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멍에, 즐거운 신앙생활

한상봉 칼럼

2025-02-24     한상봉 편집장

일이 한꺼번에 밀려오면 헛구역질이 나올 때가 있다. 일이 차고 넘치고 있다는 것을 머리가 알고 위장에 신호를 보내기 때문이다. 일은 사실상 하면 할수록 늘어난다. 본당 일도 마찬가지다. 어떤 교우는 사목회 임기를 마치고 한동안 성당에 발길을 끊기도 한다. 너무 기력이 소진되었고, 이럴 때 기도마저 버겁다. 그리고, 나처럼 일하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는 생각에 원망이 늘어난다. “네가 좀 하지!”라는 말이 입에 붙기 시작하면 무조건 쉬어야 한다. 그래야 내 영혼도 훼손되지 않고 타인에게도 관대한 마음이 생긴다.

[은은한

요셉 빌 신부가 쓴 <은은한 즐거움>(분도출판사, 1974)에는 ‘돌기둥을 짊어진 여인’이라는 사진이 담겨 있다. 13세기에 지어진 독일 란다우 대성당의 기둥을 받치고 있는 까치발 조각을 찍은 사진이다. 석수가 기둥 까치발 구실을 하는 여인상을 익살스럽게 새겨 놓았다. “여인은 깊숙이 몸을 구부리고 잔등과 목과 허리로 엄청난 짐을 져 나르고 있다. 겉보기에는 돌과 그 자체의 무게뿐인 것 같지만, 그것은 대성당의 기둥이고, 그 위에 둥근 천정이 얹혀 있다.” 그러니 당연히 그 하중이 말할 수 없이 클 것이다.

요셉 빌 신부는 “이 여인은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아나와, 그 무거운 짐을 지고도 버티고 서서 한 걸음 한 걸음 길을 더듬어 나가는 것일까?” 묻는다. 이 여인은 교회의 자모(慈母)이신 마리아일까? 사제나 수도자, 또는 바닥에서 궂은 일 마다 않는 신자들일까? 바오로 사도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러면 그리스도의 율법을 완수하게 될 것입니다.”(갈라 6,2)라고 말했는데,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그 사람들인가, 싶다. 타인의 슬픔을 내 슬픔으로 여겨 품어 안는 그런 사람 말이다. 고단한 인생들에게 쉴 자리를 마련해 주는 사람들, 분쟁이 있는 곳에 평화를 심는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 11,28)고 하셨다. 그리고 이왕 짐을 메려면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29) 하고 말씀하셨다.

조각 속의 이 여인이 무거운 짐을 마다하지 않는 이유는, 바로 대성당의 천정을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몸이 지치고 거들떠보는 사람 없이 홀로 걷더라도 하느님을 신뢰하고 의지하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우리가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의무’ 때문이 아니라 ‘기쁨’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믿는 이들을, 나이에 상관없이, 늘 새롭게 하시기 때문”(복음의 기쁨, 11항)인 것이다.

“주님을 바라는 이들은 새 힘을 얻고, 독수리처럼 날개 치며 올라갑니다. 그들은 뛰어도 지칠 줄 모르고, 걸어도 피곤한 줄 모릅니다.”(이사 40,31)

영원한 젊음이신 그리스도는 세상을 위해 교회에, 교회를 위해 사제들에게, 그리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 가난한 이들을 맡기셨다. 슬퍼하는 여인들과 고통 받는 청년들과 생활고에 지쳐 다박다박 걷는 사내들을 맡기셨다. 이들이 걸어서 하늘에 닿기까지, 끝없는 슬픔을 끝없는 사랑으로 치유할 때까지 까치발을 떼지 말라고 당부하셨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뜻대로 행하라.”고 말했다. 그 사랑 안에 머무른다면, 힘겨운 과업도 기꺼운 기쁨이 된다는 말일까.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