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기시즘과 하느님 나라

최태선 칼럼

2025-12-22     최태선

최근 몇 년 동안 저는 전원주택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농사짓기를 좋아하고, 그것을 손자 녀석이 즐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제 삶에 우연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저의 모든 삶은 태어나기 전부터 주님의 손에 이끌리는 삶이라는 걸 부인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왜 의사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런 말을 하는 제가 잘난 척을 하거나 건방지다는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제가 의사가 되려는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막으셨습니다. 만약 제가 의사가 되었다면 선우경식 원장님이나 이태석 신부님처럼 되었을 것입니다. 정말 건방져 보이는 생각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 길을 가지 않은 것은 주님이 이끄시는 길이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주님은 제 욕망이나 약점을 적절하게 사용하셔서 저를 주님이 원하는 곳으로 인도하십니다.

주님은 분명히 목적을 가지고 저를 이끄십니다. 제가 가야 할 곳으로 가고, 해야 할 일을 하도록 주님은 저를 이끄십니다. 저는 그 목적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합니다. 아직도 모른다면 그게 목적일 수 있느냐는 반문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하는(창 세 11,8) 것이 주님께서 사람을 인도하시는 전형적인 방식입니다.

다만 믿음으로 저는 목적지를 모른 채 갑니다. 그리고 제가 제 욕망에 이끌려 베드로처럼 어느 한 곳에 “초막”을 지으려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기 위해 분별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소유나 가시적인 성취로 자신의 인생을 판단합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사람은 그런 것들이 아니라 믿음으로 판단을 받고 아브라함과 예수님처럼 순종으로 그것을 입증합니다.

다른 이들은 모두 제 인생이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죽기 전까지는 제 인생이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모세는 죽어야 할 나이에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사십 년이란 긴 시간을 더 살았습니다. 저 또한 그렇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장수에의 바람이 아니라 믿음에의 순종입니다.

지금까지 제게 드러난 것은 “공동체”입니다. 막연하지만 저는 공동체에의 꿈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신학교를 마칠 때까지도 공동체라는 것이 무엇인지도 몰랐고, 공동체를 본 후에는 그것을 “게토”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공동체가 복음의 모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복음이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에게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그 공동체가 하느님 나라의 전진기지라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 숨어 있는 공동체들을 발견했습니다. 발데시안, 모라비안, 아나밥티스트, 그리고 브루더호프 공동체와 같은 공동체들이 하느님이 남겨 놓으신 “남은 자”들이라는 사실도 알게 되었습니다. 얼마 전에는 주님이 제게 번역을 하나 부탁하셨습니다. 공동체의 핸드북인데 <작정하고 시작하는 그리스도인 공동체>라는 제목으로 출간이 되었습니다. 주님은 이 책을 번역함으로써 공동체에 관한 제 이해의 지평을 넓혀주셨습니다.

저는 늘 “예수의 指紋이 스친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妙手다”라는 말을 절감하곤 합니다. 그것은 공동체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래서 야마기시 공동체를 보면서 정말 그렇다는 생각을 또 하게 되었습니다.

야마기시즘이란 야마기시 공동체를 처음으로 설립하고 그 사상적 기반을 제공한 야마기시 라는 사람이 생각하는 사상, 인생과 사회의 참된 모습에 대한 생각, 철학 등을 의미합니다. 야마기시 공동체는 교회가 아니지만 공동체로서 공동체가 지니는 위대함을 잘 보여줍니다. 저는 야마기시즘의 완성판이 바로 하느님 나라라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조차도 포기한 공동체를 세상으로 소환한 야마기시즘을 그래서 약간 소개하고 싶습니다.

야마기시즘은 그 사상을 실현하는 실현지로서 공동체를 제안하였고, 그 공동체를 통해 대안적인 참된 삶의 모습을 보여주고, 이를 통해 인류 전체가 참된 사회로 진입하도록 하는 사상입니다. 야마기시와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이러한 사상이 현실적으로 가능하다는 신념을 갖고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이런 생각의 완성판일 것입니다.

야마기시즘의 가장 핵심적인 사상은 ‘무소유(無所有)’, ‘공용(共用)’, ‘일체(一體)’로 표현할 수 있다. 이는 단지 물질의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마음의 문제가 오히려 더욱 중요합니다. 이런 내용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초기교회를 떠올리게합니다.

“많은 신도가 다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서,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고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사도들은 큰 능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였고, 사람들은 모두 큰 은혜를 받았다. 그들 가운데는 가난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서, 그 판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고, 사도들은 각 사람에게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사도 4,32-35)

야마기시즘에서 말하는 무소유, 공용, 일체는 물론 마음이 의미하는 신앙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야마기시의 깨달음은 진리가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진리는 적절한 방법에 의해 구체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실현을 위한 가장 핵심적인 방법은 시대에 맞는 방법을 찾아내서 그것을 통해 진리와 이상을 사회적으로 구현하는 것이라 보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공동체도 하나의 계기에 불과합니다. 야마기시즘의 핵심적 방법은 ‘연찬(硏鑽)’에 있습니다.

‘연찬(硏鑽)’이란 무엇을 고착된 것으로 단정하거나 고정함 없이 사물을 보고 생각하고 실천해 간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개인이 사물과 사람, 그리고 사회 및 세상을 바라보는 철학이기도 하지만, 사회적 과제이기도 합니다. 즉, 고정과 단정이 판을 치게 되면서 도그마가 강화되고 이로 인해 갈등과 대립이 발생합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사회적 소통은 점차 사라집니다. 소통의 소멸은 고정관념과 폐쇄적 도그마를 더욱 강화시킬 수밖에 없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깨달은 하느님 나라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저는 야마기시 공동체를 보면서 하느님 나라에 대한 깨달음이 심화되었습니다. 야마기시 공동체는 하느님 나라를 추체험하게 해주는 정말 소중한 도구입니다.

연찬을 통한 이상사회 건설을 추구하려는 움직임으로 일본에서는 1990년대 후반 공동체 연찬회에서 도시에서도 이러한 실험이 필요하다는 제안이 대두되었고, 그것을 위해 스즈까로 이주한 사람들은 연찬으로 네트워킹 하는 사람들(KNI-Kensan Network International)이라는 이름을 스스로에게 붙였습니다. 이들에게 실현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은 연찬 커뮤니티입니다. 그밖에 연찬과학연구소가 있고, 연찬 라이프 센터가 연찬학교의 역할을 합니다.

저는 늘 하느님 나라 플랫폼을 가슴에 품고 있습니다. 이들이 생각하는 이상사회가 바로 하느나님 나라고, 저는 그 나라가 네트워킹 하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하나님 나라 공동체들의 네트워킹이야말로 야마기시즘의 완성판입니다.

한국에도 야마기시 공동체로부터 출발한 공동체가 있습니다. 그 공동체를 이끄는 성이 유씨인 분은 강화도에서 ‘우리 꽃자리 펜션’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1월이면 그곳에 모여 연찬회를 열고 생각을 나누고, 새로운 실현을 구상하고 시작합니다.

그 모습을 보고 저는 슬며시 미소를 짓게 됩니다. 왜 최근 저에게 구입이나 이사가 가능하지도 않은 전원주택을 보고 또 보게 하셨는지 그 이유를 발견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주님이 도그마가 아닌 하느님 나라 플랫폼을 실현하시려는가 봅니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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