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비타민을 제일 좋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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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은 비타민을 제일 좋아했다
  • 이금연
  • 승인 2016.12.26 01: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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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팔 카나의 집 이야기-6

한 해의 끝자락에 와 있는 요즈음 우리는 장학생을 새로 선발하기 위해 여러 곳을 다니고 있다. 수년간 장학생이었던 아이들 명단을 놓고도 어떤 변화가 있는지 확인하니 시집을 갔거나 다른 나라로 일하러 가느라 중도에 포기한 고학년 학생들이 제법 되었다. 작년엔 지진 때문에 아이들에게 관심을 줄 여력이 없었기에 그저 줄 것만 주고 만남이나 개인 방문을 할 수 없었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사랑과 관심을 먹고 자라는 것이 틀림없는지 한 두 해 방심하는 사이 시험에 낙방한 아이들도 있어서 지속적인 관심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된다.

장학생이라고 는 불리지만 우리 아이들은 공부가 기준이 되어 선발된 것이 아니다. 어떻게 해서든 보편교육을 받아 가난이 대물림 되지 않게 하려는 데 목적이 있기에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는 기준에 포함되지 않는다. 공립학교에 다니는 아이들로 부모님의 직업이 대개 건설 일용직 노동자들이거나 공장 노동자 그리고 농업에 종사하는 가난한 집의 아이들이다.

그래서 아이들을 만나서 면접을 할 때마다 기본 사항을 물어 볼 때 특히 ‘집’이 어디냐고 물으면, 아이들은 ‘방’이 어디 어디에 있다고 대답하여 방과 집을 구분한다. 아이들에게 집이란 ‘외딴 곳’ ‘먼 산골’에 있는 것으로, 텃밭과 집짐승 우리가 갖추어진 흙과 돌 그리고 나무로 지어진 전통 가옥의 그림으로 연상될 것이다.

사진=이금연

자리를 찾아 도시로 나와 집이 아닌 방에서 거주하고 있는 빈민층의 우리 아이들에게 그래서 집은 하얀 설산과 푸른 언덕 그리고 깊은 강줄기가 보이는 곳에 자리한 그림일 테다. 빈 집으로 남겨져 망가지고 있다 해도 그 집은 아이들에게 언젠가 돌아갈 보금자리로 각인되어 있을 수도 있다.

건설 일용직이나 공장 노동자로 일하러 고향을 떠난 부모님을 따라 온 우리 아이들 가족은 대부분 방 한 칸에서 기거하는데, 그 방 한 칸은 가난한 노동자 가족에게 쉼터요, 거실이자 부엌이며 뿌자(예배)를 하는 기도의 장소다.

그 방에서 겨울밤을 지나고 지난 주 아침 7시, 첫 모임에 나타난 아이들은 음습한 겨울 추위를 견디기엔 너무 얇은 옷을 걸치고 거의 대부분 맨 발에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랄릿푸르 지역에서 선발된 아이들과의 모임이었는데, 이 일을 같이 하는 단체가 노조였기에 우리는 지역 노조 사무실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런데 아이들 옷차림도 심란했지만 만남의 장소인 지하 노조 사무실도 컴컴하고 춥게만 느껴져 그 아침이 어찌나 썰렁하던지 근사한 음식점에서 만나자고 하지 않은 걸 무척 후회 하였다. 더구나 그날 준비해 간 것은 털실로 짠 모자였는데 맨발의 아이들을 보니 ‘에구구 다음엔 양말도 준비를 해 와야지’하며 장화를 신은 내가 더 추워 덜덜 떨었다. 하지만 얇은 옷차림의 아이들은 끄떡없다는 듯이 해가 뜨길 기다린다 하였다.

인터뷰 후 개인 파일에 부착할 사진을 찍고 자비의 해를 의미 있게 지내려는 후원자들이 짜 준 털모자를 머리에 씌워 주며 깡마른 양 볼을 쓰다듬어 주었다. 처음 상면하여 어색한 표정이었던 아이들은 작은 모자 한 개에도 함박웃음으로 화답 하였다. 아이들의 표정이 밝아지는 걸 보면서 아이들에겐 사랑한다는 말도 중요하지만 사탕 한 개라도 주어야 한다는 것을 네팔에서 장학 사업을 하며 되새기게 된다. 그래서 뭐라도 주자는 생각으로 모임 때마다 물품을 챙기게 되는데 그 어떤 것보다 아이들이 제일 좋아 하는 것은 비타민이다.

몇 해 전 한마음한몸운동본부에서 지원해 준 성장기 아동을 위한 비타민을 가져와 한 박스씩 준 적이 있었다. 그 비타민을 먹어 작은 키가 기적처럼 커졌다는 소문이 퍼져 지금도 이 지역 아이들은 비타민을 좋아하고 받기를 바란다. 그만큼 아이들의 영양 상태가 부실한데 시골로 갈수록 정도는 더 심해서 도시의 아이들 보다 더 오지로 들어가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지금이 최선인가 가끔 자문하게 된다.

사진=이금연

랄릿푸르 지역 아이들을 만난 다음날 랄릿푸르 시내 한 가운데 있는 파탄 덜바(왕궁Durbar)를 지나가다 살아 있는 여신이라 하는 쿠마리가 살고 있는 집에 들어가 보았다. 이제 8살의 어린이 쿠마리가 여신 노릇을 하기 위해 방문객들의 이마에 볼멘 표정으로 티카를 올려주는 것을 바라보았다. 아이의 표정엔 짜증과 화가 잔뜩 서려 있었다.

쿠마리 복장의 딸아이를 돌보고 있는 아빠에게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허락을 받아 사진을 찍었다. 초경이 시작되기 전까지 여신으로 모심을 받는 아이를 바라보며 우리 장학생들을 떠올렸다. 특히 쿠마리의 맨 발을 볼 때 아이들의 맨발과 겹쳐졌다. 그리고 작은 모자 한 장에도 활짝 웃던 우리 아이들의 밝은 표정이 담긴 내 마음의 사진에 여신 역할 놀이 의자에 앉은 쿠마리의 날카로운 눈빛이 담긴 사진을 대비해 보았다.

극단의 두 그림은 아이들의 인권을 되새겨 보게 하였다. 쿠마리 하우스(집) 입구에서 만난 어른들의 표정은 온순하고 평온 하였다. 쿠마리의 화난 표정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이 그들은 손 담배를 말아 피우고 있었다. 그런데 쿠마리가 살고 있는 방이나 우리 아이들이 살고 있는 방이나 뭐가 다르지? 하며 쿠마리 하우스를 나왔다.


이금연 세실리아
국제 가톨릭 형제회 (AFI) 회원
네팔 환대의 집 'Cana의 집' 활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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