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 없는 그리스도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서 “수도자 - 하느님 백성의 필수 구성원”이라는 제목의 글을 읽었다. 거기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
“수도 생활의 정점은 공동체적 삶에 있다. 역사적인 측면에서 보면, 교회 공동체가 가정에서 본당(성당)의 형태로 변해갈 때 공동체성을 다시 확보하기 위해 수도회가 시작되었다. 수도회의 발생학적 기원은 그리스도교 신앙의 공동체성 증거에 있다. 하지만 모든 사람이 이기적이고 개별적인 주체로 살아가는 오늘의 상황에서 공동체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질서와 순명을 통한 공동체적 이상(理想)은 오늘의 구체적 현실에서 거의 작동되지 않는다. 몸으로 생활을 함께하는 단순한 생활 공동체는 불가능한 시대다. 가치와 이념, 목적과 지향을 공유하고 사명을 수행하기 위한 느슨한 연대의 공동체만 가능한 시대다. 주체적 개인들이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는 함께 살아가는 방식과 규범을 새로 발견해야 한다. 공동체적 삶이 부담이나 억압의 굴레로 작동되지 않고 진정한 기쁨의 원천이 되기 위해서는, 공동체를 살아 내는 방식과 공동체성은 새롭게 재해석되어야 하고 재구성되어야 한다.”
이 내용에 따르면 사라진 교회의 공동체성을 다시 확보하기 위해 수도원이 탄생했다. 그렇다면 교회 공동체가 가정에서 본당(성당)의 형태로 변해갈 때 공동체성을 회복하기 위한 필요성이 등장했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이 말의 의미는 교회가 가정에서 본당의 형태로 변해갈 때 교회에서 공동체성이 사라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렇다. 교회가 가정에서 본당의 형태로 변해갈 때 교회의 공동체성이 사라졌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심각한 질문을 던질 수 있다.
공동체성이 사라진 교회는 과연 교회일 수 있는가?
공동체성이 사라진 교회는 종교 신앙을 같이 하는 사람들의 조직체일 수는 있지만 성서가 말하는, 다시 말해 예수님께서 의도하셨던 교회가 될 수는 없다.
이 사실은 대단히 중요하다. 오늘날 교회들이 느슨한 상조회나 동아리와 같은 조직이 된 것은 이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정확히 말해 오늘날 교회가 더 이상 교회가 아니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공동체성을 상실한 교회는 엄밀한 의미에서 성서가 말하는 교회일 수가 없다.
오늘날 그리스도교에서는 위 인용한 내용에서도 보듯이 교회 공동체가 가정에서 본당의 형태로 변해갈 때 교회가 더 이상 공동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하고 그것을 보완하는 수단으로 수도회가 결성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말을 뒤집어보면 수도회 없는 교회는 더 이상 공동체가 아니라는 의미가 된다.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사라진 공동체성을 수도원이 보완해야만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는 그것을 대안으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의 제자들의 모임이어야 하고, 그곳에서 예수의 제자들은 자매와 형제가 되어 함께 살아야 한다. 공동체성이 사라졌다는 것은 이와 같은 자매·형제 관계가 교회에서 사라지고, 수도원에서만 그것이 유지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위 글을 쓴 필자는 교회와 수도원을 하나의 몸체로 생각하지만 나는 그것은 결코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교회에도 수도원에도 하느님 나라가 임할 수 없다.
필자는 “수도자는 하느님 백성의 필수 구성원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로 구성된다. 수도자의 약화와 부재는 교회 공동체 핵심의 소실과 붕괴를 의미한다.”는 내용을 쓰고 있다. 교회 안에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라는 계층과 위계가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존재론적으로 모두가 평등한 나라이어야 할 하느님 나라를 허물거나 애초에 구성 자체를 불가능하게 한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한 번 “신앙의 자유” 이후 콘스탄티누스가 그리스도인을 살인을 할 수 없는 그리스도인과, 살인을 해도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나누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단순히 그리스도인들을 나눈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존재 자체를 허무는 것이었다. 주교와 같이 살인을 해서는 안 되는 그리스도인조차 교회 안에 그리스도인 아닌 사람들이 같은 조직의 일원이 됨으로써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결국 그리스도교가 그리스도인 없는 그리스도교가 된 것이다.
그렇게 그리스도교 아닌 그리스도교가 거기에서 드러나는 결핍의 현상들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 가운데 하나가 바로 수도원의 탄생이다. 사실 수도원은 참된 그리스도교 신앙을 찾아 사막과 같은 곳으로 나가 제도권의 간섭을 받지 않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모임이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수도원이 그리스도교 아닌 그리스도교의 교회를 보완하는 대안의 일부가 됨으로써 그들이 추구한 진정한 그리스도교 신앙 역시 무의미하게 되었다.
“수도자가 수도자인 것은 서원을 했고, 수도복을 입고, 수도 공동체에 소속되어 살아가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수도의 삶, 수행의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수도자인 것이다. 수도자의 진정한 정체성은 살아가는 방식을 통해 드러나는 정체성이다. 삶의 자세와 태도를 통해 표현하는 정체성이다. 존재적 정체성이 아니라 수행적 정체성이다. 존재(being)와 행위(doing)라는 단순한 이분법적 구분이 아니다. 수행적 정체성이란 신념, 자세와 태도, 살아가는 방식을 통해 표현하는 정체성이다. 수도자의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진행되고 성취된다는 의미다.”(같은 글에서 인용)
이 내용을 읽으며 수도원이 교회의 공동체성을 유지하는 수단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 개인의 정체성 역시 대신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수도자로서의 서원과 의복, 그리고 공동체에 소속되는 일, 그리고 수도의 삶과 수행의 삶은 수도자들의 몫이 아니라 모든 예수의 제자들의 것이 되어야 한다. 오늘날 재속 수도자의 등장은 바로 그런 모순을 드러낸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의 제자들인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모름지기 그래야 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결코 양도되어서는 안 되는 그리스도인 본연의 정체성이다. 그리스도인은 수행적 정체성을 지닌 존재로서 세상에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는 사명을 지닌다.
나는 “수도자 - 하느님 백성의 필수 구성원”이라는 글의 내용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하지만 그 글은 현재의 그리스도교를 전부로 아는 사람의 글이라는 한계를 지닌다. 오늘날 전해지는 그리스도교 자체가 이미 오래 전에 변질되었음을 알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는 한계를 지님으로써 복음이 말하는 진정한 교회에 다가가지 못한 것이다.
필자가 지적하고 있는 모든 내용들이 근본적으로 변질된 그리스도교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한계라는 점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신앙의 자유” 이후 그리스도교의 최고 사제가 된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그리고 그것을 집대성하여 신학으로 정착시킨 신학의 아버지 아우구스티누스에 의해 그리스도교는 국가와 혼인하게 됨으로써 제국주의 그리스도교가 되었고, 그렇게 그리스도교가 세상의 하부구조가 되었다는 사실을 문제의 출발점으로 생각하지 않는 모든 사고는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리는 것처럼 계속해서 같은 곳을 맴돌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돌아가야 할 교회는 예수가 원했던 하느님 나라인 공동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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