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고통은 여전하지만, 고통스러운 나는 없다

2025-05-19     한상봉 편집장

중국 낙양 소림사, 한밤중 사납게 내리는 눈 속에 한 젊은이가 법당 앞에 서 있습니다. 법당 안에는 어느 스님 한 분이 벽을 마주보며 참선을 하고 계신데, 젊은이의 고독과 법당 안의 스님 사이에 긴장감이 팽팽합니다. 새벽이 되어서야 스님은 무릎까지 차오른 눈에 파묻혀 있는 젊은이에게 고개를 돌립니다.
“지금 그대는 눈 속에서 무엇을 구하는 것인가?”
“자유를 얻고 싶습니다.”
“깨달음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네.”

그러자 젊은이는 칼을 뽑아 왼쪽 팔을 잘라서 스님께 바칩니다. 그제야 스님이 고개를 돌리시고, 눈밭에 흩날리는 핏자국을 보고서야 맺어진 인연이 스승 달마대사와 제자 혜가 스님입니다. 선(禪)불교가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이 이야기를 철학자 강신주가 지은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라는 책에서 읽었습니다. 이야기가 이렇게 이어집니다. 어느 날 제자가 스님에게 “제 마음을 편하게 해주십사” 청합니다. 대뜸 달마대사가 “네 마음을 가져와라. 그러면 너를 위해 네 마음을 편하게 해 주겠다”고 했다. 결론은 “마음을 찾으려 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는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찾고 있는 마음과 찾아야 하는 마음은 다릅니다. 더구나 괴로워하는 마음을 찾을 수 없다면, 그 괴로움 자체가 본래 없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어리석음 때문에 마음이 괴롭다고 느낄 뿐이겠지요. 세상의 고통은 여전하지만, ‘고통스러운 나’는 없다는 깨달음입니다.

 

사진=한상봉

영성작가 헨리 나웬 신부는 다른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영적인 사람은 ‘내 고통’(my pain)을 넘어서 ‘그 고통’(the pain)을 응시하는 사람이라고요. 내 마음을 하느님께서 차지하셨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편지처럼 우리에게서 ‘내 냄새’는 사라지고 ‘그분의 향기’가 우러나옵니다. 이제 내가 사는 게 아니라 그분이 나를 통해 살기 때문입니다. 그분처럼 생각하고, 그분처럼 말하고 그분처럼 느끼며 행동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고통 받는 이들에게 주목합니다.

그들이 받는 고통은 그리스도의 고통이며, 우리는 고통 받고 있는 그리스도의 몸을 만지고 치유합니다. 위로하고 연대합니다. 그리스도를 사랑한다는 것은 가난하고 상처받은 이들을 사랑한다는 것이고, 사순절을 뛰어넘는 부활의 기쁨을 그들 가운데서 경험하는 것입니다. 내 상처와 고통에만 매달리면 가난한 이들 속에서 그리스도가 함께 고통 받는 현실을 보지 못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복음서에서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잘 곳을 걱정하지 말라고,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분의 의로우심’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진주가 묻힌 밭을 발견하고 전 재산을 팔아 그 밭을 사는 농부처럼, 그분 안에 깃들면 다른 모든 것은 어느새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칩니다. 

혜가 스님은 팔을 끊어서라도 ‘자유’를 얻고자 했습니다. 부처의 마음을 얻고자 했습니다. 그 마음이 달마대사에게 닿았습니다. 그래서 ‘마음 없음’을 발견하고 ‘평화’를 얻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교 신앙에 귀의한 신자이지만, 하느님을 만나고 싶어서, 그분을 생생하게 느끼고 싶어 하면서도 사실상 한 번도 나를 끊어낸 적이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나를 위해 기도하고, 내 가족을 위한 구일기도는 빠뜨리지 않지만, 정작 이웃을 위해 기도한 적은 별로 없습니다.

미사 때 올리는 보편지향기도로 부족합니다. 절벽에서 내 손을 놓으면 천사들이 내 몸을 잡아줄 것이라 믿는 마음을 그리스도는 바라십니다. 막연하고 관념적인 기도가 아니라, 이웃의 구체적 실상 앞에서 드리는 화살기도 한 자락이 더 필요한 시절입니다. 그대에게 평화가 있기를. 그대에게 위로가 되기를, 그대에게 밥 한 그릇이 될 수 있기를, 하고 말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