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 도로시가 사랑한 훠스터, 작은 종려나무 딸 타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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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 도로시가 사랑한 훠스터, 작은 종려나무 딸 타마
  • 로살리 뤼글
  • 승인 2016.12.01 10: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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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친구들: 타말과 훠스터

"도로시는 가톨릭 일꾼의 중심일 뿐만 아니라 데이 가족의 중심이었다" (타말 헤네시)

나는 1998년 어느 아름다운 초록의 날에, 도로시의 외딸인 타말 헤네시를 만나러 버몬트 주의 스프링휠드로 차를 몰았다. 타말이 나를 문 앞에서 맞아 주었을 때, 나는 잠시 동안 말을 잃었다. 어머니와 너무나 닮아서 섬뜩할 지경이었던 것이다. 타말은 어머니 보다 약간 키가 작았지만, 네모난 얼굴에 편한 집옷을 입고, 머리카락을 따서 머리 위에 관처럼 얹었으며, 도로시와 똑같이 빠르고 깊은 눈을 지니고 있었다. 우리는 아름다운 대화를 나누었고 이어 타말의 딸과 근처에 사는 <가톨릭일꾼> 신문의 삽화가인 리타 코빈이 합류했다.

타말 테레사, 도로시의 '작은 종려나무'

2년 후(2000년), 나는 타말을 다시 방문했고, 도로시와 딸 사이의 복잡하고도 진한 관계에 대하여 더 알기 위해서였다. 타말은 건강이 좋지 않았다. 관절염으로 다리를 절룩거리고 노년의 잔병치레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정신은 민첩했고, 사람들이 도로시의 웃음이라고 말하는 웃음을 자주 보였고, 그래서 우리가 함께 보낸 시간은 훌륭했다.

도로시는 아이를 가질 수 없을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에, 타말 테레사의 출생은 그에게 커다란 기쁨이었다. 도로시는 타말을 가톨릭으로 세례를 받게 했고, 이어 자신도 세례를 받았으며 이러한 결정으로 타말의 아버지인 훠스터 배터함은 떠났다. 타말은 “작은 종려나무”란 뜻이고, 친구들은 도로시가 이 이름을 스테이튼 아일랜드에 살고 있는 친구 타말 카르만에게서 처음 들었다고 기억한다. 도로시는 딸 이름을 거의 부르지 않았고, 대신 “나의 딸”, 혹은 “내 아이”라고 불렀다. 타말은 어머니를 아주 어렸을 때부터 “도로시”라고 불렀다.

타말이 한 살 반이 되었을 때, 도로시가 세례를 받았고 훠스터가 떠났다. 그 후 수년 동안 어머니와 딸은 여러 곳에서 살았다. 뉴욕시, 로스앤젤로스, 멕시코 등. 도로시가 새로 발견한 그의 신앙을 실천에 옮기는 길을 찾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여름 날 도로시는 스테이튼 아일랜드에 있는 수도원을 위해 요리를 했고 스테이튼 아일랜드 지역 신문에 기사를 썼다.

타말은 정원을 방문하길 즐겼고 어머니에게 이야기를 하곤 했다. 도로시는 그것을 글로 썼고 타말에게 그림을 그리라고 했다. 그들이 뉴욕에 오빠 가족과 머물고 있을 때, 도로시는 피터 모린을 만났고 마침내 가톨릭 신앙과 사회정의에 대한 그의 갈증을 통합하는 길을 발견했다. 일하는 독신 엄마로서 도로시는 타말을 자주 떠나야 했고 올캐인 테사가 타말을 돌봤다.

가톨릭 일꾼이 시작된 후, 도로시와 타말은 가까운 곳에 있는 아파트에서 살든가 가톨릭일꾼 환대의 집에서 함께 살았다. 오늘날의 우리들은 경제공황기의 가톨릭일꾼이 겪어야 했던 뼈에 사무치는 가난을 상상하기가 어렵다. 음식은 형편없고, 뜨거운 물은 안 나오고, 다른 이들과 함께 쓰는 방들은 꽉꽉차고–그리고 항상, 늘, 도로시와 그의 딸보다 가진 것이 적은 사람들, 도로시의 도움과 안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타말: "도로시가 집에 오면 나의 방에 불을 켰고, 나의 삶에 불을 켰다."

타말은 그의 유년기가 보통 가정 같지 않았지만, 결속과 체험이 풍부한 시기였다고 기억한다. 때로는 물질적인 것도 풍부했는데, 그것은 도로시의 가족이나 훠스터에게서 온 선물들이었다. 그리고 도로시도 할 수 있는 껏 타말에게 가난을 덜어주려고 애썼다. 예를 들면 그들이 친구들을 방문할 때, 도로시는 딸을 목욕시키기 위해 목욕통을 쓰겠다고 부탁하기도 했다. 도로시가 돌아다닐 때, 일꾼운동을 위하여 연설을 하고 기금을 모을 때에, 어떤 친절한 사람들이 그의 딸을 챙겨주기도 했다. 타말은 그가 도로시와 함께 갈 수 없었을 때 도와 준 모트가의 사람들을 좋게 말한다:

❧ 그곳에서 자라는 것은 좋았다. 얼마나 열정이 넘쳤는지!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이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았기 때문에 그냥… 너무나 희망으로 가득찼다. 나는 처음 10년간의 분위기를 사랑했다. 그러나 도로시는 자주 여행을 떠났고, 나는 그것 때문에 힘들었다. 나는 그에게 “가고 있음”이라는 별명도 붙였다. 나는 도로시를 너무나 간절히 원했다! 그가 집에 오면 나의 방에 불을 켰고, 나의 삶에 불을 켰다.

기숙사 있는 학교에 갔을 때, 나는 항상 집에 오고 싶었으나, 동시에 집에 있는 것이 나에겐 좋지 않기도 했다. 그곳에는 도로시에 관한 소중한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는 아침식사를 근사하게 만들어주길 좋아했다. 도로시가 음식을 할 줄 모른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하! 그는 매우 솜씨 좋은 요리사였다!

그러나 사람들은 때때로 그에 관해 전혀 잘못 알고 있다. 예를 들면 “천사들을 영접하면서” 영화를 보면, 도로시는 엄격한 모습이다.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 도로시는 집에 들어와 음식하는 사람에게 팔을 걸치고, “오늘 저녁은 무엇이죠?” 라고 묻는 사람이다. 알다시피, 모든 사람들을 아름답게 올려주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의 많은 사진들을 보면 매우 고집스럽고 무슨 수도원 사람같이 보인다. 그러나 도로시는 전혀 그렇지 않다. 너무나 따뜻하고 사랑이 가득한 사람이며 가난한 이들 중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진짜 집을 만들어주는 이다.

타말 "나는 내가 도로시와 똑같이 되기를 원하는 선생들과 맞섰다....
나는 아버지의 성향을 닮았다"

때때로 도로시는 여행을 할 때 타말을 데리고 갈 수 있었다. 사실, 초기 <가톨릭일꾼> 신문들에는 타말이 그린 삽화가 실리기도 했다. 타말은 알라바마에 갔던 일을 기억한다:

❧ 피터 클라버 수녀님이 우리를 데리고 다녔다. 알라바마는 아직도 공황시기였다. 수녀님은 후버스빌을 방문하기 위하여 우리를 데리고 갔다. 그곳 사람들은 헌차를 떼어서 있을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다. 도로시와 여행하는 것은 항상 놀라움이 가득했고, 항상 풍부한 체험이었다!

8살이 되었을 때 타말은 처음으로 기숙학교에 갔다. 타말은 여러 기숙학교를 다녔는데 한 번은 가사와 경작을 가르치는 캐나다의 학교에 가기도 했다. 타말의 말이다:

❧ 나는 내가 도로시와 똑같이 되기를 원하는 선생들과 맞섰다. 8살, 9살이 되었을 때부터 그들은 내가 어른이 되면 일꾼을 물려받을 것이냐고 묻기 시작했다. 나는 겁이 나서 움찔했다. 왜냐하면 나는 도로시와 기질적으로 반대 성향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버지의 성향을 닮았다. 그는 세상과 등지고 사는 사람 같았고, 나 역시 사람들 사이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버지는 세상에서 지는 위치에 있다고만 생각했다. 그는 아이를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이를 갖게 되었을 때, 그는 나를 사랑했다. 난 아버지를 더 잘 알았으면 했다. 우리 둘은 모두 수줍은 사람들이라, 서로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우리는 휴일 때에 만나곤 했는데 서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쓴웃음).

그렇지만 아버지는 나에게 생물학에 관한 책들과 현미경 같은 것들을 보내 주었다 … 그는 훌륭했다. 그는 도로시가 어떤 상황을 겪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내가 아이였을 때 우리는 매우 가까웠던 것 같다. 물론 나는 그런 상황을 실제로 기억하고 있지 못하다. 나는 아버지를 무척 그리워했다. 그런데 알다시피, 무의식 속에서 원했건 것 같다.

타말의 결혼: "그들은 아홉 아이들을 낳았고 이 땅에서 저 땅으로 옮겨 다녔다"

타말이 10대가 되면서, 도로시는 다른 모든 엄마들처럼 타말의 성장에 대해 걱정했다. 실상, 이런 걱정 때문에 도로시는 타말을 세례받게 했던 것 같다. 도로시는 <긴 외로움>에서 쓰고 있다, “나는 내가 겪었던 수많은 세월처럼 타말이 회의하고 주저하고 방종하며 도덕 관념없이 방황하도록 내버려 둘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도 도로시가 보기에, 휴고 신부의 “위대한 피정”은 타말이 필요로 하는 안정에 지렛대 같은 역할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타말은 다르게 생각했고 자기가 살았던 척박한 농촌의 빈한한 삶에 휴고가 주장했던 이탈이 적어도 부분적인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타말은 나에게 말했다:

❧ 도로시는 그가 무엇을 믿고 있으며 무엇을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았다. 그는 그런 삶이 힘들 수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괜찮다고 생각했다. 어머니와 나는 둘 다 강한 사람들이었고, 내가 사춘기 때에 도로시가 매우 종교적이고 엄격했던 때가 있었다. 그 모든 것은 공포스러운 피정 때문이었다.

열일곱살 때에, 타말은 일꾼 데이빗 헤네시라는 사람과 사랑에 빠졌다. 그는 일꾼 운동의 한 부분인 토지분배주의 개념에 매력을 느껴서 왔던 사람이었다. 도로시는 타말에게 열여덟이 될 때까지 결혼할 수 없다고 말했다. 타말은 그의 어머니가 훠스터에게 도움을 청하러 갔던 것을 기억한다. 그러나 훠스터는 결혼을 걱정할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보았고 도로시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딸이 젊었을 때 자기처럼 똑같은 실수를 저지를까봐 두려워하며 도로시는 결혼을 진행하도록 허락한다.

기다리라고 했던 결혼 전 해에 도로시는 타말을 뉴포트의 에이드 베썬 집에 보냈다. 에이드와 그의 어머니가 타말에게 안정된 가족을 느끼게 해주고 손 공예 기술을 배우도록 해 주기 위해서였다. 타말은 이때가 그의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고 말한다.

1944년에 타말과 데이빗은 결혼했다. 그들은 아홉 아이들을 낳았고 이 땅에서 저 땅으로 옮겨 다녔으며, 분명히 긴장과 충돌로 가득찬 결혼생활을 했을 것이다. 타말은 그의 결혼 생활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결혼 했을 때 나는 우리들이 다시 땅의 주인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알다시피, 그것은 어리석고 무모한 여정이었다. 우리 둘은 모두 그런 시도에 적합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남편은 짐 때문에 무너지는 사람이었다. 책임을 감당할 수 없었다. 너무나 무거웠다. 매우, 매우 어렵고 길고도 험난한 여정이었고, 도저히 아홉 아이들을 키울 수 없었다.

그러나 도로시는 타말의 집을 자주 방문했고, 특히 아이들이 새로 태어날 때마다 갔다. 어머니의 이런 방문과 저술로부터 받는 원고료가 타말의 기운을 북돋아주긴 했지만 가난을 극복하기에는 너무나 부족했다. 도로시는 손자들과 증손자들을 사랑했고 다른 할머니들처럼 버릇을 나쁘게 만들었다. 훠스터도 세상에 대한 비관주의에도 불구하고 손자들을 사랑했다. 그러나 타말의 생활은 어려웠다. 마침내 타말이 남편을 떠났을 때, 도로시는 말했다, “나는 네가 그렇게 오랫동안 어떻게 견뎠는지 모르겠다!”

타말은 말을 맺었다: “난 지금 작은 마을에서 살고 있고 근처에 다섯 아이들이 살고 있어요, 손자들과 증손자들도 가까이 살지요. 결국 이렇게 좋게 되었지요.”

도로시가 그의 딸과의 관계에서 보여주는 어쩔 수 없는 열정적 모습에는 많은 복잡함이 있다. 단 하나의 딸에 대한 그의 사랑. 그리고 도로시의 말년에 이 모녀가 얼마나 가까워졌는가를 알게 되어 참으로 위안을 받았다. 타말은 드러나는 것을 원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개인의 영역을 존중하는 것이 타말과 그의 어머니를 가장 존경하는 행위라고 생각한다.

도로시와 훠스터 배터함

가족을 자주 만나는 것 이외에, 도로시는 타말의 아버지인 훠스터 배터함과 연결을 하며 살았다. <긴 외로움>에서 말한 것처럼, 도로시는 자기의 새로운 신앙과 훠스터의 불가지론과 무신론이 화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를 떠났다. 도로시는 훠스터에 대해 쉽게 말을 꺼내지 않도록 조심했지만, 그의 친구들은 도로시가 일생동안 훠스터를 사랑했다고 확신한다.

로버트 엘스버그는 도로시가 개종후부터 일꾼운동을 시작하기 전까지 훠스터에게 썼던 편지를 보았다고 말한다. 로버트는 “어떤 의미에서, 도로시는 모든 것을 갖고자 했다 … 그의 희망은 훠스터가 부드럽게 ‘다시 돌아오라’고 말하는 것이었고 그러면 그들은 결혼할 것이었다,”라고 한다. 로버트는 도로시의 편지 한 구절을 기억한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이 많은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만 우리의 딸을 가톨릭으로 키우는 것을 당신이 허락하는 것이지요. 나는 우리 집을 무슨 온갖 이상한 것들로 채울 계획이 없어요.” 죠오 자렐라는 훠스터에 대한 도로시의 인간적 사랑이 “하느님에 대한 그의 영적인 사랑을 강화시켰다”고 말한다.

도로시의 한 부분은 결혼 생활과 엄마로서의 삶과 사랑했던 남자와의 관계를 갈구했다. 이런 꿈들은 실현되지 못했지만, 도로시는 말년을 훠스터와 딸과 가까이 우정어린 관계를 맺으며 마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마지막 시기까지, 도로시는 그의 가족생활을 가톨릭일꾼의 삶과 분리시켰다. 초기에 그들의 관계는 평온하지 못했다. 톰 코넬은 설명한다:

❧ 도로시는 스캔들을 피하고자 했다. 훠스터를 거의 보지 않았다. 다만 전화로는 자주 통화했다(타말의 학비를 위해서 그에게 가야만 했다). 훠스터에게는 항상 여자가 있었다. 한번은 길에서 여자와 함께 있는 훠스터를 만났다. 도로시는 말했다, “당신이 그 여자를 봤어야 하는데. 바람둥이처럼 화장했어! 빨간 머리에 가슴은 크고.” 훠스터는 이 여인과 장난치며 도로시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내가 보기에 도로시의 반응도 소녀 같았다. 도로시가 위대한 여사에서 소녀가 되는 것도 그의 매력이었다.

도로시는 가톨릭일꾼 운동을 계속하기 위하여 독신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으나, 실제로는 남자친구를 그리워했다. 그는 이것을 넌지시 자주 말하곤 했다. 「긴 외로움」에 나오는 훠스터의 차가운 다리와 함께 침대로 들어가는 것 운운의 구절을 기억해 보라, 놀라운 이미지이다. 당신은 소금 냄새를 거의 맡을 수 있다. 도로시의 침대에서(실컷 웃다).

훠스터의 연인 나네뜨를 돌보다

1959년 도로시는 훠스터와 그의 연인 나네뜨에게 스테이튼 아일랜드의 오두막 중 하나를 쓰게 해 주었다. 나네뜨는 그 때 암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도로시 자신이 나네뜨를 돌보기 위하여 스테이튼 아일랜드로 이사했고 간호원인 진 월쉬에게 도와 달라고 청했다.

진 월쉬는 나네뜨와 훠스터와 도로시와 함께 지낸 시간을 기억한다:

나네뜨는 부드럽고 달콤한 여인이었다. 아름답고 아이 같았다. 그리고 유행을 따르는 여인이었다. 훠스터보다 15년은 충분히 젊었다. 도로시와 훠스터 그리고 나네뜨는 함께 앉아 얘기를 나누며 바다를 내다보곤 했다. 나네뜨는 매우 순진하고 전혀 억제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귀여웠다. 어느 날 나네뜨는 온통 들떠서 나에게 말했는데, 만일 자기가 낫게 되면 옷과 보석을 다 주어버리고 도로시처럼, 예수처럼 살겠다고 했다.

내가 떠나야 할 전날 밤에 나네뜨는 갑작스레 전혀 예측하지 못한 사이 새벽 4시에 죽었다. 나는 옆집에 가서 도로시와 훠스터에게 말했고 그런 다음 떠났다.

수개월이 지난 후, 나는 도로시를 방문했고 그는 나네뜨가 죽은 후 오랫동안 강연하러 다녔다고 말했다. 도로시는 훠스터로부터 달아나고 있다고 했다. 도로시는 늘상 “달아난다”는 말을 썼다.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 당신은 달아난다.”

도로시가 훠스터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데레사 머레이 수녀는 도로시가 매리 하우스로 이사올 때에 도우면서 그가 훠스터에 대해 말하던 것을 기억한다:

❧ 나는 도로시의 물건 포장을 벗기는 것을 돕고 있었다. 훠스터는 그가 미술 책에서 오린 거룩한 그림들을 틀에 넣어 보냈는데, 도로시는 너무 기뻐했다. 나는, “그를 떠난 것이 당신에게 많이 힘들었겠네요”하고 말했다. 그러나 도로시는 만일 우리가 해야 할 것을 한다면 –그것이 희생이라면– 주님께서 틈을 채워주시고 우리에게 훨씬 더 많이 주신다고 말했다. 이런 말은 도로시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대로 하는 말이었고, 당신은 도로시가 훠스터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 수 있다.

도로시의 어떤 친구들은 도로시가 훠스터에게 지쳤고 또한 앞질러 가게 되었다고 하며 “훠스터는 그들이 함께 있었을 때에만 도로시에게 좋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도로시가 그를 계속 사랑했다는 확실한 증거들이 있다. 도로시의 삶의 끝 무렵에, 둘은 거의 매일 만났고, 훠스터는 장례식에 타말과 함께 입장했다. 톰 코넬은 후에 추기경이 성 패트릭 성당에서 도로시 데이를 위한 추모미사를 드릴 때를 기억한다:

❧ 나는 훠스터를 볼 수 있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는 손자들, 증손자들과 함께 첫 번째 줄에 앉아 있었다. 타말은 그곳에 없었다. 나는 계속 생각했다, 이 남자의 마음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을까? 그는 우리들이 알 수 없는 방식으로 도로시를 알았다. 확실히 그를 사랑했다. 도로시도 그를 열렬하게 사랑했다. 그 사랑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 남자에게 도로시는 누구일까, 그리고 그가 이곳으로 걸어 들어올 때에, 성가대가 노래하는 것을 듣고 약 23명의 똑같은 제의를 입은 사제들이 추기경과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무엇을 생각할까? 모두가 한 여인을 위하여 있는 이 모습을.

미사가 끝난 후, 어떤 사람이 훠스터에게 와서 말한다, “추기경님이 당신을 보고 싶어합니다.” 훠스터는 쇠약하다. 그는 너무나 늙고 쇠잔한 모습이다. 그러자 추기경이 와서 그와 악수한다.


출처: <DOROTHY DAY : Portraits by Those Who Knew Her>, by Rosalie G. Riegle, Orbis, 2003. <참사람되어> 편역, 2007년 4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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