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육신공양(肉身供養)-임인덕 세바스티안 신부를 기억하며

조광호 신부의 동검도 이야기

2025-12-22     조광호

1960년대, 한 독일 청년이 조용히 한국 땅을 밟았다. 하인리히 세바스티안 로틀러(Heinrich Sebastian Rotler, 1935~2013). 우리는 그를 임인덕 신부로 불렀다. 그는 1960년대 독일 학생운동의 중심에 섰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그것을 드러내지 않았다. 자신의 과거와 영광을 감추고, 이름 없는 수도자로 살았다.

한국에 온 뒤, 그는 왜관 성베네딕도 수도원에서 반세기 동안 분도출판사를 맡아 일했다. 그의 손에서 번역되어 나온 책들은 당시 한국 민주화운동의 정신적 초석이 되었다. 번역되지 않은 모든 신학 서적은 물론 <해방신학>, <현실에 도전하는 성서>, 솔제니친의 <제7일> 등 군사독재 정권이 금서로 지정했던 거의 모든 책들이 그의 손에서 탄생했다. 

슬라이드에서 비디오, CD플레이어를 거쳐 디지털에 이르기까지, 그가 다루었던 매체는 총체적이었다. 보는 것조차 위험했던 텍스트들이 그의 번역을 통해 한국 사회로 스며들었다. 그는 당시 국가나 심지어 교회에서도 쉽게 승인되지 않던 중요한 저작들과 사상가들을 한국에 소개하셨다. 

수익이 나지 않고 문제만 되는 책들만 골라 출판하니, 수도원 공동체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그는 멈추지 않았다. 지방에서 서울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책 한 권을 통독하고, 표지와 목차, 추천사를 훑어본 뒤, 그 자리에서 바로 번역에 착수하곤 했다. 밤과 낮의 구분 없이 분주했던 그에게 쉬는 시간이란 없었다. 주말이 되면 인근 나환자 정착촌의 담임 신부로서 그들과 함께 지냈다.

몸이 부서져 가는 줄도 모르고 일했다. 나는 몇 년 동안 그의 곁에서 그를 도와서 일했다. 그의 삶에서 진정한 헌신이 무엇인지 배웠고,무엇이 가장 소중한 가치인지 보았다. 그는 나의 생애에서 가장 감동적인 사람이었으며, 어둠 속 길을 비추는 조용한 멘토였다. 어느 누구도 알지 못했던 일화가 하나 있다. 

늦은 밤, 그가 편집실에서 작업을 마치고 침실로 갔을 때, 하얀 시트를 뒤집어쓴 채 잠든 여인이 있었다. 산발한 머리의 정신질환 여인이었다. 그는 단 한 번도 흔들림 없이 곤히 잠든 그녀를 깨우지 않은 채 조용히 시트를 다시 덮어주고 그날 밤 그는 편집실에서 쪽잠으로 밤을 지새웠다. '왜 사무실에서 주무셨느냐' 했더니 오히려 그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고, 자신이 드러나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이제 세월이 지나 나도 그의 곁에 갈 때가 되었으니 ㅡ 그 약속이 해제 되는 지점에 온 것을 느낀다. 나는 세상에서 그것도 아주 가까이에서 가장 예수를 닮은 사람을 모시는 은혜를 입었다. 어느 해 가을, 그는 출판 업무에 지친 몸으로 지방을 다녀오는 길에 그만 대형 트럭과 충돌하는 큰 사고를 당했다. 온몸의 뼈가 산산이 부서져 여덟 번의 수술 끝에 가까스로 살아났다.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면서도 그의 행진은 조금도 멈출줄을 몰랐다. 결국 그 고통의 여파 속에서 끝내 세상을 떠났다. 그는 죽는 날까지 책을 만들고, 복음을 전하고, 이 땅의 자유와 참된 진리를 위해 자신을 불태웠다.

불교에서는 몸을 불살라 부처께 바치는 행위를 '육신공양(肉身供養)'이라 부른다. 그러나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임인덕 신부의 삶 전체가, 그분의 몸과 시간과 피와 뼈가 하느님께 드려진 육신공양이었다고. 그 공양은 제단 위의 불꽃처럼 한순간 타오르지 않았다. 평생을 태워 사그라지는, 조용하지만 가장 뜨거운 불꽃이었다. 그 앞에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진리를 위해 몸을 소진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하느님께 자신을 온전히 바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의 삶은 우리에게 그 질문에 대한 하나의 응답이었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다면 신부님은 조용히 웃으며 "왜 그런 쓸데없는 말을 굳이 적느냐"고 "신부님.ᆢ그만…" 하며 말끝을 흐리셨을 것이다. 그러나 침묵 속에서 불타올랐던 그의 육신공양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을 수 없다. 얼마 전 그의 기일이 지났다. 허름한 차림의 독일 신사, 언제나 가난한 이들 편에 섰던 가난한 사제, 몸과 마음을 온전히 하느님과 이 민족의 제단에 희생 제물로 바친 숨은 순교자, 임인덕 세바스티안 신부님. 

주님,
평생 몸과 시간과 뼈와 피를 바쳐
진리와 자유의 길을 밝힌 그 삶을 기억하게 하소서.
숨어 있는 선(善)이
어떤 화려한 봉헌보다 더 깊은 제물임을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소서.
그가 남긴 조용한 불꽃이
우리 안에서 꺼지지 않게 하시며,
진리 앞에서 비겁하지 않도록
우리의 마음을 굳세게 하소서.
주님,
이제 그 불꽃이
당신 품 안에서 평화를 누리게 하소서.

아멘.

** 세바스티안 성인”(Saint Sebastian)은 4세기초 로마제국. 황제 친위대 일원이었다. 박해 시절 그리스도 교인을 몰래 돌보다가 발각 되어 순교하셨다. 그는 폭력의 시대에 신앙을 증언한 침묵의 저항자, 권력에 맞선 양심의 순교자, 몸을 통해 신앙을 봉헌한 육신공양적 삶을 산 성인입니다. 임인덕 세바스티안 신부님의 삶과 너무나 닮아있다. 몸과 마음 , 자신의 주검을 제단에 바친 순교자 시대의 어둠 속에서 진리와 인간 존엄을 지키려 한 삶 세바스티안 성인은 “몸으로 드려진 순교”의 표상은 어찌 이토록 닮게 되었을까.

 

조광호 신부
1967년 천주교 성 베네딕도 수도회에 입회하여 서울 가톨릭대 신학부를 졸업하고, 신부가 된 다음 독일 뉘른베르크 미술대학을 졸업했다. 천주교 주교위원회 출판국장으로 천주교 200주년 기획위원으로 활동했으며, 독일유학 후 한국현대미술 50년전, 일본 국제 현대미술전 및 국내외(독일, 미국, 오스트리아) 10여 차례 개인전과 여러 단체전에 참여하였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 월간 영성문화교양지 <들숨날숨>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인천가톨릭대학교 조형예술대학 학장을 역임하고, 현재 강화 동검도 채플과 갤러리에서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대표적인 미술 작품으로는 부산 남천 성당 유리화와 서울 2호선 당산철교 외벽의 벽화, 서소문 현양탑 등이 있으며, 지은 책으로는 <그대 문의 안과 밖에서>, <꽃과 별과 바람과 시 - 조광호 신부 그림 에세이>, <얼굴 - 조광호의 그림과 글>, <Angel - 조광호 신부 명상 Drawing>, <조광호의 스테인드글라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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