨달을 것이다, 하느님이 우리 곁에 계셨다고.”
그 하느님은 지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하늘나라(Heaven)에 계신 분이 아닙니다. 비육신적인 영혼으로 존재하는 분이 아닙니다.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는 초월적 존재가 아닙니다. 고통받고 상처 입으며 신음하는 인간 가운데 우리와 동일한 육체를 입고 와서 그 아픔을 온몸으로 겪으시는 하느님입니다. 그러므로 아기 예수를 영접하는 우리는 고통받는 타자의 자리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 뜻에서 오늘 성탄절 헌금은 이스라엘의 침공과 학살로 죽어가는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형제들에게 보내고자 합니다. 우리가 비록 고통받는 타자의 자리에 몸으로 나아가지 못하더라도 그들을 치유할 수 있는 구호품을 전달할 수는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관용적으로 사용하는 구문 중에 “높고 높은 보좌에서 낮고 천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신 하느님”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주체성을 포기하고 고통받는 타자의 자리에 오신 하느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통받는 타자가 어느 민족인가, 어떤 종교를 가졌는가, 어떤 역사적 배경에서 살아왔는가를 따져서는 안 됩니다. 타자가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에 즉각적으로 반응해야 합니다. 예수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 고통받는 타자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을 이끌어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보인 위선적 태도에 반해 어떠한 선입견도 없이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타자의 고통에 참여했던 사마리아 사람에게서 아기 예수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 보아야 합니다.
아기 예수 탄생을 기뻐하며 감사하는 오늘은 우리 모두 아기 예수가 되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 는 말씀처럼 그들 속으로 들어가 ‘내가 그대들과 함께 있으니 이제 그대들은 우리가 되었습니다.’ 라고 말해야 합니다. 오늘 성탄절 예수님은 고통받는 가자지구의 팔레스타인 형제들에게 오셨습니다. 우리도 예수님 따라서 그곳으로 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