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각의 사슬에 묶여 고기를 먹는 채식주의자

김선주 칼럼

2025-12-08     김선주
사진출처=

이러다 무당 되는 거 아닌가? 어느 날 내 몸이 이상하게 떨렸고, 나는 그것이 말로만 듣던 신병(巫病)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어느 날 돼지고기 수육을 젓가락으로 집어 올린 순간, 내 정신의 틈바구니로 햇살이 들어오듯 돼지가 들어왔습니다. 따뜻한 체온을 가진 돼지, 아기에게 젖을 물리는 엄마 돼지, 늘어져 잠을 자고, 꿈을 꾸고, 삶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게걸스레 밥을 먹는 돼지가 연상됐습니다. 그리고 그 돼지가 도살되는 비극적인 순간이 오버랩되면서 환멸이 밀려왔습니다. 그때부터 몸이 떨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개, 돼지를 도살하는 장면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에 돼지의 비극적 죽음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끔찍하고 비극적인 장면이긴 했지만 고기는 맛있었습니다. 비극은 개, 돼지의 몫이었고 맛과 즐거움은 나의 몫이었습니다. 그동안 나는 타자의 고통을 나의 유희와 쾌락의 수단으로 삼는 데 익숙했습니다. 그 익숙함에 파열이 일어났고, 그때부터 내 삶이 낯설어졌습니다. 아니, 존재가 낯설어졌습니다.

왜 나는 타자의 생명을 아무 죄책감 없이 먹고 있는 건가. 왜 자연은 타자의 생명을 내 생명의 근거로 삼을 수밖에 없도록 설계됐는가. 내가 먹는 타자는 어떻게 생명의 신비를 잃고 물성만 남게 됐는가. 왜 돼지의 몸을 삼겹살이라고 부르는가. 한동안 이 질문은 나를 괴롭혔습니다. 이 질문이 펌프질할 때마다 전율이 일었습니다.

살아 있는 생명을 영혼 없는 공산품쯤으로 생각하면 타자에 대한 윤리를 쉽게 망각할 수 있습니다. 돼지에게서 생명의 흔적이 지워지고 상품 진열대에 삼겹살이라는 낯선 이름으로 포장된 그것에서 우리는 생명을 연상하지 못합니다. 사람도 그렇습니다.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을 때 윤리를 망각합니다. 그래서 레비나스(Emmanuel Levinas)는 타자의 얼굴에서 나를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이 서양의 존재론 철학이 세운 폭력적 주체를 제거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타자의 얼굴은 나를 죽이지 말라”는 뜻이라는 레비나스의 말은, 가슴을 뛰게 하는, 위대한 시적 표현입니다.

타자의 고유한 생명 가치와 세계의 신비가 제거된 세계, 그래서 폭력적 주체성이 지배하는 세계를 박찬욱 감독은 그의 영화 <복수는 나의 것>에서 끔찍하게 묘사합니다. 청각 장애인인 주인공 류는 신부전증으로 고통받는 누나의 신음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그런데 옆방에 사는 젊은 남자들은 벽에 귀를 대고 류의 누나가 고통으로 죽어가는 신음 소리를 성적인 쾌락의 소리로 오해하고 자위를 합니다. 이 두 방의 상반된 모습이 하나의 장면(one-take)에 담깁니다. 옆에 있어도 들을 수 없고 벽에 가로막혀 얼굴을 볼 수 없는, 타자의 고통이 나의 쾌락으로 전이되는 시퀀스를 통해 이 사회의 단절성과 비도덕적 폭력 구조를 보여줍니다.

이 사회는 생각 없이 타자의 생명을 먹으면서 맛의 쾌감에 빠져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고기에서 타자의 얼굴을 보지 못합니다. 그것이 죄입니다.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원죄, 그리고 수많은 죄를 능가하는 거대한 죄악입니다. 그 죄악의 실체를 내 안에서 보았을 때 나는 두렵고 떨렸습니다. 그때부터 나는 고기를 먹을 수 없었습니다. 내 의지가 아니라 내부의 이 전율 때문에 비건(채식주의자)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고기 냄새가 역겨워지기 시작했고, 고기 먹는 사람들에게서 환멸이 느껴졌습니다. 고통받는 타자의 생명이 느껴질 때마다 몸서리가 쳐졌습니다.

하지만 나는 망각의 사슬에 곧잘 묶여 고기를 먹습니다. 타자의 생명에 대한 윤리보다 구미 당기는 맛의 유혹이 훨씬 크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가끔은 전율이 찾아옵니다. 그러면 식사를 포기합니다. 어떤 때는 일부러 전율이 일어나도록 육축과 생선의 생명을 떠올려서 환멸을 일으켜 스스로 육식을 포기시킬 때도 있습니다. 비건(vegan)의 윤리를 따르라고 내 영혼은 신호를 보내지만 여전히 몸은 육식의 습성을 쉽게 포기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타협하기로 했습니다. 고기를 먹을 때마다 그 고기의 원 생명을 향해 감사하며 기도하는 것으로. 그 기도는 다른 생명을 나의 생명이 마주보는 것이라고 위로해 봅니다. 전통적인 그리스도교 방식으로 이 음식을 주신 하느님께만 감사하는 게 아니라 자기의 생명을 나에게 기꺼이 허락한 타자의 존재를 마주 보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타자의 생명 가운데 계신 창조주와 연결되는 감각을 회복하고, 그때 나는 자연과 우주, 그리고 창조주와 하나가 됩니다. 그 과정을 통해 나 또한 누군가에게 나 자신을 기꺼이 허락할 수 있다고 선포됩니다. 그것이 내 생명을 통째로 던져 버리는, 죽음이라 할지라도 아까워하지 않고 기꺼이 던지겠다는 선포가 내 안에서 일어나게 합니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의미를 나는 여기에서 찾습니다. 그것이 내 안의 예수입니다.

 

김선주 목사
<한국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우리들의 작은 천국>, <목사 사용설명서>를 짓고, 시집 <할딱고개 산적뎐>, 단편소설 <코가 길어지는 여자>를 썼다. 전에 물한계곡교회에서 일하고, 지금은 대전에서 길위의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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