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에게조차 하느님 나라는 언감생심
최태선 칼럼
정치는 이상을 꿈꾸지 않는다. 전에는 그런 적도 있었다. 민주주의가 궁극의 목표였던 시절도 있다. 그리고 실제로 민주주의 수호가 인류애를 위한 보루가 된 적도 있다. 6·25 전쟁에서 우리는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전에도 비슷한 일들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민주주의가 사라진지 오래다. 모든 나라들이 자국 이기주의에 빠져 인류애와 같은 보편적인 선을 아랑곳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그 대표적인 예는 미국이다. 이민자들의 나라인 미국이 불법 체류자들을 색출해서 쫓아낸다는 사고는 정말 아이러니다. 유럽에서 미국으로 온 사람들 가운데 제대로 된 백인들이 과연 얼마나 되나. 우리가 영화에서 확인하듯이 자기 나라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는 범죄자들과 최하층 사람들이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향했지 않은가. 그런 그들이 올챙이적 생각을 하지 않고 귀족 행세를 하는 것은 우스꽝스럽다.
지금 생각하면 나도 참 어리석었다. 학창시절 광화문에 있던 국제극장에서 <황야의 은화 1불>같은 서부영화를 보며 주인공이었던 와이어트 어프나 닥터 홀리데이와 같은 총잡이들이 얼마나 멋지게 보였던가. 그때는 그것이 폭력적인 무법사회였다는 사실을 생각지 못했다. 이기는 것이 좋았고, 이기는 주인공들이 무조건 멋있었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지나 나는 마침내 평화주의자가 되었다. 물론 지금도 나는 속에서 주먹이 불끈거리는 반쪽자리 평화주의자이지만 최소한 내가 예수의 제자로서 비폭력 저항을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사람이 되었다. 사실 이 일은 천지개벽이다. 그야말로 완전한 환골탈태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이처럼 환골탈태의 과정을 반드시 거쳐야 한다.
어제는 작은 아이 부부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족발을 시켜 먹으면서 가족 관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직장 동료들과의 대화 속에서 형제가 있는 것이 오히려 더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는 이야기를 했다. 자기처럼 언니가 있어 좋다고 하는 사람이 오히려 없었다는 것이다. 그 이야기를 듣고 국가들뿐만 아니라 가족 사이에도 이기주의가 만연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조건 형제가 있어야 한다는 사고는 꼰대들의 사고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가 이기주의와 개인적 이기주의 속에서 정치는 그야말로 ‘내로남불’의 전성시대가 되었다. APEC 정상회담 결과를 놓고 여야는 극렬한 대조를 보였다.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는 여당과 아무런 성과가 없는 맹탕이었다는 야당의 주장은 같은 결과를 바라보는 완전히 반대인 두 시선으로 그것 역시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의 표출이다.
내가 사는 모든 곳에서 이기주의는 더욱 현저해지고 있다.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이란 공염불이 된지 오래다. 그래서 그랬을까. 어릴 적 많이 듣고 불렀던 “희망의 나라로”라는 노래가 생각났다. 엄정행이 부르는 “자유 평등 평화 행복 가득 찬 곳 희망의 나라로”가 귀에 쟁쟁하다. 그렇게 우리는 희망의 나라를 희구한 적도 있다. 그런 나라를 향해 가려는 열망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희망은 산산조각이 났다. 이젠 누구도 그런 나라를 꿈꾸지 않는다. 그런 나라는 상상 속의 나라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떠오르는 성서의 말씀이 있다.
“하느님의 나라는 먹는 일과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입니다.”(로마 14,17)
생각해보니 “희망의 나라로”의 가사는 바로 이 내용이었다. 하느님 나라는 자유의 나라다. 그 나라는 의와 평화와 기쁨의 나라다. 평등 평화 행복은 바로 이 내용이었다. 그 노래를 지은 사람은 이 말씀을 염두에 두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더 이상 이 말씀의 의미를 알아듣지 못한다. 그들은 먹는 일과 마시는 일에 경도되어 더 이상 하느님 나라를 희망의 나라로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하느님 나라는 불의한 나라다.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자유는 더 이상 진리가 주는 자유가 아닌 시장의 자유다. 믿지 못한 일이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하는 자유란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자유다. 사치와 허영 속에서 다른 사람들을 무시할 수 있는 삶이 그들이 바라는 자유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 나라의 의를 오히려 불의로 알아듣는다. 하느님의 의는 다른 말로 평등이다. 이스라엘은 하느님 백성이 되기 위해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같은 것을 먹고 마셔야 했다. 그것이 그들의 정체성으로 자리 잡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모르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반대를 상상한다.
오정현 목사가 생각난다. 그는 주일 점심에 출장 뷔페를 불러 혼자 식사를 한다. 그는 교인들과 주일 한 끼 식사도 함께 하지 못한다. 물론 그렇게 해야 하는 여러 이유들을 열거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가 하느님 나라의 의인 평등을 깡그리 무시하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는다. 그런 그의 입에서 나오는 하느님 나라는 하느님 나라가 아니라 “맘몬의 나라”다. 맘몬의 나라의 의는 불평등이고 그는 그것을 따르고 있다. 그야말로 끔찍한 인지부조화가 아닐 수 없다.
나 역시 오래도록 하느님 나라의 평화에 대해 알지 못했다. 하느님 나라의 평화는 “샬롬”으로서 하느님으로 인해 이루어지는 평화다. 그것은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빈곤, 억압, 차별과 같은 인간의 모든 결핍의 현상들이 완전히 해소된 상태를 의미한다. 그 평화는 젖먹이가 엄마 품에서 느끼는 안도감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하느님 나라의 평화에 대해 모르는 평화맹(平和盲)들이 되었다. 이타주의의 본보기가 되어야 할 그리스도인들이 이기주의의 화신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보이는 것은 오직 먹을 것, 마시는 것이 되었다. 대대손손 이어질 유산이야말로 그들이 추구하는 것이다. 그 유산은 하느님이 아니라 맘몬이다. 누구도 더 이상 아이들에게 믿음을 유산으로 남겨주는 것을 목표로 삼지 않는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기는 것이다.
하지만 이상한 일도 아니다. 세상은 공중 권세가 지배하는 곳이다. 그리고 그런 세상이 더욱 노골적으로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내는 시대가 되었을 따름이다. 이기주의는 모두가 숨 쉬는 공기처럼 자연스러워졌다. 그래서 누구도 그것을 보거나 문제 삼지 않는 시대가 되었다. 성서는 엄숙하게 이것을 “어둠”으로 정의한다. 그 어둠이 너무 짙어져 희망의 나라는 보이지 않고, 보려 하지도 않는다. 그리스도인에게조차 하느님 나라는 언감생심이 되었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로지 타인을 위해 사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인류의 희망이다. 하지만 모두가 이기적인 세상에서 이타적인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은 당연히 어리석어 보일 수밖에 없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조차도 오직 저능아나 바보만이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어리석음이 하느님의 지혜다.
내려가는 삶, 가난해지고 작아지는 것, 거기에 더해 어리석은 삶이야말로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와 평화와 기쁨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자가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이 걸 쓰면서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자조의 미소다. 그래도 나는 이런 미소를 짓게 하신 하느님을 오늘도 찬양한다.
최태선
하느님 나라의 시선으로 살아가는
55년생 개신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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