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 데이 "극심한 고통 없이는 혁명도 믿음도 얻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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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로시 데이 "극심한 고통 없이는 혁명도 믿음도 얻을 수 없다"
  • 로버트 엘스버그,임선영 역
  • 승인 2016.11.29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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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9일; 가톨릭일꾼 공동창립자, 주님의 종 도로시 데이 기일

“내가 어렸을 적에 읽은 성인에 대한 모든 이야기들은 끔찍했다. 아픈 사람, 장애인, 나환자를 위해 목숨을 바친 고귀한 인물들에 대해 배웠지만 한 가지 의문점이 떠올랐다. 왜 처음부터 악을 피하지 않고 악에 빠진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노력했는가? 왜 성인들은 사회 질서를 바꾸려고 하지 않았는가? 노예를 보살피기 보다는 노예제도를 없애야 하지 않았을까?"

도로시 데이(Dorothy Day, 1897-1980)가 1980년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사람들은 미국 가톨릭계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관심을 끄는 중요한 존재"였다고 평가했다. 교회 내 어떤 공식적 지위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 주어진 특별한 헌사였다.

주님은 내 심장의 피로 얻은 분

그녀는 1933년 평신도 운동인 '가톨릭일꾼'(Catholicworker)을 창설하고 이후 50년 가까이 참여했다. 가톨릭일꾼은 사랑의 실천에 대한 급진적 복음이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자선 행위라는 개인적 영역과 정치적 영역 모두에서 변화가 필요하며, 사회적 폭력에 맞서 저항하는 새로운 자선행위가 요구된다고 판단했다. 그녀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거룩함(political holiness)를 실천했는데, 기도와 희생으로 봉사하며 동시에 가난한 사람들과의 연대와 정의와 평화를 위해 투쟁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이러한 이유로 어떤 사람들은 데이를 공산주의자라고 말한다. 총탄에 맞은 적도 있고 감옥에도 다녀왔으며 수차례 F.B.I의 조사도 받았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비판에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종은 자신의 주인보다 위대할 수 없다"는 게 그녀가 좋아했던 인용구이다.

반면 도로시 데이를 사랑하고 성인이라 칭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는 전혀 다른 문제이다. "사람들이 누군가를 성인이라고 부르는 경우는 그들이 기본적으로 당신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라고 자주 말했다. 그녀는 그들이 자신의 어려움을 몰라준다고 생각했다. "도로시가 그 일을 할 수 있대. 그녀는 성인이 틀림없어!"라는 말로 받아들였다. 

성인이라는 말은 그녀가 어떤 어려운 결정이라도 쉽게 내린다는 의미였다. 사실 자신을 포함하여 그 누구도 도로시 데이가 자신의 소명을 위해 얼마나 큰 대가를 치르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극심한 고통 없이는 혁명도 믿음도 얻을 수 없다. 나에게 주님은 은 30냥에 살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내 심장의 피로 얻은 분이다. 우리는 시장에서 그렇게 싼 값에 주님을 만날 수 없다."는 말도 남겼다.

무정부주의자에서 가톨릭으로

도로시 데이는 1897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영국 성공회 세례를 받았지만 종교 활동은 거의 하지 않았다. 대학 시절에는 급진적 성향을 띠고 그리스도교를 부정했다. 대학 중퇴 후 다양한 급진적 신문사에서 저널리스트로 일했으며 민중 시위에 가담했다. 친구들은 공산주의자거나 무정부주의자였으며 뉴욕 예술계의 다양한 예술가들과도 친분이 있었다. 이들에게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었다.

하지만 1926년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그녀는 스테이튼 아일랜드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았는데 임신을 하면서 신비로운 회심을 경험한다. 그녀가 "자연적인 기쁨"(natural happiness)이라고 부르는 경험과 충동적인 보헤미안적 기질이 합쳐서 그녀의 마음이 하느님에게로 향했다. 딸에게 로마 가톨릭 세례를 받게 하리라 결심하고는 자신도 뒤를 이어 1927년 세례를 받았다. 하지만 그 결과 사실혼 관계가 깨졌다.

그녀가 사랑했던 사람은 결혼에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데이는 개종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교회가 다양한 방식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기는 했지만 단순히 현상 유지에 급급하다고 생각했다. 이후 몇 년 간 도로시 데이는 홀로 아이를 키우며 외로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자신의 믿음과 사회 정의에 대한 헌신을 조화롭게 실천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해달라는 기도를 계속 했다.

복음적 급진주의....가톨릭일꾼운동의 창립

데이의 기도는 1932년 피터 모린과의 만남으로 응답받았다. 그들의 만남은 신이 정해주신 듯 했다. 철학자이자 정치 운동가였던 피터 모린은 도로시에게 새로운 신문을 창간하여 노동자와의 연대를 지지하고 급진적인 복음의 시각으로 사회 체제를 비판하라고 격려했다.

1933년 5월 1일 가톨릭 일꾼을 창간했다. 진실된 예언가가 그러하듯 모린은 사회적 불평등을 격렬하게 비판하며 동시에 예수님의 이웃 사랑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사회 체제를 선언하였다. 자신들의 주장을 실천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도로시 데이는 가톨릭 일꾼 사무실을 '환대의 집'으로 바꿨다. 이곳에서는 대공황으로 삶의 기반이 뿌리째 뽑힌 사람들에게 휴식처를 제공하고 배고픈 사람들에게 음식을 나누어주었다.

하지만 데이의 신념은 자선 활동으로 끝나지 않았다. 예수님의 산상수훈은 비폭력에 대한 의무를 말하며 이는 타협할 수 없는 문제라고 생각했다. 비난이 거세어졌지만 그녀는 제2차 세계 대전 내내 평화주의자로서의 입장을 바꾸지 않았다. 이후 냉전에 반대하는 다양한 시민불복종 운동에 참여했다. 1960년대 시위가 일반화되면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는 일상에 뿌리를 두고 미사와 기도로 유지되는 도로시 데이의 방식은 특별한 신뢰감을 얻으면서 동시에 비난을 받았다.

가난한 이들의 신비에 집중한 삶

사회에 대한 급진주의적 입장(데이는 자신을 무정부주의자인 동시에 평화주의자라고 불렀다.)과 전통적이며 보수적인 경건함을 어떻게 동시에 실천할 수 있었을까? 가난, 복종 그리고 자선에 대한 헌신은 어느 수녀 못지 않았다. 하지만 가난한 사람들과 생활하며 불확실하고 불규칙적인 세속 세계에도 온전히 머물렀다.

데이가 존경하는 성인은 리지외의 소화 데레사였다. 가르멜 수도회의 수녀였던 데레사는 일상 중에 사소한 일들을 하면서도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는 "작은 길"이 있다고 말했다. 이에 영감을 얻은 데이는 아무리 작은 사랑의 행위라도 세상에 사랑이 퍼지는데 기여할 수 있으며, 사랑 안에서 감내해야 할 고통은 다른 이들의 고통을 덜어줄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신념은 예수님의 지체로 우리가 하나라는 의미와 비슷하다.

자선의 실천과 정의에 대한 사명감이 한데 어우러져 도로시 데이는 우리 시대에 필요한 신성함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그녀는 교회가 세상의 시각으로 사회 비판성과 신앙의 신비를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로시 데이의 일생은 살아있는 우화로 그녀가 말했던 "가난한 이들에 대한 신비"에 집중한 삶이었다. 그녀는 1980년 11월 29일 세상을 떠났다.

"가난한 이들이 예수님이다. 그들을 위해 한 행동이 예수님을 섬기는 일이다."


번역: 임선영 아우구스티나
원문 출처: <모든 성인-우리시대를 위한 성인, 예언자, 증인들>(All Saints), Robert Ellsberg, crossroad, 1997, p519-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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