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장의 촛불처럼 성령의 빛으로 살았던 예언자, 피오레의 요아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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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의 촛불처럼 성령의 빛으로 살았던 예언자, 피오레의 요아킴
  • 한상봉
  • 승인 2016.11.28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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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한상봉

광화문 광장에서 백만 개의 촛불을 바라보며 목격한 것은 ‘종교’였다. 혁명을 부르는 집회와 시위는 언제나 바리케이트 뒤에서 항거하며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던 ‘폭력’의 그림자 위에서만 승리를 약속받았지만, 지금 광화문에선 촛불만이 일렁이고, 경찰차벽에는 꽃그림이 낙엽처럼 수없이 달라붙었다. 청소년들이 여리고 맑은 목소리로 ‘혁명정부’를 노래하는 나라, 그날 광화문에서 사람들은 ‘일치’를 경험했다. 모두가 형제자매임을 느끼고, 배려하고, 따뜻한 시선을 주고받았다. 이곳에서 만났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 안에서 일치를 경험했다.

종교란 무릇 하느님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형제자매임을 확인하는 ‘사랑의 잔치’다. 광화문에선 종교처럼, 교회 밖에서 오히려 종교처럼, 모두가 하나임을 경험한다. 예수님은 평생 시골에서 살았으며, 생애의 마지막 행로에서 예루살렘에 도착했지만, 결국 성 밖에서 돌아가셨다. 이제 우리는 안온한 성전 안에서만 그분을 만날 수 없다. 그분은 죽고 부활하신 뒤에 이미 성전을 떠나 당신의 살 같은 흙냄새가 폴폴 날리는 갈릴래아로 돌아가셨다. 사람들의 광장으로 돌아가셨다.

성당에 앉아 있어도 그 공간에 함께 앉아 있는 이들에게서 형제의 온기와 자매의 사랑이 느껴지지 않는다면 광장으로 가라. 같은 하느님 이름을 부른다고, 예수 마리아 요셉 성인의 이름을 똑같이 발음한다고 해서, 한 식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 함께 고통을 받고, 나누는 희망이 같아야 형제자매다. 이제 종교가 광장으로 나왔으니, 한 주일에 한 번 쯤 광장에서 그분을 만나야 하지 않을까.

교회의 경계의 넘어선 신비가, 요아킴

교회의 경계를 넘어 세상 안에서 오히려 그분을 찾을 수 있다고, 성령은 교리와 신조, 성소와 세속을 가르지 않고 자유롭게 넘나든다고 역설한 중세기 신비가가 있다. 피오레의 요아킴(Joachim of Fiore, 1132-1202)이다. 요아킴은 시토회 수도원 원장이면서 신비주의자이고 신학자이며 역사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피오레의 요아킴

나폴리왕국의 첼리코에서 태어난 요아킴은 팔레스티나 성지를 순례하다가 엄청난 재난을 목격하고 수도자가 되기로 결심했으며, 사순시기에 타보르산에서 묵상하다가 부르심을 받았다. 이탈리아로 돌아와 시토회에 입회하고, 1168년에 사제로 서품되었다. 성경의 속뜻을 밝히는 설교와 글쓰기에 전념하다가 마침내 칼라브리아 산속의 피오레에 수도원을 세우고, 시토회 가운데 가장 엄격하게 살다가 1202년 3월 30일에 이승을 떠났다.

요아킴은 <신약성서와 구역성서의 조화에 관한 책>과 <요한의 묵시록 설명>과 <10개의 줄이 달린 현악기>라는 책을 썼는데, 여기에 ‘영원한 복음’이라는 독특한 신비사상을 담았다. 그것은 인간 역사가 삼위일체 세 위격에 해당하는 세단계로 진행된다는 거였다.

첫 번째 단계는 성부(聖父)가 구약성경의 질서에 따라서 권능과 위엄으로 다스리는 세상이다. 노예제도가 사회를 유지시켰던 율법의 시대였다. 이 시대는 선행 공덕이 중요했다.

두 번째 단계는 지혜가 성자(聖子)를 통해서 계시된 시대인데, 신약성경과 가톨릭교회가 세상을 관장하던 시대이다. 이 시대에는 율법을 대신해서 성직자가 중요한 교회 중심의 시대이다. 여기선 신앙이 구원의 잣대였다.

세 번째 단계는 성령의 시대인데, 모든 교회가 문자의 족쇄에서 벗어나고, 사랑의 질서 안에서 만인이 하나가 된다. 요아킴은 이 ‘영원한 복음’이 세상 끝 날까지 계속되리라 믿었다. 이제 사람들은 국가와 교회의 권위에도 매이지 않고 관상생활을 하며, 성령이 주시는 사랑만을 따라서 살 것이라고 예언했다.

권위보다 사랑을, 문자와 교리를 넘어서는 성령

이런 요아킴의 생각이 너무 급진적이어서, 1215년의 제4차 라테란공의회에서 단죄 받기도 했지만, 요아킴의 사상은 예수님의 복음정신이 아직 생생하게 살아있던 원시교회의 모델을 따랐기 때문에 특히 프란치스코 회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요아킴이 살았던 11-12세기는 교회가 황제의 권력을 제압하고 최고의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교회가 하나의 제국처럼 운영되고, 교황이 황제처럼 군림하였다. 요아킴은 이러한 세속화에 맞서는 복음적 순수성을 갈망했다. 그는 권력화된 교회가 사도적 단순함, 청빈에 대한 이상, 세상과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교회로 개혁되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여전히 중요하지만, 교회문제를 해결하려면 성령의 역할이 더 중요하다는 거였다. 어떤 권위보다 사랑이, 문자와 교리를 넘어서는 성령이 세상을 하나로 묶어서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것이다. 비록 요아킴은 당시 교황청의 단죄와 비판을 받았지만 수도자로서 거룩한 삶을 살았기 때문에, 죽은 뒤에도 그의 무덤가에는 공경과 기도를 바치는 신자들이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사람들이 자신을 예언자라고 부르는 것을 철저히 거절했으나, <신곡>을 쓴 단테(A. Dante, 1265-1321)는 요아킴을 “예언자의 정신을 타고난 사람”이었다고 칭송했다.

“나의 무게는 나의 사랑, 어디로 이끌든지 그리로 내가 가나이다”

지금은 길바닥 영성이 빛을 드러내는 시대이다. 사제들은 세상의 약자들과 더불어 비를 맞으며 거리에서 미사를 봉헌하고, 수도자들은 바람 부는 광장에서 기도를 드리고, 신자들은 교회 밖에서 하느님 나라의 비전을 본다. 성령은 교회 안에 갇혀 지내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그분의 바람은 교회 안에도 불고 교회 밖에도 머문다.

만약 교회가 거룩한 장소라면, ‘성당’이기 때문이 아니라, 복음에 대한 거룩한 갈망을 품은 이들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사실상 거룩한 장소가 아니라 거룩한 사람이 세상을 축성하기 때문이다. 사랑이 머무는 곳에 사랑이신 그분이 현존하시기 때문이다.

깊은 종교적 회심을 하고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나의 무게는 나의 사랑, 어디로 이끌든지 그리로 내가 가나이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사목자로서, 학자로서, 영적 인간이었던 아우구스티누스는 <요한서간 주해>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자유로운 영혼에 대해 이렇게 전한다.

“사랑하라! 그리고 그대가 하고 싶은 일을 행하라.(Ama! et quod vis fac) 입을 다물려거든 사랑으로 침묵하라. 말을 하려거든 사랑으로 말하라. 남을 바로잡아 주려거든 사랑으로 바로잡아 줘라. 용서하려거든 사랑으로 용서하라. 그대 마음 저 깊숙한 곳에 사랑의 뿌리가 드리우게 하라.”

우리시대는 부자청년의 율법준수를 넘어서야 한다. 피오레의 요아킴은 사랑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구원하고, 그 사랑만이 ‘이웃사랑’을 ‘하느님 사랑’과 만나게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지금 그 사랑이 광장에서 촛불로 세상을 밝히고 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기사출처/의정부 주보 2016.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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