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하루만 살자

한상봉 칼럼

2025-09-08     한상봉 편집장

1993년에 전태일문학상을 받았다는 황규관 시인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그 시인의 마음을 읽고 잠시 부끄러웠습니다. 무주에 귀농해서 농사지을 때처럼 몸으로 먹고 살아야 심간이 편할 텐데, 다시 서울로 일산으로 파주로 와서 입으로 손끝으로 먹고 살자니, 후원에 기대어 일을 하자니 “나는 언제 다시 내 몸으로 정직하게 밥벌이를 하게 될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황규관 시인의 <차비 얼마>라는 시를 읽으며 남의 이야기가 아니지, 생각합니다.

멀리서 왔다고 누군가
호주머니에 차비를 넣어줄 때
고맙기도 하지만 나는 약간 어두워진다
가만히 털 깎이는 양이 된다
거절하면 안 되지, 그렇다고
넙죽 받는 것도 내 노선은 아니다
어떻게 살 것인지 묻는 질문 같아서
내 호주머니는 침묵에 빠지고 만다

어떻게 살 것인지, 앞길을 열어준 분들이 계십니다. 단박에 예수님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황규관 시인은 동학의 해월 선생을 가리킵니다. 강생, 사람이 되어 세상에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성체, 만인에게 밥이 되어 자기를 먹이려고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해월 선생은 “말씀이 밥이 되고 밥이 말씀이 되는” 세상을 꿈꾸었답니다.

말씀 하나 달랑 메고
울음으로 가득 찬 사람들을
툇마루에 달빛처럼 앉혔다
말씀은 위험한 물건
그러나 닫힌 사립문을 활짝
열어주는 거친 손아귀
먼 강물을 바라보는 두근거림
말씀이 밥이 되고
밥이 말씀이 되자 사람들은
스스로 들판이 되었다
제방을 넘보는 물결이 되었다
말씀이 말씀을 낳고
기르고 찰랑이는 우물이 되었다
땅 아래 깊은
물길이 되었다
(말씀 하나 달랑 메고-동학 3)

그분이 우리에게 이렇게 살라고 이르십니다. 황규관 시인의 <포고문-동학 4>의 내용입니다.

사람을 죽이지 말며
물건을 버리지 말며
발에 흙덩이를 미워하지 말며
흐르는 물을 막지 말며
장작을 썩히지 말며
구부러진 길을 함부로 펴지 말며
꽃잎에 앉은 나비를 쫓지 말며
어린아이의 눈빛 앞에서 탄식하지 말며
거친 손을 멸시하지 말며
똥 묻은 옷을 타박하지 말며
믿음을 조롱하지 말며
노래를 혼자 부르지 말며
죽은 이를 망각하지 말며
하늘을 잡다하게 가리지 말며
땅에다 포탄을 떨어뜨리지 말며
울음과 웃음을,
바람과 풀을 갈라놓지 말며
땀 젖은 몸을 피하지 말며
어둠을 철거하지 말며
지는 해를 영영 보내지 말며
뛰는 가슴을 부끄러워 말며
호미 대신 기계를 숭배하지 말며
기도하는 허리는 부러뜨리지 말며
사람 아닌 것들도 죽이지 말며

모시고
살리고
가꾸고
절하고
꿈꾸고

 

동학의 가르침이 이러하다면, 무위당 장일순이 마다할 이유가 없고, 김지하가 돌아갈 이유가 없고, 권정생이 <한티재 하늘>에서 하늘을 매만지며 사는 사람들이라고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恨) 많은 사람들의 한(限)없는 사랑을 보았던 사람들입니다. 고통과 가난 속에서 오히려 아름다웠던 사람들입니다. 황규관 시인은 그들의 뒤로 걸어가 ‘저녁 불빛’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차라리 뒤로 걸어 가난한
배롱나무 그림자에게로 가야지
쓰러진 함성과 노래를 누더기 삼아
담장 너머로 오가던 주먹밥과
밭일 끝낸 저녁 불빛이 돼야지
...
이제는 앞을 보며 뒤로 걸어야지
어둠이 되어
어둠을 사랑해야지
뒤가 앞이 되게 해야지
뒤도 앞도 사라지게 해야지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세상이 그런 삶을 허락할까요? 말씀을 듣고자 할 수 있으나, 그 말씀이 밥이 되게 하는 건 퍽 어려운 일입니다. 시를 지어 노래할 수 있지만, 밥을 지어 남을 먹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세상의 가련한 인생들을 “모시고 살리고 가꾸고 절하고 꿈꾸”라고 하지만, 나도 그 이들과 한가지로 가련해지겠기에 주춤거리게 됩니다. 내게도 당장에 눈에 밟히는 식구들이 있고, 나도 손끝에 가시만 박혀도 아픈 게 삶이라서 “어둠이 되어 어둠을 사랑해야지” 말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황규관 시인은 시집 앞자리에서 <오늘 하루만>이라 시를 달아놓은 모양입니다. 평생 그리 살라고 하면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한 달도 한 주도 아닌 “더도 말고, 오늘 하루만” 이렇게 살아보자 합니다.

저물녘에 슬픔이 밀려온대도
오늘 하루만 살자
걸으면서 꿈을 다시 꾸고
씨 뿌리듯 노래를 듣고
보리를 한 줌 넣은 쌀을 안치고
흩어진 일을 조금 더 간추려놓고
오늘 하루만 살자
가난과 기도와 투쟁과 함께
오늘 하루만, 더도 말고
...
아픈 손가락 한번 더 만져주고
햇볕에 빨래를 널고 쓰레기를 버리고
오늘 하루도 애를 태우며
오늘 하루 더 땀을 흘리며

일상에서 어느 한순간 하늘을 매만지며 산다는 것은, 오늘 만난 그 사람에게 “자네가 바로 하늘”이라는 걸 보여주는 순간입니다. 장일순 선생이 어느 더운 여름날 땡볕에 원주 시내를 걷다가 지쳐 한 제자의 공방에 찾아든 적이 있습니다. 땀을 씻어낼 요량으로 세수를 청했고, 그 제자는 공방에 깨끗한 수건이 없어 난감했습니다. 그이가 때 절은 수건을 내밀자, 장일순 선생은 단박에 얼굴을 닦고 수건을 돌려주며 말했습니다. “자네 땀 냄새가 참 좋군!” 하늘은 이럴 때 열리는 법입니다. 이런 속 깊은 배려에서 나온 한마디가 고단한 하루를 견디게 합니다.

이참에 황규관 시인의 <뒤로 걷는 길>(창비, 2015)을 시편처럼 읽어보자고 제안합니다. 오늘 하루만 더 사랑하고, 오늘 하루만 더 아파하자고 다짐해 봅니다. 나이가 들수록 의로운 사람보다 친절한 사람이 좋아집니다. 그런데 가장 좋은 몫은 ‘의로우면서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것이겠지요. 누가 내 호주머니에 차비를 넣어주거든 “어떻게 살 것인지 묻는 질문 같아서, 내 호주머니는 침묵에 빠지고 만다”던 시인의 탄식을 다시 새기는 오늘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