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교회와 성소수자, 예수라면 무엇을 할 것인가
이정화 칼럼
지난 12월 16일, 새길기독사회문화원에서 강남순 교수님의 한국 첫 일정으로 “한국 교회와 성소수자: 예수라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제목의 강의가 열렸다. 이 강연의 주관은 <차별너머 (차별을 넘어서는 감리회 모임)>이다. 교수님은 한국에 오자마자 왜 이렇게 쉽지 않은 주제의 강의를 택했을까? 우리 사회에는 다양한 종류의 차별이 있다. 장애 차별, 성차별, 인종 차별, 외모 차별 등등. 그중에서도 가장 극심한 차별이 성소수자 차별, 아니 성소수자 ‘혐오’다. 교수님은 한국 교회가 성소수자들에게 보이고 있는 ‘적대’가 무지개로 상징되는 ‘환대’로 전환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 ‘무지개 밴드’를 한국 오는 짐 속에 넣어 가지고 오셨단다.
무지개 깃발을 들었다는 이유로 학생들이 신학대학원에서 정학과 퇴학을 당하고, 성소수자와 연대했다는 이유로 목사직이 박탈되거나 면직, 정직을 당하는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는 가톨릭신자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 가톨릭교회도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에 대해 자유롭지 않다. 교수님조차 예전에는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 옆에 앉는 것조차 꺼렸고 ‘이상한’ 사람 취급했단다. 그런데 어느 날 “하이 남순!”하며 말을 걸어오는 그의 목소리, 미소 짓는 그의 눈빛과 얼굴을 보면서, 성소수자에 대해 가진 선입견이 부끄러웠고, 소위 '인식론적 회심'의 계기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성소수자, 선택이 아닌 존재 방식
내가 생각하는 차별의 근원적 문제는 첫째, 인간을 정상과 비정상으로 나누려는 ‘이분법적’ 사유 방식 때문이다. 여성과 남성이 아닌 성은 ‘비정상’이라는 라벨을 붙이고 낙인을 찍어 경계 밖으로 떠밀어버린다. 우리는 나와 같지 않은 ‘다름’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다름을 기어이 틀렸다고 말하며 무리에서 배제해야 속이 시원하다. 둘째, ‘무지(無知)의 소치(所致)’이다. 아는 것이 없거나 미련하고 우악스럽다는 뜻이다. 나를 포함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소수자에 대해 무지하다. 그들은 좋아서 성소수자로 살아가는 게 아니다. 그들은 다르게 태어났고, 그것이 그들이 사는 ‘존재 방식’이다. 알지도 못하면서 차별한다는 것은 명백한 ‘폭력’이다.
교수님은 성소수자 일반은 없다며 다양한 종류의 성소수자가 있고, 차별 또한 다양하므로 늘 구체적 ‘정황’과 연결해서 생각하고, ‘흑백논리’가 가진 위험성을 인식하라고 한다. 이 강의를 주관한 ‘차별너머’ 그룹을 향해서도 “차별이 다양한 정황에서 어떻게 전개되는지 반드시 ‘공부’해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자체적으로 공부하지 않으면 과거의 것만 ‘반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사유하는 시민 아카데미: 이론그룹>의 존재가 중요한 이유다.
종교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
교수님은 성소수자 차별의 문제가 “종교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과 닿아있다고 한다. 철학자 존 카푸토는 "종교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한 것(Religion for lovers)" 이라고 했다. 여기서 ‘사랑’이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커다란 '질문'이라며, 종교나 교단은 출발점(point of entry)이지만, 도착점은 ‘모든 것’이어야 하고 그것이 '예수 정신'이라고 말한다.
철학자 륵펠은 종교는 인간이 시간성을 인식하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고 삶의 의미 물음을 하면서 탄생했고, 종교를 ‘신 있는 구원, 철학을 ‘신 없는 구원’이라고 했다. 철학자 니체는 그의 저서 <Antichrist>에서 예수를 비판하지 않는다. ‘Anti-Jesus’가 아닌 이유다. 기독교가 christ라는 라벨을 붙인 후에 이 땅이 아닌 ‘하늘’만 보게 했다고 지적한다. 그는 예수와 제도화된 기독교를 일치시키지 말고 늘 ‘사유’하라고 했다. 니체의 ‘신은 죽었다’에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죽었다’가 아니라 ‘어떤 신’이 죽었느냐다. 그는 ‘신의 이름으로’ 신을 배반하는 제도 교회를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다.
교수님은 ‘존재론적 평등성’에 대한 텍스트로 창세기 1장 27절을 예로 든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당신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느님의 모습으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로 그들을 창조하셨다."(창세 1, 27)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성서의 이 구절은 ‘여성 평등 운동’의 기독교적 텍스트가 되었다. 반면 여성 평등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창세기 2장의 창조설을 믿는다. “주 하느님께서 사람에게서 빼내신 갈빗대로 여자를 지으시고..."(창세 2, 22) 이 구절은 ‘여성 억압과 차별’의 또 다른 기독교적 텍스트로 쓰이고 있다.
성서는 신앙고백
그러니 우리는 ‘성서는 어떤 책인가’ 질문해야 한다. 나도 교수님과 공부하기 전에는 ‘성서는 성령의 감도로 쓰인 책이니 일점일획의 오류가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것은, 텍스트를 접근하는 방식 ‘읽기 방식’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고, 내 행동에 변화가 생긴다는 것이다. 성서는 첫째, 하느님 말씀(The Word of God) 으로 둘째, 역사적 산물(Historical product)로 접근할 수 있다. 하느님 말씀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들은 성서를 ‘문자 그대로’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신의 이름으로’ 신을 배반하는 오류를 범한다. 성서는 사실적 기록이 아니라 ‘신앙고백’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탓이다.
예수의 가르침은 제도적 교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예수는 ‘어떻게 “함께” 잘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했다. 한국 교회는 이런 예수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다. “당신은 동성애에 찬성하십니까?”라는 질문은 “당신은 왜 여성입니까?”라는 질문만큼이나 어처구니없는 질문이다. 동성애는 ‘선택’이 아닌 지향(sexual orientation)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살면서 “왜?”라는 질문을 많이 하지만 답을 내는 경우는 많지 않다. 데리다는 “The rose is without 'why'?”라고 했다. 교수님은 ‘왜’가 없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상대방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졌다고 한다.
20세기 가장 강렬하고 독보적인 지성의 목소리라는 평을 받는 수전 손택(1933~2004) 은 에세이스트이자, 소설가다. 그녀는 오랜 시간 글쓰기를 주저했다고 한다. 그녀가 남긴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삶을 살고 싶어서,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서 작가가 되고자 했던 것 같다.” 그 후 그녀는 자신의 ‘성 정체성’이 무엇인지 깨달았고, 글을 쓰고 싶다는 강한 욕구를 느낀다고 했다. 수전 손택의 글쓰기를 방해했던 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레즈비언으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고 거짓된 삶을 살고 있는 자기에 대한 깊은 ‘좌절’과 ‘성적 불만족’이었던 것이다.
교수님은 당신이 가르친 학생의 이야기를 나눠주셨다. 샘(Sam)이라는 학생이 연락도 없이 갑자기 연구실로 찾아와서는, 엄마가 7년 만에 “How are you ‘two’?”라고 질문했다며 그 감격을 나누고 싶어서 왔다며 울더란다. 샘의 엄마는 7년이 넘어서야 자기 아들이 성소수자임을 인정한 것이다. 성소수자들은 부모와 가족들에게 받아들여지기까지 수많은 고통과 눈물의 시간을 보내야 한다. 그다음 관문은 사회의 차별과 혐오의 ‘싸늘한 시선’이다. 그것을 견디기 힘든 이들은 자신을 속이며 가식 속에 살아간다. 성 정체성은 선택이 아닌 ‘존재 방식’임을 기억하고 그들을 ‘죄인’ 취급하지 말고 우리의 품으로 끌어안아야 한다.
21세기에 성서를 읽는다는 것
교수님은 성서 속에 들어있는 수많은 차별들을 지적하시면서, 21세기에 성서를 읽는다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것만이 아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목소리까지 읽어내야 한다고 했다. 성서 속의 예수는 종교적 색채가 전혀 없는 사람이다. 오히려 ‘술주정뱅이요, 탐식가’라고 한다. 예수의 구원 범주는 마태오 복음 25장 35절 ‘최후의 심판’에서 극명히 드러난다. 결국 배고픈 이, 목마른 이, 나그네, 헐벗은 이, 병든 이, 감옥에 갇힌 이를 어떻게 대했느냐가 구원 기준이다. 자본주의 시대에 ‘이웃사랑’이란 시혜가 아닌, 사회적 제도를 보장하고 마련하는 것이다. 성소수자가 법적 제도적으로 차별받지 않게 하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다.
마지막으로 교수님은 인간은 그 어떤 조건에서도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고 하시며 차별은, 예수를 배반하는 것이라고 못 박으셨다. ‘차별너머’라는 작은 공동체가 성소수자들과의 연대로 ‘평등의 원’을 확장하고, 사회적 제도적으로 그 일을 꾸준히 해나가는 것이 예수를 잘 믿는 것이라며 부탁과 격려의 인사를 하셨다. 교수님 못지않게 성소수자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을 가졌던 내가 이 강의를 들었다고 그분들을 다 이해하고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면, 그것 또한 교만이다. 나와 다름을 인정하고 그분들의 고통을 조금씩 이해해 가면서 알려고 노력하는 것, 그것이 내가 그들과 연대하는 방식일 것이다.
무지개 밴드, 차별너머 적대에서 환대로
빨, 주, 노, 초, 파, 남, 보, 일곱 색깔 무지개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무지개가 아름다운 것은 색깔 때문이 아니라, 각각의 다른 색깔이 ‘하나’로 모여있기 때문이다. 희망, 환대, 화해, 축복의 상징인 무지개가 차별과 혐오와 적대로 보인다면 그건 우리에게 너무 슬픈 일이다. 강의가 끝나고 우리는 교수님이 미국 대학에서 공수해 오신 ‘무지개 밴드’를 끼고, 작년에 이론그룹 식구들에게 선물해 주신 ‘무지개 양말’을 신고 사진을 찍었다. 이것은 성소수자들을 비롯해서 모든 ‘차별너머’ 연대와 환대와 사랑을 살겠다는 다짐의 예식이었다.
덧, 강의를 마친 교수님과 이론그룹 동료 5명은 아무 계획도 없이 독립문 근처 영천 시장에 갔다. 이른 저녁을 먹자는 발걸음이었다. 애들처럼 꽈배기를 사서 나눠 먹고, 붕어가 들어있지 않은 붕어빵을 먹으며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현래샘의 발걸음이 바빠지더니 결국 우리를 자신의 집과 가까운 서촌에서 전시 중인 <강동석목가구전>에 데려다 놓았다. 이 작품들을 안 봤으면 얼마나 후회했을까 할 정도로 그야말로 장인의 품격이 느껴진 예술이었다. 우리가 감상 하는 동안 현래샘은 집에 가서 우리에게 줄 음식을 만들고 있었단다. 현래샘 집은 갤러리 그 자체다. 우리는 통영이 고향인 현래샘의 음식 솜씨에 감탄하며 편안하고 맛있는 시간을 보냈다. 부자라고 다 베푸는 게 아니라는 것을 현래샘을 보며 느낀다. 뭐 하나라고 챙겨주려는 오지랖 현래샘, 차별당하는 성소수자들이 안쓰러워 사서 고생하시는 교수님, 그리고 그런 분들과 연대하며 시간과 돈을 써가면서 ‘함께’하는 많은 동료 인간이 있어 이 세상은 살 만하지 않은가!
이정화 크리스티나
가톨릭일꾼 코디네이터
신수동성당
유튜브 강의/한상봉TV-가톨릭일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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