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절 아침, 유월에 다시 만나 경축하기를
4월 20일 주님 부활 대축일 한상봉 복음묵상 (루카 24,1-12)
요한 볼프강 폰 괴테는 <색채론>에서 “초록은 생명의 색채이면서 동시에 죽음의 색채”라고 말했습니다. 싱그러운 봄이 오면 온 산천이 푸르게 생명력을 길어올립니다. 나무마다 잎사귀가 연둣빛에서 짙은 초록으로 물들어가면 그 생명의 절정에 다다릅니다. 하지만 강물이 썩으면 녹조가 뜨고, 시신이 부패하면 손끝부터 초록빛을 띠기 시작합니다. 쇳조각이 습기에 노출되면 녹이 슬기 시작합니다. 봄이란 그렇게 죽음의 한가운데서 생명을 가져옵니다.
사월은 잔인한 달이라는데, 우리 역사에서 사월은 생명 위에서 죽음이 마음대로 춤을 추었기 때문에 더 참혹한 달입니다. 제주4.3항쟁, 4.9인혁당사건, 4.19혁명, 4.16세월호 참사, 5.18광주민주화운동 등 사월뿐 아니라 오월마저 죽음에게 주도권을 내어주었고, 그래서 우리에게 사순절은 3월에서 오월까지 이어집니다. 12.3내란사태도 6월 3일 대통령 선거가 끝나봐야 진정되리라 생각합니다. 유월민주화운동처럼 유월은 다시 생명이 주도권을 되찾아가는 달이란 생각이 듭니다. 부디 그리되길 바랍니다.
오늘이 부활절 아침이지만, 우리들의 부활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사순절은 삼사오월 지속되고, 유월이 되어야 그분이 마침내 아침햇살처럼 일어나실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참된 의미의 부활절을 갈망하는 첫날이라고 생각합니다. 부활 1주일, 부활 2주일... 세어가면서 우리는 우리의 부활절을 사실상 우리가 만들어야 합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인이 바친 기도문처럼 그분은 우리들의 손을 빌려 이 세상과 인간을 축복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절 아침에 여인들이 발견한 것은 빈무덤 뿐입니다. 그이들은 예수님의 시신을 볼 수 없었고,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예수님의 시신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분 무덤가에 있던 천사가 이르기를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루카 24,6)고 했습니다. 루카복음서를 빼고 나머지 복음서는 한결같이 “그러니 갈릴래아로 가라”고 합니다. 그분이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갈릴래아로 가면 그분이 호흡했던 공기의 냄새를 맡을 수 있고, 그분이 거닐던 거리와 선착장, 거룻배와 카파르나움의 회당을 볼 수 있겠지요. 타브가 언덕에서 다시 산상설교를 듣고, 그분이 만지던 가련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이들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는 사람은 복됩니다. 그가 그분의 시선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성서는 모세의 무덤을 찾을 수 없고, 엘리야는 불수레를 타고 승천했다고 전합니다. 처음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고,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시킨 모세의 시신을 찾을 수 없고, 예언자의 전형을 보여주며 세례자 요한에게 영감을 주었던 엘리야가 하늘로 사라진 것처럼, 예수님을 시신을 찾지 못했다는 복음서의 기사는 예수님이 어디서든 거듭 새삼 부활하신다는 전거입니다. 죽음이 그늘진 골짜기마다 생명을 일으키는 예수님입니다. 성전세력과 로마제국이라는 국가권력에 의해 살해된 예수님처럼, 그렇게 권력에 희생된 이들을 우리가 만질 때마다 우리는 예수님의 부활을 경험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 요안나, 그리고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가 빈무덤을 발견하고 예수님의 부활을 알렸으나, “사도들에게는 그 이야기가 헛소리처럼”(루카 24,11) 여겼다고 합니다. 그들이 여자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메시아의 잉태를 나자렛 처녀에게 제일 먼저 알렸듯이, 예수님의 부활도 변방으로 밀려난 이들을 통해 선포됩니다. 그러니, 교회가 부활절 아침으로 경축하는 오늘 우리도 우리 시대의 변방으로 가서, 가난한 이들 한가운데서 그들 목소리를 들어봅시다. 그들의 슬픔과 기쁨, 절망과 희망을 함께 나누어 가집시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